7장 무산[3]
7장 무산[3]
휘릭!
검기를 머금은 검이 내 안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진탁의 검세는 강검처럼 묵직하면서 환검처럼 현란했다.
하지만 검을 뻗는 족족 내가 부드럽게 피하거나 막아내자 놈의 표정이 점차 가라앉았다. 유씨세가의 가주도 아니고, 그 자식놈 따위가. 그 심정이 살기가 되어 사방으로 뻗어 나왔다.
더군다나 나는 가문의 독문무공인 운류검법으로 마진탁을 압도하고 있었다. 사십 년 내공의 뒷받침으로 대성한 이후 운류검법의 단점을 들춰내고 장점을 부각시켰다.
본래의 운류검법보다 한, 두 단계는 발전했으면서 특징은 그대로 가져갔다.
마진탁으로서는 유씨세가의 소공자가 펼치는 운류검법에 자신이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이다.
“여태까지 실력을 숨기고 살았던 것이냐?”
마진탁의 물음에 나는 대답 대신 놈의 하단을 검으로 그었다.
놈은 자리에서 튀어 올라 공격을 피해냈고, 내 검은 부드럽게 회전하며 허공을 가로질러 놈을 추격했다.
텅!
“크윽!”
공중에서 검을 막아낸 마진탁은 신음과 함께 추락하면서 비틀거렸다. 틈을 놓치지 않고 곧장 놈에게 쇄도해 들어가던 나는 순간 방향을 틀었다.
놈이 다급하게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는데, 그게 내 경로 앞에서 폭사했던 탓이다.
파스스-
“독?”
나는 의외라는 얼굴로 마진탁을 응시했다. 놈은 독연(毒煙)을 마치 장벽처럼 사이에 두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치명상까진 아니지만 이미 몸 곳곳에 여럿 검상이 새겨져 있는 상태.
수세에 몰린 싸움의 양상을 뒤바꾸기 위해 잠시 시간을 벌려는 심산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왜 마협문인지 똑똑히 알려주거라.”
마진탁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수하들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줬다.
“그래. 이게 마협문이고 너 따위가 마협문주구나.”
“닥쳐라!”
마진탁은 수치심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져서 소리쳤다. 딱히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할 말이 있을 리가.
“독연 따위야···.”
나는 내공을 끌어올려 운류검법을 극성으로 펼쳤다.
휘릭!
내가 휘두른 검로에 부드러운 바람이 깃들었다. 끈적하게 퍼져나가던 독연은 그 바람을 타고 내 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휙!
이어지는 호선에 독연이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고.
파앗!
검을 떨쳐내자 둥글게 뭉쳤던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가 흩어져서 사라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진탁은 입술을 깨물었다.
독연 뒤에 숨어 무언가 비장의 한 수라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기다려 줄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다시금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니, 그러려는 순간이었다.
“유씨세가를 처리하는 대가로 왜 이십만 냥이나 내놓나 했더니.”
뜻 모를 말이 내 검을 다시 붙잡아두었다.
“무슨 소리지?”
“...내가 고작 자식놈의 복수를 위해 이런 일을 벌였을 거라 생각하느냐?”
단순한 시간 벌이를 위해 지껄이는 말 같진 않았다. 자조적인 음성엔 자괴감이 깊게 깔려 있었다.
“마협문의 배후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뜻인가?”
“거기까진 알아내지 못했나 보군.”
“그게 누구지?”
“...”
마진탁은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속내의 진실까지 내보이면서 모자랐던 시간을 충분히 벌었다는 듯 기세가 대번에 뒤바뀌었다.
우웅!
주변 공기마저 반응할 정도로 진동하던 놈의 검 주변에서 빛줄기가 터져 나왔다. 겹겹이 쌓여가던 빛무리는 이내 하나로 합쳐졌다.
“검강?”
내가 짐짓 놀랐다는 눈치이자 마진탁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처음 봤을 텐데, 이게 뭔지는 알아보는구나. 한낱 애송이 따위에게 펼치게 될 줄이야. 감사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여라.”
승기를 되찾아왔다는 듯 얼굴에 만연한 미소가 가득했다. 예의 그 오만한 표정도 함께였다.
