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인 환생했다-25화 (25/150)

8장 일상[4] -1권 끝-

8장 일상[4]

무승부.

승자가 없는 비무였음에도 유씨세가의 사람들은 환호했다. 약관의 나이인 소가주가, 가주와 함께 가문의 최고수라 평가받고 있는 금검대주와 비무를 벌여 무승부라는 결과를 끌어냈다.

불과 석 달 전에는 폐인처럼 삶을 비관하며 살아가던 그였다. 후계자가 그 모양이었으니 가문 전체가 불안감에 휩싸였다.

지금은 정반대였다.

금검대의 젊은 무인들은 소가주에게 열광했고 가문의 어른들은 후계자가 과거의 기재를 되찾았다며 기뻐했다.

가주인 유운호로서도 이보다 더 기쁜 날이 없었다.

“어떻던가?”

유운호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삼키며 물었다. 위사평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처음 봤습니다.”

“처음?”

“그 나이대에 그런 무위를 가진 후기지수는, 저로서는 처음입니다.”

물론 넓디넓은 강호엔 내로라하는 후기지수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당장 천하오주의 후계자들만 해도 사룡일화(四龍一花)라 불리며 무림인들에게 칭송받고 있었다.

하지만 천하가 아닌 산서 기준이라면 자신이 상대했던 유진휘는 제일의 후기지수였다. 게다가.

‘무승부라고?’

소가주는 자신을 상대로 본 실력을 내보이지도 않았다. 도리어 가르침까지 받았으나, 왠지 숨기고 싶어 하는 눈치여서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무림인은 다들 실력의 삼 할을 숨기고 산다.’

모든 걸 내보이고 살면 불리한 점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닌 자도 있겠지만, 대부분 그랬다. 문제는 삼 할이 아니라 그 이상인 것 같다는 게 문제 아닌 문제였다.

‘이유가 있겠지.’

자신이 관여할 문제는 아니었기에 위사평은 함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가. 내 아들이 벌써 절정고수라니.”

그 사이, 유운호는 위사평의 가감 없는 찬사를 듣고 눈을 빛냈다.

“이러다 진휘가 덜컥 인극고수라도 되면 어찌해야 하는가?”

“가주님. 인극의 경지는 절정과는 차원이 다른···.”

“하하, 그저 기뻐서 한번 내뱉어 본 헛소리일세. 그럴 리가 있겠나.”

그래. 그럴 리가 없지. 그럴 리가···.

유운호를 따라 함께 웃던 위사평은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설마?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위사평과 비무를 벌인지도 벌써 한 달. 어느덧 아침에 눈을 뜨면 단풍 가득한 나무들을 바라보게 되는 계절이었다.

예상과 달리 평화로운 나날이었고 오늘도 어김없이 일영청심공으로 하루를 시작하려 할 때였다.

“도련님-!”

내 건물의 담 너머에서부터 날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의 목소리였으니 왕삼은 아니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 시비 한 명이 내 앞으로 뛰어왔다.

최근에 왕삼과 부쩍 친하게 지내고 있는 하월이었다. 듣기로는 금검대원들과 비무를 치르고 나서 앓아누웠던 왕삼을 틈틈이 간병해줬다는데.

“왕삼인 새벽에 수련하러 나갔다.”

역시나 녀석의 이름을 듣자마자 얼굴이 살짝 상기되는 게 보였다. 한데 오늘은 내게 용건이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분께서 이걸 도련님께 전해달라고 하셔서요.”

하월이가 내민 건 서찰이었다. 한번 뜯으면 표시가 생기도록 밀봉되어있었는데 가장자리에 적혀있는 백(白)이란 글자가 눈에 띄었다.

공손량이군.

배후에 관해 뭔가를 알아냈을 수도 있고, 기다리던 영약에 관한 소식일 수도 있다. 혹은 둘 다일 수도.

“고맙다.”

“아니에요, 도련님!”

하월이가 깊게 허리를 숙여 보이더니 총총 물러났다. 나는 서찰을 뜯어보려다 말고 그녀에게 살짝 귀띔을 해주었다.

“반 각 정도면 돌아올 것 같은데. 뒷산에 갔으니 저쪽에서 기다리면···.”

“가, 감사합니다!”

