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기연[2]
2장 기연[2]
“오랜만에 뵙습니다.”
술시에 언예령이 방문했다.
다시 의방을 차려보라고 돌려보낸 이후로 직접적인 만남은 처음이었다. 백화루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누가 봐도 의원이라는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녀였다.
“그러네. 요즘 바쁘게 지낸다며?”
백화루의 건물을 개조한 의방은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했다. 의원이 젊은 여인이라는 소문과 실력이 좋았다던 과거의 이력이 환자들을 끌어모았다.
“전부 문주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죠.”
“도움은 무슨.”
도움이라고 해봐야 백사각에서 주워온 돈 일부를 투자한 게 다였다.
“사룡이도 돌봐주고 계시잖아요. 그 덕에 동생 일엔 신경 쓰지 않고 제 일에만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언사룡을 언급할 때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백사각주에게 인질로 붙잡혀 말단 무인으로 생활하던 동생이 고작 몇 달 만에 일류고수가 되었으니.
“무인으로서 재능있는 놈이다.”
“정말요?”
언예령의 두 눈이 반짝였다. 빈말이라도 분에 넘치는 칭찬이라고 여기는 듯싶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야.”
최근 백의문에 머무는 동안 백의검대원들의 실력을 살펴본 적이 있었다. 이자청에게 그들을 일류고수로 만들어놓으라고 했으니 점검도 해야 했고 약속대로 적당한 무공도 전수해주었다.
그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언사룡의 재능은 발군이었다. 아니, 재능도 물론 뛰어났지만, 그보다는 끈기와 노력이 눈에 띄었다.
오죽하면 이자청이 휴식 또한 수련의 일부라며 잠은 좀 자라고 매일 같이 나서서 뜯어말렸다고 했을까.
노력하는 재능도 무인에게 있어선 남들보다 빠르게 치고 나갈 수 있는 재능 중 하나였다. 덕분에 지금은 열다섯 명의 백의검대원 중 언사룡의 실력이 가장 높았다.
“사룡이가 혹 백의문과 문주님께 누가 되지는 않을까. 사실 조금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리 말씀해주셔서 마음이 놓이네요.”
“마음 놓고 할 일 해. 백의문의 이름으로 투자한 첫 사업이니까.”
“네. 걱정하지 마세요.”
언예령은 의방에 대한 책임과 자부심을 내보이며 호기롭게 대답했다.
이어 그녀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영약을 구하려고 노력해보긴 했는데, 최근에는 시장에서 물건을 구하기가 어렵다고 해요. 상인들도 마찬가지로 하(下)품 영약조차 다뤄본 게 언제냐며 포기하고 있는 실정이에요.”
그 부분에 대해선 익히 파악하고 있었다. 최근 강호에서 영약의 공급이 크게 줄었다고 들었다. 원래에도 영약은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지만.
“그러던 와중에 과거에 저와 주로 거래하시던 약초꾼을 이번에 다시 뵙게 되었어요.”
“약초꾼?”
“네. 대대로 전문적인 약초꾼 생활을 이어가시는 집안의 어른이신데···.”
사계절 중 겨울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나머지는 산서 지역의 고산들을 넘나들며 생계를 이어가는 인물이라고 했다.
“그분께서 제가 영약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오셔서 이걸 건네주셨어요.”
언예령이 말과 함께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둘둘 말린 한 장의 낡은 양피지였다.
양피지 안에는 뜬구름 잡는 식의 지도와 그와 관련된 한 줄의 문구가 적혀있었다. 약초꾼들 사이에서 오래전에 한 번 회자가 됐던 지도라는데.
“오대산 괘월봉에서 구름을 타고 건너 여섯 번째 봉우리를 발견하라고?”
오대산은 산서성에 위치한 유명한 산이다. 다섯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명산. 하지만 여섯 번째 봉우리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다. 그건 언예령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어요. 이걸 문주님께 전해드릴 생각도 없었는데, 그분께서 자신의 조상 중 한 분이 그곳에 다녀왔다는 기록을 발견하셨대요. 그래서 제게 전해주신 거고요.”
“그곳에 영약이 있다?”
