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일상[1]
8장 일상[1]
나는 끝까지 살아남은 청사와 함께 백의문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청사는 자신의 생사에 관해 캐물었다.
‘살려주시는 겁니까? 저도 이제 백의문의 문도죠?’
‘마종태. 그 새끼는 마협문을 기습하자마자 제가 찾아가서 목을 쳤습니다. 시비를 겁탈하고 있었는데, 놈이 저보다 더 사파인 같았다니까요.’
‘마협문의 장로. 매풍검도 제가 잡았습니다. 그자도 나름 일류를 넘어 절정을 바라보는 고수인데. 그 외에도···.’
‘적사 놈도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가서 깔끔하게. 아, 이건 직접 보고 계셨죠.’
내가 시켰던 일과 더불어 자신이 세운 전과도 강조했다. 내가 묵묵히 듣고만 있자 결국 백의문의 정문 앞에서 청사가 우뚝 멈춰 섰다.
“...대답 좀 해주세요.”
청사가 나를 응시했고 나도 그를 바라봤다.
“들어와.”
내 말에 청사가 눈을 빛냈다.
“백의문의 일원으로 받아주시는 겁니까?”
“임시다.”
“임시라면.”
“백의문의 일원이 되려면 시험을 치러야지.”
이번엔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청사가 그런 얼굴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백의문의 무인 열다섯 명. 그들의 무위를 일류까지 끌어올려. 기한은 두 달.”
두 달이라는 말에 청사가 깜짝 놀랐다. 백의문의 무인들은 대부분 이류에 머물러 있었다. 이류에서 일류는 겨우 한 단계의 차이일 뿐이기에 가능하지 않냐 싶겠지만.
“그, 그게 말이 됩니까? 두 달이라뇨.”
청사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겨우 한 단계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수련해도 일류에 도달하지 못하는 무림인들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노력의 기준이 내 기준이라면 불가능하지많은 않았다.
“새벽에 눈을 뜨고서부터 다시 새벽에 눈을 감을 때까지. 수련에만 집중해. 수련 과정은 알려줄 테니까, 네가 대표해서 그들을 지도해라.”
“그래도 두 달은 무리 아닙니까?”
“해 본 적은 있고?”
“...없습니다.”
청사가 고개를 숙였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잠까지 줄여가며 수련에 노력을 쏟아붓는다.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처음 며칠은 해낼 수 있어도 그 노력을 지속하기 위해선 지독한 정적과 괴로움에 둘러싸여 단념의 유혹을 떨쳐내야 했다.
이렇게 수련했는데 고작 이 정도밖에? 하는 순간이 매번 찾아올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하는 천재가 아니라면.
하지만 일류 정도는 흔히 말하는 노력이 아니라 제대로 된 노력으로 충분히 다다를 수 있는 경지다. 거기에 간절함까지 더해줄 생각이다.
“두 달 안에 일류의 경지에 도달한 놈들은 수준에 맞는 무공을 하나 알려주겠다고 해.”
“문주님이 직접이요?”
“직접.”
청사가 군침을 삼켰다. 무림인이라면 무공에 대한 갈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일류에 도달해 그에 걸맞은 무공을 지닌다면 다음을 논할 수도 있고.
“저는요?”
“너는 시험이라고 했잖아? 통과하면 진짜 백의문의 일원이 되는 거지.”
“아니, 저도 보상 정도는 있어야···.”
청사가 나를 따라 백의문 안으로 들어섰다. 공손량과 문도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백의문의 내부를 한차례 둘러봤다. 원래는 공손량에게 관리를 일임하기로 했었다. 지금은,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정체도 알 수 없는 배후가 유씨세가를 노리고 있다는데 가만히 앉아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협문주조차 본체를 모를 만큼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니 이쪽에서 밝혀내기도 쉽지 않을 터.
놈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든 내가 먼저 찾아내든, 그 순간에 휘두를 수 있는 칼 하나쯤은 마련해두어야 했다. 백의문은 외부에서. 나는 유씨세가 내부에서.
*
다음날.
공손량과 문도들이 돌아왔다. 표정이 밝은 걸 보니 일이 잘 풀렸나 싶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문주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맞이하는 건 나였는데, 공손량이 내 말을 가로챘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협문쯤이야.”