그럴 만했다. 검강은 아무나 펼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니까. 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마진탁은 아직 인극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 근처를 서성이며 억지로 비집고 파고들어 간신히 일구어낸 반쪽짜리.
그래도 검강은 검강이다.
촤악!
내 검에 서려 있던 검기가 놈의 검강과 충돌하자 먼지처럼 바스러졌다. 순식간에 삼십여 합이 지나가면서 이번엔 내가 수세에 몰렸다.
“네 나이대의 아이들과 비교하면 훌륭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이십 년이 넘도록 철혈검이라 불리는 나를 혼자서 상대한다는 건 자만이지.”
팟!
옆구리가 베이며 핏물이 튀었다.
촤아-악!
다음은 오른쪽 허벅지가 갈라졌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으나 나는 패색이 짙은 얼굴로 주춤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그게 네놈이 죽는 이유다.”
마진탁은 이만 끝내겠다는 듯 내 목을 향해 검을 휘둘러왔다.
텅!
나는 간신히 검을 쳐낸 뒤 바닥을 한 바퀴 굴러 더욱 거리를 벌렸다.
“끈질긴 놈이로군.”
놈이 혀를 차며 다가오는 사이에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협문의 배후가 도대체 누구냐?”
“...죽는 마당에도 그게 그렇게 궁금하더냐?”
“씨발, 알고는 죽어야 덜 억울하지. 이대로는 못 죽겠다.”
내가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나면서 비틀거렸다. 이미 전세는 기울었다. 그렇게 여긴 마진탁이 껄껄거리며 대답했다.
“정확한 정체는 나도 모른다. 다만 별다른 교류도 없던 본문에 거리낌 없이 이십만 냥을 내놓을 만큼 금력이 대단한 자. 그렇게 알고 있을 뿐이지.”
“...그게 다라고?”
“현재로선. 네놈을 죽이고, 네 아비도 죽이고 유씨세가를 내 발밑에 두게 되면 다시 만나볼 수 있겠지.”
“놈들이 유씨세가를 노리는 이유는?”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 부분은 자신도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이 언뜻 드러났다.
“나머지는 저승에 가서 네놈이 직접 알아보거라.”
마진탁이 조소와 함께 검을 치켜세웠다.
나도 놈을 따라 웃으면서 내공을 끌어올렸다. 놈과 달리, 내 검강은 빠르고 자연스럽게 피어올랐다. 비틀거리던 몸짓 또한 어느새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네, 네놈이···?”
마진탁의 전신이 벌벌 떨리는 게 보였다. 그럴 것이다. 반쪽짜리라도 검강을 펼칠 수 있는 고수이니 내 검강의 수준도 알아봤을 터.
이번에도 나는 마진탁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처음 봤을 텐데. 이게 뭔지는 알아보는구나.”
*
푸확!
심장에 꽂아 넣었던 검을 뽑자, 마진탁이 허망한 눈빛과 함께 바닥으로 기울었다. 나는 놈의 마지막을 무심히 쳐다보다가 가면과 죽립을 챙겨 썼다.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몰아붙여!’
‘버텨라! 문주님이 곧 돌아오실 거다!’
‘이 개새끼들-!’
문주전의 담 너머, 내원의 중앙 부근에서는 여전히 혈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내공을 끌어올려 기감을 확장하자 숫자가 대략이나마 가늠됐다.
살아있는 흑사방 무인들은 서른 명 남짓. 적사와 청사의 기운도 느껴졌다. 반대로 마협문은 대항하는 숫자가 스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대신 간부급 고수의 숫자가 우위였다.
어느 한쪽이 마음먹고 물러나지 않는 이상, 양패구상을 면치 못할 만큼 팽팽했다. 이대로 싸움이 끝나도 흑사방과 마협문은 예전의 위세를 찾지 못할 것이다.
바라던 대로 일이 마무리되고 있었지만 마진탁의 언급이 마음에 걸렸다. 금력이 대단한 자. 그런 인물이 왜 우리 가문을?
