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일상[2]
8장 일상[2]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협문과 흑사방 소식이 전해진 후였다. 외가로 피해 있던 어머니도 돌아와 있었고 긴장으로 어수선했던 분위기 또한 진정됐다.
“외가에 가 있으랬더니. 이번엔 또 어느 산에 올라 수련하고 왔느냐?”
백면공자로 활동하는 동안 나는 외가가 아닌 적당한 장소에 잠적해 수련하다가 복귀하겠다고 전해뒀었다.
“그저 마냥 걷다가 발견한 곳이었습니다. 그보다, 소문이 사실입니까?”
나는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버지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처음엔 믿기 힘들었다. 마협문이 뒤로 그런 일을 꾸몄을 줄이야. 두 세력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본가가 큰 위기에 빠졌을 거다.”
“겉과 속이 다른 자였습니다. 흑사방과도 거래하는 척하면서 다른 생각을 품었나 보죠.”
“그래. 흑사방 또한 악명 높은 세력이었으니 하늘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었겠지. 산서 무림엔 홍복이나 마찬가지인 일이고.”
하늘이 아니라 나였지만, 이 사실은 평생 밝히지 않을 생각이었기에 아버지를 따라 미소만 지었다.
대신 나는 품속에서 비급 두 권을 꺼냈다.
“이건 잘 읽었습니다.”
한 권은 유진휘로 환생하고 나서 다시 한번 살펴보고 싶다는 핑계로 받아 갔던 운류검법의 비급이었다.
“표정을 보니 무슨 성과가 있었구나. 설마 팔성의 경지를 뛰어넘은 게냐?”
팔성은 과거의 유진휘가 도달했던 경지. 나는 이미 운류검법을 살펴보고 며칠 지나지 않아 이론으로 대성을 이루었다. 이번에 내공이 늘어나면서 완벽해졌고.
이 사실은 굳이 숨길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 작은 깨달음을 얻어 대성을 이뤘습니다.”
대성이란 말에 아버지가 깜짝 놀랐다.
“대성이라고? 그게 정말이냐?”
믿기 힘든 눈치였다. 약관의 나이에 가문의 무공을 완벽히 깨우치다니.
“예.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게···.”
두 권의 비급 중 나머지 한 권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이건 나로서도 신중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제 부족한 안목으로 운류검법의 미흡한 부분을 발견하고 조금 고쳐봤는데, 한번 살펴봐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가에는 가문의 규율이라는 게 있다. 그리고 나는 이 규율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했다. 어릴 때 가족을 잃고 뒷골목을 전전하며 자랐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소가주라고 해도 멋대로 가문의 무공을 변형시켜도 되는 건가 싶었는데···.
“당연히 살펴봐야지!”
딱히 상관없나 보군. 나는 비급에 빠져들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 초식의 이 부분이··· 오, 정말 그렇구나. 아니, 여기는!”
요란하게 비급을 읽어 내려가던 아버지가 어느 순간 침묵에 빠져들었다. 동시에 그의 주변 공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일류와 절정 사이엔 큰 벽이 존재한다.
삼류에서 일류까지는 피나는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지만, 일류에서 절정은 노력은 기본이고 오랜 경험이나 재능 혹은 깨달음이 요구됐다.
일류와 절정은 그만큼 간격이 컸다. 하지만 절정고수가 되고 나면 매 순간이 벽이다. 나아갈 때마다 일류에서 뛰어넘었던 벽이 계속 반복된다는 뜻이었다.
절정고수마다 서로 실력이 다른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수십, 수백 번 벽을 뛰어넘고 나서야 간신히 인극의 문을 두드려 볼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마협문주가 그 근처까지 도달했던 자라면, 아버지는 지금 벽이 몇 개 남지 않은 순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번 기회로 아마도 아버지 또한 몇 걸음 정도는 전진할 수 있겠지.
내가 속으로 아버지를 응원하는 사이, 어머니가 조용히 방안으로 들어섰다.
“요 몇 년간 무공에 관한 부분에 대해 꽤 답답해하고 계셨어.”
“그런가요?”
“응. 네 아버지의 저런 표정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어머니 말대로 눈을 감고 심상에 빠져든 아버지의 표정은 정말 밝았다.