“하하. 제가 실언했습니다.”
공손량도 마주 웃으면서 성과를 보고했다.
마협문이 멸문했다는 소식이 일강현 쪽에서 빠르게 퍼지고 있고, 그 소식이 노주를 지나치면서 흉수가 흑사방이란게 알려질 것이다.
마협문과 흑사방은 암중계약을 통해 유씨세가를 장악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내부적으로 분란이 터져 서로 자중지란을 일으켰다.
계약서라는 명백한 증거가 뒷받침하는 그 사실이 다시 산서 전역으로 뻗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노주 지역을 제외하면 백의문이나 백면공자를 향한 관심은 크지 않을 겁니다.”
노주야 어쩔 수 없지. 현재 백의문이 있는 곳이고 백면공자인 내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이니.
“이 정도면 충분해. 다들 고생했다.”
나는 공손량과 더불어 열다섯의 문도들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근데 진짜 고생은 지금부터일 거야.”
언사룡을 비롯한 문도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만 남기고 공손량과 청사를 데리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탁자에 자리를 잡으면서 가면을 벗었다. 공손량이 깜짝 놀라고 청사는 경악했다.
“문주님?”
“무, 문주님? 이 자가?”
두 사람이 나와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일단 앉아.”
내 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나는 청사를 먼저 바라봤다.
“생각보다 어린놈이라 당황스럽나?”
“...아뇨. 그래서 놀란 게 아니라. 문주님의 정체가 설마 유씨세가의 소공자이실 줄은.”
청사각을 이끌던 놈이었으니 내 얼굴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 여겼다.
“와. 좆될 뻔했네. 공총관. 조언 고마웠습니다.”
“예. 뭐···.”
살려달라고 빌어보라는 조언뿐이었지만, 어쨌든 덕분에 살았다는 표정이었다.
공손량은 손을 맞잡는 청사를 뿌리치고 내게 시선을 건넸다. 설명을 부탁한다는 눈길이어서 나는 품속에 지니고 있던 서찰을 꺼내 보였다.
공손량은 서찰을 읽어보더니 내 의도를 알아차렸다.
“청사각주 정도의 실력이면 꽤 도움이 되겠지요. 한데 배후가 따로 있었다니.”
“정보는 이게 전부야.”
“찾아내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찾아봐야지. 대비도 하면서.”
나와 공손량의 시선이 청사에게 옮겨졌다. 공손량이 내려둔 서찰을 슬쩍 읽어보고 있던 청사가 눈을 빛냈다.
“저도 이제 백의문도입니다. 밖에 있던 놈들. 전부 일류로 만들어놓겠습니다.”
“백의검대.”
“예?”
“수련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저들은 백의검대라 불릴 거다. 너는 백의검대주··· 이름이?”
나나 공손량이나 계속 청사라고 부를 순 없었다. 청사가 이름을 밝혔다.
“이자청입니다.”
“그래. 임시 백의검대주 이자청. 백의검대 전원이 일류의 경지에 오를 때, 너는 절정의 벽을 뛰어넘게 해주지.”
이자청은 현재 벽 하나를 앞두고 있었다. 그 벽만 넘으면 백사각주보다 강해질 것이고 조금 더 나아가면 흑사방주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마협문주의 실력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
백의검대의 간절함이 무공이라면 이자청의 간절함은 벽을 뛰어넘을 가르침이다.
내 제안에 이자청이 탁자 위로 이마를 처박았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한다면 하는 놈인 거, 보셨잖아요.”
*
화려한 장삼의 노인이 보고서를 내려다봤다. 마협문주가 죽고 마협문이 멸문이나 다름없는 피해를 보았다고 적혀있는.
“흑사방이 기습했다고?”
노인의 목소리가 가라앉아있었기에 복면인도 몸을 낮추었다.
“예. 백 명이 넘어가는 숫자가 야습을 가하는 바람에···.”
“고작 흑사방 따위에게 산서에서 손꼽히는 고수라 여겨지는 마협문주가 당했다?”
“흑사방주도 실종된 거로 보아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덤벼든 것 같습니다.”
마협문주가 전력을 보존하고자 흑사방을 끌어들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했으니까.