나는 마진탁의 시체에서 운류검법의 흔적을 훼손한 뒤 문주전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빈 건물의 일 층부터 사 층까지. 구석구석 빠르게 살펴봤지만, 정보가 될 만한 건 찾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건물을 빠져나와 마진탁의 시체를 들추고 품 안을 뒤졌다. 그런 내 손에 서찰 한 장이 딸려 나왔다.
‘수단은 상관없다고 했지만 흑사방 따위를 끌어들이다니. 그분께서 탐탁지 않아 하시긴 했으나, 일만 제대로 처리한다면 잔금은 제대로 지급할 거요.’
내용을 보니 배후, 정확히는 배후의 수하쯤 되는 자가 보낸 서찰 같았다. 그것도 최근에.
‘그분을 뵙고 싶다던 마문주의 제안은 이번 일이 마무리된 후에 고려해 보신다고 하니 기다려주시오.’
내용은 이게 전부였다. 마진탁의 언급과 별반 다르지 않은. 다만 서찰 끝부분에 월(月)이라는 붉은 글자가 날인되어있었다. 배후의 이름 혹은 세력을 뜻하는 단어려나.
그것만으로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기에 일단 서찰을 갈무리했다. 내원 쪽의 소란이 점차 잦아들고 있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어쩌다 이 지경까지···.”
적사가 체념한 눈빛으로 장내를 둘러봤다. 길고 길었던 혈전이 막바지에 다다라있었다. 결과는 만신창이였다.
승자는 없고, 허망한 표정의 패잔병들만이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간신히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흑사방과 마협문. 둘이 합쳐 살아남은 숫자가 열다섯 남짓.
적사는 입가에 흘러내리는 핏물을 씹어 삼키며 내원의 가장 안쪽 건물을 주시했다.
마협문주와 백면공자의 싸움은 일찍이 마무리된 것 같았는데 누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자가 졌을 리는 없다.’
철혈검의 무위가 대단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맞상대까지 해봤던 백면공자는 절정을 아득히 뛰어넘은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서 그를 따랐던 것이고. 그랬는데.
“이제야 깨달았냐. 병신같은 새끼야.”
청사가 옆으로 다가와 자신 못지않은 엉망진창의 몰골로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게 그자가 원하던 결과였어.”
“...무섭고 악독한 개새끼였네. 빌어먹을.”
“이만 물러나자. 더 남아서 싸울 이유가 있냐?”
적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싸울 이유가 없었다. 마협문의 생존자들도 이미 싸울 의지를 잃은 것 같았다.
“그 새끼. 언젠간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버리겠어.”
적사가 복수를 다짐하면서 뒷걸음질로 물러나다가 빠르게 몸을 돌렸다. 청사는 묵묵히 그를 뒤따랐다.
두 사람은 마협문을 빠져나와서도 한참을 더 내달렸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지나쳐 인근 숲으로 들어가 인적이 없는 곳까지 도착하고 나서야 잠시 숨을 돌렸다.
적사가 바위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엿 같은 날이네.”
흑사방을 장악하고 방주의 자리를 차지했을 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고작 며칠 만에 흑사방이 사라지고 자신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였다.
아. 물론 청사가 있으니 혼자는 아니었지만, 놈과는 흑사방 말단 시절부터 협력이란 걸 해본 적이 없는 삭막한 관계였다.
“이제 어쩔 거냐?”
적사는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청사를 올려다봤다.
“어쩌긴.”
청사가 피식 웃으면서 적사의 앞으로 다가가 시선을 맞췄다.
“무섭고 악독한 개새낀데, 살려면 따라야지.”
“뭘 따른다는···.”
적사는 말을 하다 말고 눈을 치떴다. 푸욱, 하는 섬뜩한 소리가 가슴께에서 울려 퍼졌다. 시선을 내리니 청사가 품속에 지니고 있던 소도를 움켜쥐고 있는 게 보였다.
“너, 언제부터···.”
“고생했다.”
청사는 적사의 숨이 끊어진 걸 확인한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수풀 너머의 어둠 속을 향해 있었다.
그곳을 향해 청사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개새끼라는 말은 적사 놈이 했던 말을 빌린 것뿐입니다. 제가 아니고요···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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