그녀는 내 말을 제대로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만큼 당황해했다. 이어 붉어진 얼굴을 감추더니, 후다닥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묘한 기류를 보아 더는 순수한 영혼이라고 놀릴 수 없을 것 같다. 요즘 외모에 신경을 쓴다고 난리를 피우던 왕삼의 얼굴이 떠올라 나는 피식 웃으면서 서찰을 마저 뜯었다.

핵심만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음에도 내용은 꽤 길었다.

‘여러 정보단체에 의뢰를 맡겼지만, 마협문에서 가져오신 서찰의 추적은 실패했습니다. 해서 방향을 틀어 이십만 냥이라는 거금을 거리낌 없이 내놓을 만한 세력들을 주시하던 중에···.’

만금상단(萬金商團)?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아니, 들을 수밖에 없는 이름이었다. 성화상단이 산서 삼대상단의 말석이라면 만금상단은 상석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곳이다.

‘태산파의 속가제자인 만금상단의 둘째 공자가 복귀하고 나서부터 성화상단의 사업에 번번이 훼방을 놓고 있습니다. 좀 더 알아보니 과거 거악부의 출현이 만금상단과 연관된 것 같다는 정보까지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거악부란 말에 나는 눈을 빛냈다. 백대악인이있던 놈을 누가 매수했나 했더니.

‘더불어 최근 만금상단 쪽에 엄청난 고수 한 명이 빈객으로 영입됐습니다. 사파 쪽 인물인 것 같은데 정확한 정체는 아직···.’

서찰의 내용을 정리해 머리에 각인시킨 뒤 나는 빠르게 외출할 준비를 마쳤다. 일단 성화상단으로 가서 종승재나 종화설을 만나볼 생각이다.

꽤 곤란한 상황인 듯한데. 왜 우리 가문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해서 출발 전에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 복장을 보니··· 어디 다녀올 때가 있는 것 같구나.”

나는 덤덤한 얼굴로 아버지를 슬쩍 떠보았다.

“성화상단에 잠시 다녀오려고 합니다.”

“...그렇구나.”

아버지 역시 덤덤한 표정이었으나, 나는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성화상단에 관해서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상태라는 걸.

“혹시···.”

“이번 일은 지켜봐달라고만 하더라.”

“이유가 뭔지 여쭤봐도 됩니까?”

“음···.”

대답 전에, 아버지는 내가 어떻게 알아냈나 살펴보는 눈치였다. 두 달 가까이 가문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니까. 잠깐의 침묵 끝에 대답이 이어졌다.

“본가가 흑사방과의 일을 겪은 후라 도움을 청하기가 꺼려졌다고 하더구나. 무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도 하고. 그래도 주된 이유는 결국 태산파 때문이겠지.”

태산파(泰山派).

과거에는 정파오주였고, 현재에는 천하오주라 불리고 있는 오대세력 중 하나.

만금상단의 둘째이니 속가제자로 입문하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꽤 많은 돈이 들어갔겠지만.

“이해했습니다.”

속가제자라도 어쨌든 태산파의 이름을 등에 업었다. 자칫 문제가 생겨 태산파가 나서기라도 하면 우리 가문에 피해가 갈지도 모른다는 걸 염두에 두고 도움을 거절한듯싶었다.

그나저나 태산파의 장문인이 누구였더라. 과거의 기억을 더듬고 있는 와중이었다.

“화설이가 신경 쓰이는 것이냐?”

아버지의 시선으론 그렇게 보이려나?

“그냥 잠깐 만나보고 나서 며칠 바람이나 쐬다 오겠습니다.”

“알겠다. 다녀오거라.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항상 신중해야 한다.”

차라리 그렇게 여기시는 편이 낫겠다 싶어 아버지의 시선대로 행동했다. 며칠간 부재할 상황에 대한 핑계로도 적절했고.

*

“그게 무슨 소리죠?”

종화설이 난감해했다. 하지만 앞에 서 있는 중년인 또한 그녀만큼이나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저로서는 거절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실력 있는 무림인들을 대동하고 와서는 협박하는데 저 같은 놈이 어떻게 버틸 수가 있겠습니까.”

중년인의 호소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종화설도 그걸 당연히 알아차렸다. 그랬기에 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중년인의 이름은 석웅. 노주에서 백리표국이라는 작은 표국을 운영하던 표국주였다.