“기록에는 그렇게 적혀있었다고 해요. 그리고 무인이 아닌 일반인은 애초에 찾을 수가 없는 장소라고···.”
언예령이 뒷말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기색을 보니 여전히 그녀조차 긴가민가한 얼굴이었다. 다만 그녀는 지도가 아니라 약초꾼이라던 그 인물을 깊이 신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무인만이 찾을 수 있는 장소라면 내공과 경공이 필요한 험준한 장소라는 뜻이다. 약초꾼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신빙성 있는 이야기였다.
나는 지도를 챙겨 넣으며 말했다.
“조만간 찾아가 보지.”
“다음엔 이런 불확실한 정보 말고 제대로 영약을 구해올게요.”
불확실해도 상관없다. 지도가 진짜일지 가짜일지는 모르지만, 영약을 구할 가능성이 있다면 안 가볼 수가 없었다. 그만큼 지금의 나는 내공에 관해서는 절실한 상황이었으니까.
*
언예령에게 돌아가기 전에 창고에 가둬놨던 홍야를 살펴봐달라고 부탁했다. 치료까진 아니고, 의식만 빠르게 되찾을 수 있을 정도로.
“외상도 심하지만, 의식을 잃은 주원인은 내상 때문이에요.”
그녀는 평소에 항상 들고 다니는 약재와 백의문이 가지고 있는 내상약을 혼합해 환약 몇 알을 그 자리에서 조제했다.
“한 시진 간격으로 먹이면 금방 정신을 차릴 거에요. 그래도 역시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하는 게···.”
언예령이 의원의 눈빛으로 홍야를 내려다봤다. 이자청이 옆에서 한마디 중얼거렸다.
“문주님을 죽이려고 찾아온 노인네인데 치료는 무슨.”
“...문주님을요?”
홍야를 내려다보고 있던 언예령이 갑자기 팔을 치켜들었다.
짝!
그녀가 휘두른 팔에 기절해있는 홍야의 뺨이 시뻘게졌다. 나와 이자청은 당황해서 그녀를 바라봤다.
“아니. 의원이라는 사람이 환자를 패면 어떡해?”
이자청이 묻자, 언예령은 코웃음을 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엄한 사람에게 약을 지어준 게 아까워서요.”
그리곤 그대로 창고를 나서서 오랜만에 재회하는 언사룡과 잠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자청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부터 보통은 아닌 여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백화루주 시절 말이냐?”
“네. 청사각주였던 저는 물론이고 적사 놈이나 백사각주 늙은이를 상대로도 할 말은 하던 사람이었거든요. 분명 동생만 아니었으면 야밤에 칼침 놓고 튀었을 여인입니다.”
“하하.”
그런 성격이었나? 내 앞에선 그런 성정이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었기에 그냥 웃기만 했다.
*
언예령의 조언대로 이자청으로 하여금 홍야게에 환약을 복용시키게 했다. 다음날이 돼서야 홍야는 정신을 차렸고 나는 창고로 돌아와 이자청을 물렸다.
홍야와 둘만 남게 됐을 때, 내가 물었다.
“왜 살려뒀는지는 알고 있겠지?”
홍야는 대답 대신 잠시 자신의 몸 상태를 관조했다. 점혈로 인해 내공을 쓸 수 없다는 걸 깨닫곤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과거엔 스승에게. 이번엔 그의 제자 놈에게 붙잡힌 꼴이로구나.”
그는 여전히 나를 천영검대주의 제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의 앞으로 구석에 박혀있던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그러게 왜 만금상단 따위의 빈객으로 눌러앉았어? 수천뇌옥에서 살아 돌아왔으면 자유를 누렸어야지.”
“자유?”
홍야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뇌옥에서 나오게 된 것부터가 노부의 의지가 아니었거늘, 어디에 자유가 있겠느냐?”
“무슨 뜻이지?”
“노부의 실력으로 그곳을 탈출할 수 있었겠느냐? 그곳에서도 내공은 제한된 상태였다. 아니, 내공의 금제가 없었어도 어느 누가 수천뇌옥을 단신으로 빠져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과거의 나라도 수천뇌옥에 갇혀 있는 상황이라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절대까진 아니고.
“그럼 누군가가 수감자를 풀어주었다? 그것도 만검노수를?”