“아들.”
“네.”
“고마워.”
“제가 뭘 한 게 있다고요.”
“그냥···.”
어머니가 뒤에서 조용히 나를 감싸 안았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그 따스함을, 나는 온전히 받아들였다.
*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해야 할 일을 상기했다. 첫 번째는 역시나 내 무공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내공은 꾸준함과 영약 말고는 방법이 없었기에 수련의 시간 중 반 이상을 일영청심공에 쏟아붓기로 했다.
일단 가까운 목표를 일 갑 자의 내공으로 정했다. 이마저도 영약의 도움 없이는 꽤 시간이 걸릴 테니, 언예령의 소식이 가장 기다려졌다.
체력 단련도 빼놓을 수 없었다. 환골탈태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인간의 몸은 신비해서 아직도 발전할 여지가 남아있었다.
남은 시간에는 검법과 사신무 그리고 과거에는 머리에만 담아두었던 무공들을 하나, 둘 익혀보기로 했다.
익숙함에 취하지 않으면서 새로움을 갈구해보자는 의미로.
첫 번째가 나라면 두 번째는 가문이다.
가문의 기둥인 아버지는 내가 건넨 비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운류검법의 보완을 염두에 뒀던 것인데, 생각지도 못한 경사였다.
아버지 다음은 역시 금검대인데.
금검대는 유씨세가의 검대이자 아버지를 따르는 검대이다. 소가주인 내가 함부로 움직일 수 있는 집단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금검대주 위사평은 아버지와 버금가는 실력의 절정고수.
그런 그와 그의 수하들을 소가주인 내가 나서서 가르치기엔 곤란한 부분이 존재했다.
그때 떠오른 게 최근에 나와 함께 체력을 단련하고, 틈틈이 연활팔식의 수련을 도움받고 있는 왕삼이었다.
“왕삼아.”
“...”
“왕삼아?”
“예. 예?”
내 옆에서 물이 가득 담긴 항아리를 양팔과 머리에 올려놓고 기마자세를 취하고 있던 왕삼이 눈을 치떴다.
서서 기절한다는 표현을 왕삼은 몸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라.”
“아니, 도련님. 반 시진··· 아직 안 지났어요?”
“...안 지났을걸.”
“지난 것 같은데···.”
물론 지났다. 하지만 체력은 한계에 봉착한 순간에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느냐 마느냐로 성장의 크기가 달라졌다.
그리고 착실하게 내 수련을 따라오고 있는 녀석은 몸이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신체뿐인가. 신경 쓰지 않아서 몰랐는데, 왕삼의 무재(武才)는 썩 뛰어났다.
깨닫지 못하고 있겠지만, 이제 웬만한 이류고수는 왕삼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실전경험이 쌓이고 연활팔식의 수준이 높아지면 일류도 금방 넘볼 정도였다.
“이제 딱 반 시진 지났구나.”
“드디어!”
왕삼은 죽다 살아났다는 얼굴로 천천히 항아리들을 내려놓고 자세를 풀었다. 사실 한 시진 가까이 지났다는 말은 아껴두기로 했다.
바닥에 대자로 뻗어있는 왕삼을 잠시 뒤로하고 나는 내방에 들렀다가 돌아왔다.
슬슬 녀석에게 줄 때가 된 것 같았다.
“받아라.”
“어? 이게 뭡니까?”
왕삼이 내 손에 들려있는 도(刀) 한 자루를 응시했다. 일전에 흑사방의 병기고에서 챙겨온 그 도였다.
“연활팔식은 검으로도 펼칠 수 있지만, 실은 도로 펼치는 게 더 효율이 높다.”
“그 말은···.”
왕삼은 감격에 겨워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도를 건네받았다.
“저 주시려고 사 오신 겁니까? 도련님이 직접?”
“사 온 건 아니고. 그냥 오다 주웠어.”
“이 비싸 보이는 걸 길바닥에서 주웠다고요?”
길바닥은 아니지만, 주웠다는 건 사실이니까.
“그래.”
믿지 않는 얼굴이었으나 뭐가 됐든 상관없다는 듯 왕삼은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무공도 가르쳐주시고 이제는 이런 무기까지. 앞으로 최선을 다해 도련님을 지키겠습니다!”
