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기연[1]
2장 기연[1]
과거 정마대전 당시, 정천맹의 적은 마교와 마인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파의 고수들이 마교에 의탁하기 시작했다.
전쟁 시기에도 매년 악명 높은 백대악인을 선정, 수배서까지 만들어 사파척결을 주도했으니 예견된 일이었다.
마교 입장에서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고수들을 거절한 이유는 없었다.
덕분에 나와 천영검대에게 죽어 나간 사파의 고수들이 꽤 많았다.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아들일 때도 있었다. 마교의 기밀을 캐낼 때라거나.
천마를 추종하고 뼛속까지 교리가 박혀있는 마인들은 어떤 고문을 가해도 입을 열지 않는 자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그때 잡아들인 포로들은 대부분 지하 감옥에 갇혀 여러 정보를 누설했다. 쓰임새가 다한 자들은, 정해진 결말대로 처리됐다.
그래. 그런 줄 알았다.
“지하 감옥에서 어떻게 빠져나왔지?”
나는 흑색 가면이 벗겨진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만검노수(瞞劍魯叟) 홍야(洪夜).
기억하고 있다. 과거에도 그는 인극고수였고, 천영검대주였던 내가 직접 잡아들였다. 이후의 행방은 관심이 없었기에 감옥 안에서 죽었을 거라 여겼다.
한데 저렇게 멀쩡히 살아있을 줄이야. 의아해하고 있는데, 홍야가 이를 빠득 갈았다. 정체가 밝혀져서 분노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 더 오래되고 깊은, 속내에 품어두었던 원한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천영검대.”
홍야의 입에서 그 이름이 새어 나왔다. 예상했던 부분이다. 사신무는 천영검대 모두가 익히고 있는 무공이었다.
그의 가면을 벗길 때 펼쳤던 금나수가 사신무였으니 당연히 알아봤겠지.
“여기서 천영검대원이었던 놈을 만나게 될 줄이야. 묘한 인연이로구나.”
홍야의 두 눈에 살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다시 물었다.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나?”
무공을 폐하지 않은 것까진 이해할 수 있다. 무인에게 무공은 목숨보다 귀중했다.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쥐여주는 게 정보를 캐내기에 더 수월했을 것이다.
물론 거짓된 희망이다. 지하 감옥에 갇힌 자에게 다시 살아갈 기회 따윈 없었다. 하지만 홍야는 살아남았고, 기회를 얻었다.
수감자의 탈출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천맹의 내부가 혼란스러운 지경인가? 새로운 맹주까지 선출된 마당에 그럴 리가.
홍야가 답을 내놓지 않으니 별의별 추측들이 피어올랐다. 결국,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대답할 마음이 생기도록 만들어주는 수밖에.
그러자 그의 살기가 더욱 거세졌다.
“좋구나. 이번 일을 단순한 유흥거리라 여겼는데, 천영검대원이었던 놈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만금상단이 영입한 정체 모를 사파의 고수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고수가 만검노수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팟!
홍야가 단번에 짓쳐들어왔다. 정체를 알고 나자 확실히 눈에 익은 보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표홀한 보법을 바탕으로 하는 현란한 환검 또한.
촤르륵!
전후좌우 사방을 점하며 날아드는 수십 가닥의 검기가 눈을 어지럽혔다. 이 검식을 처음 마주하게 되면 저 현란함에 속아 말려들 수밖에 없다.
피하려고 하면 발이 꼬일 것이고 일일이 쳐내려고 하면 숫자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방법은 하나뿐이었고, 과거에도 똑같이 대처했었다.
천일백야검법의 제삼초식 천섬멸지(天暹滅地).
잔뜩 끌어올린 내공이 검으로 흘러 들어가자 검기가 피어올랐다. 하나였던 검기는 둘로 나뉘고, 다시 둘에서 넷으로, 넷은 여덟으로 계속 늘어났다. 그렇게 수십 개로 불어난 검기가 내 주변을 맴돌았다.
