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일상[3]
8장 일상[3]
“둘 다 수고했어.”
나는 상반된 표정을 짓고 있는 진남균과 왕삼을 바라봤다.
처음 경험하는 진검 비무에서 승리를 맛본 왕삼은 기쁘면서도 미안하다는 얼굴이었고 진남균은 놀람과 자책으로 얼굴이 엉클어져 있었다.
“일단은.”
나는 먼저 패배한 진남균을 불러세웠다.
“왜 진 것 같아?”
진남균은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마주 바라봤다. 억울함보다는 원인이 뭔지 알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네 성격이다.”
“성격··· 이요?”
“그래. 평소에 성격이 급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나?”
진남균은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조금 어린 나이인지라 감정이 앞서는 순간이 종종 있었다.
“정확히는 성격이 아니라, 급한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네 검법이야. 싸울 때는 항상 무공과 성격을 분리해야 한다.”
“하지만 대주님께서는 항상 검과 하나가 되라고 가르치셨는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검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건 맞아. 그걸 무슨 경지라고 부르지?”
“검신합일(劒身合一)입니다.”
“그래. ‘신’이다. ‘심’이 아니라. 무공과 성격을 분리하고 차분히 네 검을 들여다볼 수 있을 때, 그제야 비로소 검과 몸이 하나가 될 수 있다.”
“아!”
진남균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구겨졌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리 큰 깨달음은 아니었을 거다. 지금 당장은.
“이제 알았으니 돌아가서 수련해봐. 시간이 지날수록 무슨 말인지 체감하게 될 거야. 분리하는 게 어려운 것 같으면 일단 몸의 긴장을 줄이는 것부터 시작해. 배제하는 게 아니고, 줄이는 거다.”
“예. 참고하여 당장 오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가주님!”
왕삼에게 패배했던 기억은 이미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진남균은 검을 챙겨 금검대의 거처로 뛰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뒷모습에다 대고 소리쳤다.
“다음 사람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내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왕삼이 내 옆에서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다음 사람이라뇨? 제가 잘못 들은 거죠?”
“아냐. 제대로 들었어.”
“헐.”
왕삼이 무어라 항변하려고 하기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루에 네 명씩. 앞으로 열흘 간 금검대원들과 비무를 벌이게 될 거다.”
“네 명이요? 그것도 열흘씩이나?”
“다 너를 위한 일이야.”
물론 금검대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도련님. 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습니다.”
“괜찮아. 칼침 몇 번 맞아보면 몸이 알아서 움직이게 될 거다.”
“...예.”
내가 완강하게 버티자 왕삼이 결국 포기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지금 녀석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왕삼아.”
“네, 도련님.”
“내가 진남균에게 했던 말들을 잊지 말고 기억해라. 너도 똑같다. 좀전의 싸움에서 너는 너무 소심했고 네 도법도 그만큼 움츠러든 상태였어. 연활팔식이 수비가 아니라 공격에 의의를 둔 무공이었다면 이길 수 없었을 거다.”
왕삼이 진중해진 표정으로 좀전의 비무를 회상해보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아니 많이 겁먹고 있었어요. 금검대의 무사님들을 이길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으니까요.”
녀석의 말을 듣고 나는 씩 웃을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무엇이든 인정이 빨랐다. 그게 설령 자신의 단점이나 치부라고 해도.
인정이 빠르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볼 수 있다는 거다. 무인으로서 가장 필요한 부분 중 하나였다.
“겁먹어도 된다. 무림인이라면 항상 패배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니까.”
“도련님도 그런가요?”
나? 나는···.
“나는 질 자신이 없는데.”
“...네. 그러시겠죠.”
왕삼이 입술을 삐죽하게 내밀었고 나는 한차례 웃은 다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중요한 건 ‘각오’다.”
“각오요?”
“무림인에게 패배는 죽음이야. 지면 죽는 거다. 그게 실전이고. 그러니 겁을 먹어도 된다. 여기서 지면 죽는다, 그러니 절대 죽을 수 없다는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해. 그게 겁을 먹는 것부터 시작이라고 한다면, 상관없다. 더군다나 호위무사는 죽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호위 대상까지 위험해져. 각오의 무게가 평범한 무인과는 좀 남다를 거야.”