그게 실수였다. 혹은 마협문주가 명성과 달리···.
“무공밖에 모르는 병신같은 새끼. 검을 휘두르라니까 같잖게 머리를 굴려서!”
노인이 화를 참지 못하고 보고서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복면인으로서는 최대한 고개를 숙여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노인의 분노는 자신이 아닌 유씨세가를 향했다.
“두 번째로군.”
“예?”
“유씨세가가 연관된 일이 두 번이나 틀어졌다.”
“그, 그렇습니다.”
“우연이라 생각하나?”
복면인은 눈만 깜빡였다. 우연이 아니면 뭐가 또 있나? 대답하는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럴 땐 그냥 닥치고 있는 게 상책이다.
“세 번째는 직접 나서야겠다.”
“직접 나서시겠다고요?”
“어차피 목표는 성화상단. 맹의 정리가 끝나가니 위에서 곧 사람이 내려올 거다. 그전까지 산서의 상권을 확실히 장악해둬야 한다. 두 번이나 일이 틀어진 변수가 뭔지도 확인해둘 겸 정공법으로 가야겠어.”
노인의 서늘한 눈빛에 복면인이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준비하겠습니다.”
*
“뭐든 알아내면, 유씨세가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공손량이 홀로 백의문 앞에서 나를 배웅했다. 이자청과 백의검대원들은 지금쯤 어딘가의 산속을 뛰어다니며 피땀을 흘리고 있을 터였다.
가면을 쓰지 않은, 유진휘의 얼굴로 내가 말했다.
“전에도 말했듯이 돈은 마음껏 써. 이번에 마협문에서 들고 온 게 얼마라고 했지?”
마협문주와의 싸움 이후 문주전을 살펴보면서 배후의 정보는 찾지 못했지만, 돈이 될 만한 건 여럿 발견했다.
추적할 수 있는 전표는 차치하고 현금과 금붙이들. 처음 보는 이름 모를 보석들. 부피가 큰 것은 제외하고 이자청과 나눠서 싹 들고 왔다.
“전부 현금화시키면 족히 사만 냥은 될 겁니다.”
문주전에서만 사만 냥.
다른 건물까지 털었다면 액수가 더 컸겠으나 괜한 욕심으로 자칫 이목을 끌 수도 있었기에 포기했다. 무인들은 대부분 죽었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들은 어딘가에 대피해 있었을 테니.
“기존에 남아있던 금액을 합치면 현재 백의문의 예산은 은자 오만 냥입니다.”
“이자청에게도 알아서 지원하고. 영약은 아직 연락이 없지?”
자신을 평범한 의원이었다고 소개했던 언예령이 실은 노주에서 꽤 유명한 의원이었다는 이야길 공손량에게 들었다.
하긴, 그랬으니 백사각주의 눈에 들었었겠지. 해서 그녀에게 혹시나 영약을 구할 방도가 있냐고 물어봤고 그녀는 과거의 인연을 통해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겠다고 했다.
“아직 없습니다. 시간 날 때 종종 들러 자주 확인해보겠습니다.”
나머지 자잘한 부분도 공손량이 알아서 처리할 테고.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 싶어 나는 백의문을 뒤로한 채 신로객잔으로 향했다.
*
아직 대낮인지라, 왕삼은 전처럼 수련을 위해 밖을 나돌아다니고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객잔에 도착했을 때. 왕삼은 객잔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도련님-!”
날 발견하자마자 달려오는 녀석을 보니 내가 돌아올 걸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알고 기다리고 있었냐?”
“소문이 쫙 퍼졌잖아요. 마협문. 흑사방. 흑사방이 움직인 게 사실은 마협문 때문이었다니···.”
적잖이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두 세력이 서로 자중지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뻔했어요.”
“그러게. 참 다행이지.”
내가 한숨까지 내쉬며 안도하는 표정을 짓자 왕삼이 눈을 흘겼다.
“...다행은 무슨. 대체 어떻게 한 거죠?”
“둘이서 치고받고 싸웠다는데 내가 뭘?”
“백면공자가 나섰다는 얘기도 없고. 소문은 그렇긴 한데. 도련님이 하신 것 맞잖아요.”
“집에나 가자.”
“앗!”
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내게 왕삼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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