홍야가 쏟아낸 검기와 엇비슷한 숫자였지만, 그의 검기는 눈속임을 위한 것이고 내 검기는 하나하나가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콰콰쾅!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린 검기가 홍야의 검식을 일거에 깨부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당황하는 그와 그의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쾅! 쾅!
사방에서 굉음이 터지고 흙먼지가 일었다. 나는 그 혼란 속에서도 홍야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는 당황하면서도 소나기의 촘촘한 틈새 사이를 파고들며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완전하진 못해서 옷자락이 찢어지고 몸 곳곳이 갈라졌다.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피어오른 먼지 사이로 파고들었다.
터-엉!
가슴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는데, 그가 반사적으로 내 검을 쳐냈다. 다만 반응이 늦어서 위력을 제대로 흘리지 못했고 내 검은 그의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촤악!
“큭!”
어깨의 상처를 부여잡은 홍야가 발작하듯 반격했다. 내가 덤덤히 피해내자, 그는 그대로 빠르게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여러 상처에서 터져 나온 핏물이 그가 물러난 경로대로 흘러내리며 바닥을 적셨다.
나는 그 핏물 위로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내공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싸움을 길게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그때, 홍야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목소리 또한 크게 떨리고 있었다.
“천영검대···주?”
자신이 내뱉은 말임에도 믿기 힘들다는 듯 그가 말을 이었다.
“네놈이 어떻게! 그자는 죽었다!”
나는 계속 다가가며 피식 웃어 보였다.
“너도 살아있는데, 그자가 죽었을까?”
“그, 그럴 리가! 분명 그자는···.”
홍야가 말을 잇지 못하고 나와 내 검을 바라봤다.
*
천하제일인 천우혁의 사망은 공식적으로 발표된 일이었다. 정천맹의 이름으로 공표한 사실이니 틀림없었다.
그래. 나는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리고 홍야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찌 이런 일이. 천영검대주라고? 아니, 노부가 그자를 못 알아볼 리가 없다. 네놈은 아니야.”
못 알아볼 리가 없겠지. 전생의 나와 직접 검을 겨룬 자였다. 내가 아무리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해도, 나를 천영검대주라고 여길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좀전의 초식은 분명 그자의 초식이었거늘, 이게 대체 무슨···.”
경악과 혼란으로 표정이 어지러워진 그는 내가 거리를 좁혀가자 검을 치켜세웠다.
“설마 그자의 제자였더냐?”
“궁금한가?”
반문하자, 홍야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툭 하고 가면을 두드렸다.
“궁금하면 직접 벗겨봐.”
“이놈이···.”
경악과 혼란 사이에 분하다는 감정이 새로 피어올랐다. 그럴 것이다. 나는 그의 가면을 벗길 수 있었지만, 그는 내 가면을 벗길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그는 가면을 벗기는 대신 온갖 추측을 내놓았다.
“마교와 전쟁을 치르면서도 제자를 길렀다? 그 또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말이 안 되지. 그럴 여유가 어딨어?
“정마대전이 끝나고, 죽기 직전까지 삼 개월. 그 안에 네놈을 키웠다? 아니. 그것도 불가능하다. 고작 삼 개월로는···.”
홍야가 나를 위아래로 살폈다.
“하지만 삼 개월이 아니라, 그전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살아서 제자를 키웠다면. 그래. 정말 살아있었구나.”
홍야의 추측이 제멋대로 하나의 결과로 도출됐다. 그래야만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듯. 아니, 정확히는 그러길 바란다는 듯.
“네놈의 스승은 어디에 있느냐?”
“복수라도 하려고?”
“...”
홍야가 침묵했다. 나는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하긴, 그의 원한은 천영검대가 아닌 천영검대주에게 향하는 게 올바른 방향이었다.
“이제 서로에게 듣고 싶은 말이 생긴 상황이네.”
“...각자의 사정을 털어놓자는 이야기인가?”
그러자고 한다면 홍야는 제안을 받아들일 기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묻고, 들을 권리는 내게만 있다.”