“지금은 나보다는 너를 지키는 게 좋을걸?”
“예? 그건 무슨 소리예요?”
왕삼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내 건물의 연무장으로 누군가가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
“소가주님. 실전처럼 하라고요?”
연무장의 중앙에서 금검대의 대원 하나가 괜찮겠냐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나이와 실력 양쪽으로 금검대의 막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젊은 사내였다.
막내라지만 금검대인만큼 만만한 실력은 아니었다.
왕삼도 그걸 알고 있는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도련님. 이거 맞아요?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나는 미소와 함께 녀석을 다독여주었다.
“너도 슬슬 실전경험이 필요한 시기야. 강해지고 싶다며?”
“강해지고 싶은 건 맞는데요.”
왕삼은 여전히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내가 환생하기 이전에는 금검대의 무인들에게 무공을 배우던 왕삼이었다.
게다가 실전을 가장한 비무였기에 목검이 아닌 진검을 사용하기로 했다. 아버지와 위사평에겐 미리 허락까지 받아둔 상태였다.
나는 왕삼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나를 믿고 연활팔식을 믿어라. 그동안 네가 해왔던 수련을 믿어라. 솔직히 말해서, 돈을 걸 수 있다면 난 너한테 전 재산을 걸 거다.”
마지막 부분은 자연스럽게 목청을 높였다. 왕삼은 용기를 얻었고 금검대의 막내 대원, 진남균은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의도한 부분이어서 나는 모른 척 심판을 볼 수 있는 자리로 이동했다.
“위험한 순간엔 내가 나서서 막을 거다. 그러니 둘 다 최선을 다해 싸우도록.”
그리 말하지 않았어도, 진남균은 이미 기세를 잔뜩 피워올리고 있었다. 일부러 자극한 게 제대로 먹혀든 것 같았다.
더불어 내가 거악부를 쓰러트렸다는 소식과 최근에 수련에 열중하면서 운류검법의 대성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아버지를 통해 가문 모두가 알게 됐다.
나를 향한 금검대의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와중에 내가 직접 단련시키고 있는 왕삼과 비무를 벌이게 됐으니.
진남균이 씩 웃으면서 왕삼을 향해 검을 뽑았다.
“그러고 보니 비무는 처음이네.”
반대로 왕삼은 울상이 된 얼굴로 도를 뽑았다.
“그러게요. 무사님, 살살 부탁드립니다.”
“실전처럼 하라고 하셨으니 그럴 순 없지.”
그 말에 왕삼이 나를 원망스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나로서는 혀를 찰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집중해!”
왕삼이 눈을 돌리는 그 짧은 순간에, 진남균이 지면을 박차고 쇄도해 들어간 것이다.
내 경고에 한 번. 허공을 가르고 찔러 들어오는 검을 보고 두 번. 연달아 깜짝 놀란 왕삼이 악, 하는 소리와 함께 도를 뻗었다.
챙!
위험천만한 순간이었지만 왕삼은 꽤 손쉽게 공격을 막아냈다.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을 보니 몸이 멋대로 반응한 것 같았다.
그 또한 노력의 결과이고, 그게 왕삼의 실력이다. 그리고 연활팔식은 수비에 강점을 둔 무공.
채채챙!
처음에는 여유롭게 공격을 이어가던 진남균이 어느새 이를 악물고 있었다. 실력을 전부 내보였음에도 왕삼의 수비를 뚫을 수가 없었다.
“하압!”
기합을 싣고 내공을 더했다. 그마저도 번번이 왕삼의 도에 가로막혔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비에만 집중하던 왕삼이 이따금 반격을 가했다. 굳건한 바위틈 사이로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일격은 진남균으로 하여금 당혹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당혹은 곧 빈틈이 되었고.
“엇!”
왕삼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챙!
마침내. 진남균의 검이 하늘로 튕겨 올랐다가, 연무장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사이 왕삼의 도가 진남균의 목 근처에서 멈춰 섰다.
“...졌습니다.”
진남균이 입술을 깨물고 패배를 인정하자 왕삼은 그제야 활짝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상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사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