왕삼은 침까지 꿀꺽 삼켜가며 내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 역시도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왕삼아.”
“네.”
“너는 각오가 됐느냐?”
지금은 내가 묻고 있지만, 과거에는 천영검대주의 자리를 놓고 검신 영감이 내게 물어봤던 질문이다.
그리고 왕삼은.
“예. 저는 각오가 됐습니다.”
그때의 나와 똑같은 답을 내놓았다.
*
첫날은 무탈했다.
예상대로 왕삼은 남은 세 번의 비무에서도 승리를 따냈다. 총원이 팔십 명인 금검대에서 가장 약한 네 명을 상대한 것이긴 해도 가문 사람들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둘째 날. 셋째 날도 마찬가지. 첫날과 달리 몸 곳곳이 베이고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했지만, 꾸역꾸역 이겨냈다.
그 이후부터는 상대로 나서는 대원들의 수준이 높아지고 점차 쌓여가는 부상의 여파 덕에 이기는 숫자보다 지는 숫자가 많아졌다.
그리고 열흘째가 되는 날에는 연달아 네 번을 패배했다.
“사, 상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삼이 힘겹게 입을 떼면서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 사십 번째 비무상대로 나섰던 대원은 경이롭다는 얼굴로 왕삼을 쳐다보고 있었다.
차마 눈 뜨고는 봐줄 수 없는 만신창이의 몰골. 저런 몰골로도 왕삼은 끈질기게 버티고 늘어졌다. 자칫하면 질 수도 있겠다는 순간이 더러 있었다.
“정말 강해졌구나. 금검대 밑에서 기초 무공을 배우며 기뻐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왕삼의 대답은 없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이미 혼절한 뒤였다. 대신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반대로 대원은 이겼음에도 웃지 못했다. 왕삼의 성장과 결의, 그에 걸맞은 실력에 크게 자극받은 모양새였다.
딱, 내가 원하던 표정이었다.
“녀석의 몸 상태가 온전했다면 이기지 못했을 것 같다는 얼굴이네.”
내가 말하자 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소가주님. 녀석의 수련을 위한 비무라고 하셨지만, 오히려 저희가 많이 배웠습니다.”
대원이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그의 뒤편 너머를 바라봤다.
그동안 비무상대가 되어주었던 금검대원들이 연무장에 모여 지독한 수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상의까지 탈의할 만큼 열기가 대단했다.
금검대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왕삼을 통해 심어진 경각심은 꽤 오랫동안 이어질 것 같았다. 비무를 하지 않은 나머지 사십 명도 조만간 자연스레 수련 열풍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유씨세가의 정예인 만큼 그들은 한층 더 발전할 것이고 보다 날카로운 검이 되어 가문을 지탱할 것이다. 가문을 노리는 정체 모를 배후와 맞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수준.
내가 있으니,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왕삼을 앞세운 열흘 간의 비무는 그렇게 일단락됐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
다음 날 아침에 금검대주 위사평이 찾아왔다. 의미심장한 표정에서 호기심과 호승심이 동시에 느껴졌다.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내 물음에 위사평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가주 덕분에 수하들 사이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네. 집단생활이다 보니 그 안에 숨어있는 은근한 태만과 나태를 잡아낼 수 없을 때가 많았는데, 그게 싹 사라졌더군.”
“그렇습니까? 제 호위무사의 수련에 도움이 되고자 벌인 일인데, 금검대에도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아닌 척하고 말했지만, 위사평은 어느 정도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가주의 조언 덕에 실력이 눈에 띄게 달라진 놈들도 많고. 특히, 막내 녀석은 말 그대로 일취월장하고 있지.”
막내라면 처음으로 왕삼과 비무를 벌인 진남균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놈은 왕삼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수하들이 궁금해하더군. 나도 마찬가지고.”
“뭘 말입니까?”
