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협력[3]
1장 협력[3]
백의문으로 돌아온 나는 백리표국에서 있었던 일을 공손량에게 전해주었다. 만금상단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땐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미 놈들의 계획이 상당 부분 진행된 것 같습니다.”
“연합회인가 뭔가가 이미 결성됐다는 말이야?”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할 정도까진 아니어도 산서 유명 상단주들의 만남이 자주 성사되고 있습니다.”
만금상단에 관해 조사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이라고 했다.
성화상단을 제외한 대부분 상단이 만금상단의 밑으로 들어갔다는 건, 성화상단 혼자서 모든 상단의 견제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그건 성화상단을 돕기로 한 나와 백의문도 마찬가지.
“놈들이 이미 연합했다면, 놈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산서의 문파나 무가들도 자연스럽게 그들과 뜻을 함께하게 될 겁니다.”
모든 무가나 문파는 아닐 것이다. 마협문처럼 상단과 관계를 맺지 않고 자력으로 성장하는 문파나 가문들도 많았다.
반대로 그렇지 않은 자들은 만금상단과 연합회 소속 상단들을 도울 것이다.
“문주님과 저희만으로 그들을 상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거기다 만금상단은 둘째 공자의 죽음을 빌미로 태산파의 힘을 빌려올 수도 있고요.”
공손량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희’라고 해봤자 이자청과 백의검대원 열다섯이 전부라는 얼굴이었다.
그들이 최근 일류의 경지에 도달할 만큼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곤 하지만 산서 무림을 상대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다. 아니, 바위보다도 더 거대하겠지.
“괜찮아.”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했다. 공손량이 입을 다물고 나를 응시했다. 내 말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내가 환생한 이후 만났던 인물 중 가장 현명한 인물이었다.
“문주님께선 이미 각오하셨군요.”
각오했지. 유진휘로서 살아가기로 한 날부터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만금상단. 태산파. 나아가 산서 무림.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공손량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저도 각오하고 있겠습니다.”
“괜찮겠어?”
“백의문이니까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의문. 백면공자의 의지를 따르겠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니, 내가 어떤 길을 가든 상관하지 않고 뒤따르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대신에, 외람되지만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하나가 아니라 뭐든 물어봐. 공총관이라면 다 대답해주지.”
내가 허락하자 공손량이 눈을 빛냈다. 예전부터 궁금해하고 있었던 부분인 듯싶었다.
“문주님의 진정한 무위는 어느 정도입니까?”
“무위?”
“예. 마협문주씩이나 되는 고수를 손쉽게 쓰러트릴 만한 실력인 건 알고 있지만··· 그 끝을 알고 싶습니다.”
내 무위라. 잠깐 생각에 잠겼던 내가 말했다.
“무인의 경지에 대해 알고 있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이류. 일류. 절정. 그런 걸 말하는 것 아닙니까?”
“절정 다음은?”
“그다음은 인극의 경지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역을 넘어 천하에서 명성을 떨치는 고수들이 그 경지라지요? 물론 같은 경지 내에서도 서로 실력이 다르다는 것까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있습니까?”
공손량이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떠올려봐도 그다음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다는 표정으로.
그러던 그가 점점 입을 벌렸다.
“서, 설마!”
공손량이 더는 벌릴 수 없을 정도로 입을 찢으며 숨을 들이켰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이라는 말은, 그러니까 지금은 문주님께서 인극의 경지라는 말씀이신···. 그리고 곧 그다음의 경지까지 도달하실 거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겁니까?”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공손량이 이마를 짚었다. 적잖이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를 위해 필요한 게 영약, 그러니까 내공이고요.”
“그래.”
“...”
공손량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충격을 떨쳐내며 평온함을 되찾았다.
“지금까지 해왔던 걱정들은 전부 쓸모없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했듯이 당장은 내공이 부족해. 같은 인극고수와 비교하면 그 차이가 좀 더 두드러지고.”
물론 내공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중단전의 개방은 원래라면 최소 일갑자의 내공이 필요했다. 최소가 일갑자고, 보편적으로는 그 이상이다. 나는 그걸 전생의 깨달음으로 대처했을 뿐이다.
공손량이 내 의중을 알아차리고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언의원이 조만간 찾아뵙겠다고 합니다.”
*
언예령의 방문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백의문에 계속 머물기로 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기에 가문에는 수련을 핑계로 복귀가 늦어질 거라고 전해두었다.
그때까진 약속대로 이자청을 단련시켜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방식은.
퍽!
“컥!”
내가 휘두른 목검에 옆구리를 내어준 이자청이 헛구역질을 쏟아내며 쓰러졌다. 이미 한 시진 정도 이어진 대련이었다. 녀석 말대로 대련을 가장한 구타일 수도 있고.
비틀거리며 일어난 이자청이 나를 노려봤다. 복날의 개처럼 두들겨 맞았어도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저 강해지고 있는 거 맞죠?”
“물론. 첫날보다 훨씬 나아졌다.”
믿기 힘들다는 눈치였지만, 사실이었다. 일류에서 벽을 넘어 절정의 경지에 다다르려면 검신합일을 깨우쳐야 했다.
단순히 몸과 검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걸 자각하는 수준이 아닌, 검이 몸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무림인들이 검신합일을 갈망하는 이유도 절정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구타에 가까운 대련은 그걸 간접적으로 깨우쳐주는 수련이었다. 내가 집중적으로 때리는 곳은 진검이었다면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위치들뿐이었다.