“그곳에서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고 말이 통하던 게 노부였으니 풀어놨겠지.”
그런가. 풀어줬다는 건 어딘가 써먹을 데가 있다는 뜻이고, 풀어준 인물 혹은 세력은 만검노수 정도는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의 위세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만금상단은 아닐 것이다. 금력만으로는 정천맹을 파고들어 수천뇌옥의 수감자를 빼내 올 수 없다. 더군다나.
“수천뇌옥의 관리자는 여전히 도경수, 그 자인가?”
한천자(寒天子) 도경수. 정천맹의 장로 중 하나였다. 전대맹주였던 검신 백도천을 추앙하던 인물이기도 했다. 돈 따위에 매수될 인물이 아니었다.
예상대로 홍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한천자 도경수가 있는데도 만검노수를 빼 올 수 있었다?
그때,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한천자. 노부를 풀어준 게 그자다.”
“뭐?”
그럴 리가. 마교와 사파를 그토록 증오하던 그였다. 다들 꺼리는 수천뇌옥의 관리를 자처하여 도맡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아니다. 더는 할 말이 없으니 노부의 목을 가져가거라.”
뜸 들이기는. 나는 피식 웃으면서 홍야의 두 눈을 응시했다.
“이봐. 영감.”
“...”
“살고 싶지 않아?”
홍야는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눈을 감았다.
“천영검대주를 만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이번엔 그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만나게 해주지.”
“...진심이더냐?”
“진심이다.”
내가 대답하자 홍야가 다시 눈을 뜨고, 나를 마주 바라봤다. 가면 뒤의 내 얼굴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한참을 그렇게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노부가 알고 있는 사실을 털어놓으면 되는 것이냐?”
“그건 어차피 하게 될 일이었고. 다른 조건이 있다.”
“말해 보거라.”
“백의문에 입문해.”
“이런 정신 나간 놈이···.”
“백의문에 입문해서 실력을 키워. 그리고 나를 이겨봐. 그럼 천영검대주를 만나게 해주지. 물론, 그전까진 문주인 내 명령을 따라야 하고.”
그 말에 홍야가 발작하듯 몸을 튕겼다. 사슬로 전신이 포박된 상태여서 마치 뭍에 갓 올라온 물고기나 다름없는 모양새였다.
“그딴 망발에 노부가 현혹될 줄 아느냐? 개소리하지 말아라!”
그래. 망발이고 개소리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삶에 더는 미련이 없는 게 아니라면.
“자신 없어?”
“뭐라? 노부가 뇌옥에 갇혀 허송세월하지만 않았다면 네놈쯤은 단칼에 목을 베었을 것이다.”
“그런가? 내가 보기엔 영감 따위의 실력으로 천영검대주를 만나면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뒈질 것 같은데. 어제도 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했잖아?”
자존심까지 살살 긁어주자, 홍야의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이 쥐좆만한 놈이! 오냐. 네놈의 제안을 받아들이마. 몸을 회복하고 과거의 무공을 되찾으면 네놈부터 찢어발겨 주겠다.”
“그러던지.”
내가 씩 웃자, 홍야가 순간 얼어붙었다. 아차 싶은 표정과 함께 동공이 흔들렸다.
“아니. 노부가 잠시 실언을···.”
“백의문에 온걸 환영한다, 영감.”
“이 새끼야! 말이 헛나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영감도 나이가 있으니 존칭까진 바라지 않겠다. 그래도 문주한테 욕은 좀···.”
“이익!”
몸을 부들부들 떠는 홍야를 따라 철컹거리는 사슬 소리가 음률처럼 퍼져 나왔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길 들으면서 생각이 점점 바뀌었다. 수천뇌옥에 갇혀 있던 만검노수를 꺼내 장기판의 말로 이용하려는 자. 혹은 자들이라니.
그렇다면 그 ‘말’을 일단 내가 취하겠다.
“자청아!”
내가 부르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자청이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예, 문주님.”
나는 턱짓으로 홍야를 가리키며 말했다.
“풀어줘라. 오늘부터 백의문의 문도다.”
“...네?”
이자청의 두 눈이 커지고, 홍야는 여전히 펄떡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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