“왕삼이란 아이를 단기간에 놀라운 수준까지 성장시키고, 약관의 나이에 가문의 무공을 대성했다는 소가주의 실력 말일세.”
여기까진 의도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내가 벌인 일 덕분에 마주한 상황이니, 어쩔 수 있나.
“대주님이 직접 나서시게요?”
“부족하겠지만 최선을 다해봐야지. 가주님께서도 이미 허락하셨네.”
분위기를 보니 아버지도 궁금해하고 계셨던 것 같다.
나는 결국 위사평의 제안을 수락했고 약속한 정오가 됐을 때, 연무장으로 나갔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방에서 시선이 쏘아졌다.
금검대원 전원이 연무장 주변에 몰려있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무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서 기대와 걱정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곳곳에 가문의 중진들이 자리를 잡았고 하인들과 시비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웅성거렸다. 마지막으로 왕삼이 죽다 살아난 몰골로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이것도 다 도련님이 계획하신 일이에요?”
“아니. 이건 아니야.”
내가 피식 웃자, 왕삼도 따라 웃었다.
“왜 웃어?”
“앗. 마협문과 흑사방 일도 척척 처리하셨던 도련님이 당황하시는 걸 보니까 저도 모르게.”
그래. 녀석의 말대로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가문의 모두가 몰려와 있을 줄이야.
“금검대를 이끄시는 분이에요.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합니다.”
“당연히 조심해야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왕삼이 덧붙였다.
“아뇨. 도련님 말고요. 금검대주님이요.”
“하하. 알겠다.”
나는 왕삼의 걱정 아닌 걱정을 뒤로하고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위사평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는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지위를 버리고 실전처럼 상대하겠네.”
“예.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분위기상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적당히 조절할 생각이었다.
스르릉! 내가 먼저 검을 뽑았고, 위사평이 뒤따르듯 발검했다. 동시에 시끌벅적하던 주변이 고요해졌다. 크게 상승한 내 오감에도 이 순간만큼은 침 넘어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디까지 조절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위사평이 씩 웃었다.
“양보해주시니 내가 먼저 들어가겠네.”
그의 시선엔 내가 선공을 양보하겠다는 태도를 고수한 것처럼 여겨졌나 보다.
나는 그저 침묵했고 위사평은 한차례 기합과 함께 거리를 좁혔다.
촤-악!
기선제압을 위해서였는지 초장부터 맹렬한 기세였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살벌했다.
나는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검을 응시하다가 부드럽게 검을 그었다. 부드럽지만, 빛처럼 빨랐다.
핑!
위사평이 급하게 몸을 틀어 검을 피했다.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내가 노렸던 위치는 그가 펼치는 검법의 정확한 빈틈이었다.
금검대의 주력 무공은 쾌를 바탕으로 하는 찌르기 위주에 효율을 중시하는 검법. 빠르고 직선적이나, 그보다 더 빠른 상대로는 냉정하게 말해서 무용지물이었다.
채채챙!
운류검법을 극성으로 펼치면서 나는 위사평의 검을 부드럽게 받아넘기는 동시에 집요하게 빈틈만을 노렸다.
“와아-!”
고요했던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가 앉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는 것도 보였다.
나는 그만큼 여유로웠지만, 위사평은 아니었다.
공격이 번번이 빗겨나가자 어느 순간부터 위사평의 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쾌 안에 변(變)이 담기는 순간이었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그는 이미 금검대의 검법이 가진 단점을 깨닫고 있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해답을 깨우친 상태였다. 다만 이게 맞는 길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을 뿐.
텅!
해서 나는 그의 검을 쳐내고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위사평만 들을 수 있도록 나직이 속삭였다.
“그대로 나아가시면 됩니다.”
“...그렇군.”
위사평이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운류검법이 아니라, 위사평이 걸어가야 하는 그 길 끝에서 마주하게 될 검법의 자세였다.
그는 내 심중을 알아차리고 눈을 빛냈다. 작은 몸짓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그의 시선이, 내 검로를 뒤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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