목검을 들었다지만 기세를 실었고 내공을 더했다. 이자청 입장에서는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낄 만큼, 그러나 절대 죽지 않게끔 조절했다.
그렇게 첫날, 이자청이 수백 번을 죽었다면 칠주야가 지난 오늘은 수십 번밖에 죽지 않았다. 정신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여 검으로 공격을 막아내는 순간이 종종 생겼으니까.
누구나 이자청처럼 두들겨 맞기만 한다고 벽을 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녀석은 그 근처까지 도달해 있었고 벽을 넘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쉭! 텅!
기습적으로 내지른 목검을 이자청이 이번엔 가까스로 튕겨냈다.
“오늘은 여기까지.”
“네.”
끝을 알리자 이자청은 쓰러지듯 바닥에 드러누웠다. 거의 다 왔다. 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린 뒤 녀석을 놔두고 연무장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이자청과 대련하는 시간 외에는 운기에만 집중하고 있던 터라 나는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그러려는데, 공손량이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문주님!”
언예령이 방문했나 싶어 반가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공손량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무슨 일이야?”
내가 묻자 공손량이 가까이 다가와서 속삭이듯 대답했다.
“어떤 인물이 문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근데 그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심상치 않다니?”
“일전에 말씀드렸던 만금상단의 빈객. 기억하십니까?”
기억한다. 정체 모를 엄청난 고수라며 공손량이 예의주시하던 자였다. 그자가 대놓고 나를 찾아왔다고?
“혼자?”
“혼자였습니다. 그리고 문주님처럼 가면으로 정체를 가렸습니다. 목소리만 들으면 나이가 꽤 있는 자인 것 같은데 몸집은 젊은 무인처럼 탄탄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깨달았다. 확실히 심상치 않은 자였다. 설마 환골탈태의 현상을 경험한 건가. 그런 인물이 지역 상단의 빈객을?
“백의검대원 모두 내원으로 들여보내. 그 뒤엔 아무도 나오게 하지 말고.”
“예.”
나는 공손량을 뒤로하고 빠르게 정문으로 몸을 날렸다.
*
정문을 나서자 공손량의 말대로 흑색 가면을 쓴 인물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유롭게 주변 경치를 구경하던 그는 나를 발견하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자네가 백면공자인가?”
목소리에서 연륜이 느껴졌다. 가면 뒤편의 눈빛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왠지 모르겠지만 낯선 느낌이 아니었다.
“만금상단에서 보냈나?”
기세를 살피는 동시에 물었는데, 노인 또한 내 기세를 읽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렇다네.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나저나, 나이는 어려 보이는데 기세가 만만찮군.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더니 노부가 속은 게로구나.”
노인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이내 킬킬거렸다. 나도 마주 웃었다. 노인의 심정이 나와 비슷했던 탓이다. 예상대로 그는 인극의 경지에 도달한 자였다. 정확히는 인극의 초입.
“당신 같은 자가 왜 빈객 따위를?”
“그 부분은 나름의 사정이 있으니 이해하시게. 요양하며 지내기에도 괜찮은 곳이고. 그러는 자네는 왜 이런 시골구석에 처박혀 대장 놀이에 시간을 썩히고 있나?”
“이쪽도 그럴 사정이 있어서.”
“그렇군. 그럼 속사정은 천천히 들어보기로 하고.”
노인이 턱짓으로 가시거리에 들어오는 숲속을 가리켰다. 자리를 바꾸자는 뜻이었다.
“서로 뒤가 구려서 가면을 쓰고 있는 처지이니, 그래야겠지?”
내가 동의하자 노인이 훌쩍 몸을 날렸다. 가볍게 지면을 박찼을 뿐인데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수준 높은 경공술이었고 이번에도 익숙함이 느껴졌다.
과거에 대면한 적이 있던 인물인가? 나는 노인을 뒤따르면서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렴풋이 몇 명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그들은 만금상단의 밑으로 들어갈 인물들이 아니었다.
머리를 굴리는 사이 숲속에 도착했다. 노인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고 나도 그를 따라 거리를 벌리고 멈추어 섰다.
“둘 중 한 명은 이곳이 묫자리가 되겠구나.”
노인은 순순히 인정한다는 듯 말했다. 서로의 실력이 엇비슷하다고.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게는 이미 결과가 뻔히 보이는 싸움이어서, 결과보다는 여전히 노인의 정체에 관심이 갔다.
“그 가면 말이야. 어차피 벗겨질 텐데, 미리 벗어보는 건 어때?”
내가 묻자 노인이 씩 웃었다.
“노부의 정체가 궁금하다면 직접 벗겨보게나.”
“그러지.”
나는 대답과 동시에 은밀히 끌어올려 두었던 내공을 하체에 집중했다.
파-앙!
전력을 다한 속도로 짓쳐들어가면서, 사신무의 묘리가 담겨 있는 금나수로 노인의 가면을 노렸다. 확신하고 내지른 한 수였다.
일격에 노인을 죽일 순 없어도, 가면 정도는 벗길 자신이 있었다.
전력으로 공격해올 거란 예상을 못 했는지 움찔 놀란 노인이 검을 뽑았다.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쭉 뻗어가는 내 팔을 베어버릴 심산인 것 같았다.
반응이 좀 더 빨랐다면 노인의 의도대로 흘러갔을 것이다.
촤-악!
하지만 노인을 스쳐 지나간 내 손에는 흑색 가면이 쥐어져 있었다. 나는 가면을 수풀 쪽으로 내던지면서 노인을 바라봤다.
그리곤 깜짝 놀랐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눈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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