과거엔 나름 먹고살 만했는데 노주 지역에 흑사방이 나타나면서 쫄딱 망해버렸다. 사파가 활개를 치고 다니는 지역의 표국에게 물건을 맡길 곳이 있겠는가.

그러다 최근 흑사방이 사라지고 나서부터 노주의 상권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백리표국에게도 기회였다. 하지만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늙어버린 자신은 표국을 더는 이끌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차에 성화상단이 노주로 사업을 확장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백리표국을 좋은 가격에 인계하기로 했다.

종화설로서는 오늘 계약서를 작성하고 대금만 치르면 마무리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석웅이 생각을 바꾸었다. 정확히는 인계할 대상을 다른 곳으로 낙점했다.

“만금상단이라고 하셨죠?”

“예. 정확히는 만금상단의 둘째 공자이신···.”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표국의 문이 벌컥, 거칠게 열렸다. 종화설과 석웅이 시선을 돌리자 젊은 사내 하나가 유유자적 걸어들어오는 게 보였다.

사내는 두 사람을 발견하곤 미소를 지었다.

“아니, 석 국주. 말을 좀 섭섭하게 하시네. 내가 언제 협박을 했습니까, 협박을?”

분명 웃는 얼굴이었으나, 석웅에게는 저승사자의 그것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아, 아니. 반 공자께서는 언제부터···.”

석웅은 놀란 나머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귀티 나는 차림새의 사내 뒤로 검을 찬 무인들이 우르르 따라 들어왔다. 총 일곱 명의 무인들은 만금상단을 상징하는 모란(牡丹)이 수놓아진 무복을 입고 있었다.

무인들을 세워 놓은 채, 사내가 석웅과 종화설에게로 다가갔다.

“저희가 더 좋은 제안을 내놓았고, 석 국주는 백리표국의 가치를 알아주는 그 제안이 마음에 들어서 수락을 하신 거잖아요. 아닙니까?”

사내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석웅은 그 미소를 무시할 수 없었다.

“마, 맞습니다. 그렇죠. 두 상단이 제시한 금액 차이가 워낙 크다 보니까, 하하.”

석웅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내가 더 크게 웃었다.

“솔직하니 보기 좋잖아요. 안 그래?”

말을 하던 사내의 시선이 석웅을 지나쳐 종화설에게로 향했다. 종화설은 입술을 깨물면서, 만금상단의 둘째 공자 반세곤을 마주 바라봤다. 각자 산서 삼대상단의 후계자들인지라 안면은 있는 정도였다.

“만금상단은 상도덕도 없나 봐?”

“밥 벌어 먹고살려면 상도덕 챙길 여유가 어딨어? 매 순간이 치열한 경쟁인데.”

애초부터 막무가내였던 자다. 말 섞어봤자 피곤해질 테니 종화설은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석 국주님. 성화상단에서도 더 나은 제안을 준비해오겠습니다. 결정은 조금 더 보류해주심이···.”

종화설이 석웅을 회유하기 위한 설득을 시작하려 할 때였다.

쾅!

반세곤이 끌고 왔던 무인 중 하나가 대뜸 담벼락을 검집으로 후려쳤다. 무너지진 않았지만, 쩌적 금이 갈라질 위력이었다.

“살짝 건드렸는데 이러네.”

무인은 짐짓 혼잣말이라는 듯 중얼거렸고, 석웅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옆에서 반세곤이 쐐기를 박았다.

“석 국주. 늦은 나이에 얻은 여식이 그렇게 이쁘다면서요?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던데.”

결국, 참지 못한 종화설이 검을 뽑았다. 검날이 목에 겨누어졌음에도 반세곤은 여유로웠다.

“그걸 휘두르면 다음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자각은 하고 있지?”

그의 말대로였다.

여식을 운운하는 협박에 분노가 치밀어 검을 뽑긴 했지만, 이걸 휘두르는 순간 성화상단은 만금상단과 정면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다. 애초에 만금상단의 노림수도 그거였을 테고.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반세곤의 수하들이 낄낄거리며 기세를 피워올렸다.

종화설 쪽에는 호위무사 한 명이 전부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침묵만이 감돌고 있을 때였다.

“흑사방이 사라지니까 다른 벌레 새끼가 나타났네. 안 그러냐?”

“저 새끼보단 흑사방이 나은 것 같은데요.”

신형 두 개가 조소와 함께 담을 뛰어넘어 표국 안으로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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