나는 남아있는 내공을 전부 끌어올리면서 검을 들었다. 홍야 또한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다시금 기세를 피워올렸다.
서로의 검에 검기를 넘어, 검강이 오롯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남은 내공만 놓고 본다면 내게 불리할 싸움이겠지만 상처 가득한 그의 몸 상태는 온전하지 못했고 나는 내공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최고조였다.
쉭- 쾅!
검과 검이 충돌하면서 그 차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빛이 번쩍일 때마다 나는 밀어붙이고, 그는 밀려나는 모양새였다.
“컥!”
내상도 심각했는지 홍야의 입가에서 연신 핏물이 터져 나왔다. 그런 그를 구석으로 몰아 더는 물러서지 못하게 만든 뒤 계속해서 검을 뻗었다.
쾅! 쾅!
피하고 쳐내며 간신히 버텨내던 그는 결국 마지막에 가슴을 크게 베인 채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나는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그를 왼팔로 받아내 깊은 상처 몇 군데를 지혈시킨 뒤 어깨에 둘러멨다.
전생의 내게 사로잡혔던 그가 다시금 과거를 반복하는 순간이었다.
*
“문주님! 괜찮으십니까?”
백의문으로 돌아오자 공손량이 뛰쳐나와 나를 반겼다. 내 몸 상태를 살펴본 그는 이상이 없음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내 어깨로 시선이 옮겨졌다.
“이자를 왜?”
나를 죽이기 위해 찾아온 자를 왜 살려서 데려왔냐는 뜻이었다. 나는 공손량에게 기절해있는 홍야를 넘겼다.
“들을 얘기가 많아. 의식을 되찾을 때까지 창고에 가둬놔. 내공을 쓰지 못하게 점혈해뒀지만, 그래도 인극고수인 자다.”
“역시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었군요. 백의검대주에게 감시하고 있으라고 일러두겠습니다.”
백의검대원들에게 시킬 수도 있는 일이지만, 나와 같은 경지의 고수라는 말에 공손량은 만일을 대비해 이자청을 불러왔다.
나는 이자청에게 짐짝처럼 끌려가는 홍야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만검노수라는 자다.”
“만검노수요?”
공손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들어봤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 말에 깜짝 놀라 눈을 치떴다.
“정천맹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사파의 고수야.”
“정천맹의 지하 감옥이라면, 수천뇌옥(收天牢獄)이 아닙니까?”
하늘마저도 가둔다는 철옹성의 감옥이 정천맹의 지하 감옥이었다. 무림인이 아니었던 공손량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저자가 아무리 엄청난 고수라고 해도 어떻게 그곳에서···.”
“그게 가장 궁금한 부분이긴 하지. 만검노수가 왜 만금상단의 빈객 따위를 자처하고 있는지도 물어봐야 하고.”
“이해했습니다. 한데 듣고 보니,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공손량은 심각한 표정과 함께 창고 안으로 모습을 감추는 이자청과 홍야를 응시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정체를 알고 나서부터 싸한 느낌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참. 언의원이 술시에 방문하겠다고 전해왔습니다.”
술시(戌時, 오후 7시~9시)?
해가 떨어지고 있는 위치를 보니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녀가 가져올 소식이라면 이 싸한 느낌을 지우기엔 충분할 것이다.
“영약을 구했대?”
“영약을 구한 건 아니고, 구할 방도를 찾았답니다.”
구할 방도라. 그거면 됐다. 방도만 있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구해내면 그만이었다.
“잠시 쉬고 있어야겠군.”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오늘 한 끼밖에 안 드셨잖습니까?”
왕삼 다음으로 내 식성에 놀란 사람이 공손량이었다. 그때부터 내가 백의문에 있는 동안에는 유달리 식사에 신경을 썼다.
“그러고 보니 한 끼밖에 안 먹었네.”
“육류가 칠할. 나머지는 채소 위주로. 금방 준비해오겠습니다.”
공손량이 미소과 함께 주방으로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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