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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인 환생했다-31화 (31/150)

2장 기연[3]

2장 기연[3]

홍야를 백의문의 문도로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다들 곤란해하는 눈치였다. 이미 내가 결정을 내렸으니 나를 죽이려 했던 일은 차치하더라도, 그의 나이와 무위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이는 가장 어른인 공손량보다 많고 무위는 살면서 만날 기회가 손에 꼽을 만큼 적은 인극고수.

백의검대원들은 물론 예의를 밥 말아 먹은 이자청조차 난감해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영감은 지금부터 백의문의 일(一)장로다. 공총관 다음 가는 지위야.”

내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공손량과 불만스러워하고 있는 홍야를 번갈아 바라봤다.

“노부가 왜 이놈 다음이라는 건가?”

홍야가 공손량을 노려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조소와 함께 그의 반박을 뭉개버렸다.

“공총관은 백의문의 대소사를 도맡은 사람이야. 하다못해 끼니때마다 내 식사도 챙기고 있지. 영감이 공총관 대신 그 일을 맡겠다면···.”

“이놈 다음으로 하겠네.”

내 식사를 챙겨주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겠다는 얼굴로 홍야가 처지를 받아들였다. 참 다루기 쉬운 노인네야.

“그럼 그만 좀 툴툴거리고 알고 있는 정보들이나 털어놔.”

“...그러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홍야는 그런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한천자 도경수. 그래. 그자가 노부를 뇌옥에서 직접 꺼내주긴 했지만, 그날 그자의 옆에는 처음 보는 인물이 함께 서 있었네.”

“처음 보는 인물? 정천맹에 새로 입맹한 자인가?”

“한천자보다 상급자임은 분명했지. 하지만 분위기를 볼 때 그자는 정천맹 사람은 아니었어.”

얘기를 듣던 공손량이 깜짝 놀랐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정천맹의 인물도 아닌 자가 정천맹의 장로인 한천자를 수하 부리듯 다뤘다? 그것도 가장 경계가 심한 맹의 수천뇌옥에서?

“노부를 풀어주면서 말하더구나. 산서의 만금상단주가 부탁하는 일을 들어주면, 그 뒤엔 노부가 어디로 떠나든 신경 쓰지 않겠다고.”

“거절할 이유는 없었겠네.”

“그 지긋지긋한 곳에서 풀어준다는데, 무슨 짓이든 못 하겠는가.”

홍야가 알고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뇌옥에서 풀려난 뒤 곧장 만금상단의 빈객으로 들어가 그들이 제공하는 안락함과 돈으로 요양하며 망가진 몸을 회복하고 있다가, 백의문주를 죽여달라는 청을 받았단다.

“노부는 아직 예전의 실력을 되찾지 못했네. 그러니 조만간 다시 네놈과···.”

“네놈?”

내가 호칭에 대한 실수를 꼬집자 홍야의 눈썹이 푸들거렸다.

“...문주와 다시 실력을 겨룰 테니, 문주께서는 약속을 지키시게.”

“내가 패배한다면 그렇게 될 거야.”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이룰 수 없는 희망이 그를 옭아매는 족쇄가 될 것이고 미련이 남아있는 한 백의문을 떠나지 않을 거라 장담한다. 그만큼 천영검대주를 향한 홍야의 원한은 짙고도 깊었다.

이후에도 나와 공손량은 홍야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주로 한천자와 함께 있었다던 처음 보는 인물에 관한 질문이었다.

“당시 노부는 몸 상태도 엉망이었고 내공도 제한된 상태였네. 지하의 어둠 속에서 그자의 생김새를 살펴볼 겨를은 없었지. 대신 목소리는 꽤 젊었다네. 동시에 여유로웠고, 그 여유에 걸맞은 무위를 지녔어.”

“영감과 비교하면?”

홍야는 일순 멈칫했다가 금방 답을 내놓았다. 인정하려니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정확한 건 직접 겨뤄봐야 알겠지만, 몸을 회복하더라도 아마 동수. 적어도 노부보다 약한 자는 아니었네.”

“그래? 그놈도 인극고수란 말이지. 그럼 나와 비교하면 어때? 영감을 압도적으로···.”

“크흠.”

홍야가 헛기침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나에 대해서만큼은 곧 죽어도 수긍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그 태도로 이미 대답이 되었다.

어쨌든 홍야 덕에 나와 공손량은 어느 정도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자가 머리는 아니겠지요.”

“그렇겠지. 만금상단 또한 몸통, 아니 어쩌면 고작 꼬리에 불과할지도 모르고.”

만금상단을 앞세워 산서의 상권을 장악하려는 세력이라. 이 계획이 성공하면 놈들은 어마어마한 금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리고 이 계획조차 그다음을 위한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천맹까지 놈들의 입김이 닿아있었다. 검신 백도천이 맹주의 자리에 있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을 텐데.

“현 맹주가 독고세가주라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천하오주 중에서도 무력만큼은 최고라는 독고세가이니 강호에서는 그를 검신의 뒤를 이을 적임자라고 여기고 있지요.”

공손량의 대답에 나는 혀를 찼다. 적임자는 무슨. 독고세가의 검법이 천하제일을 다투는 무공이라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정마대전 당시, 독고세가는 전쟁의 승리보다는 자신들의 안위를 우선시 여겼다. 잔챙이들만 상대하며 중요한 전투엔 쏙 빠졌다가 뒤늦게 모습을 드러내던 독고세가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공은 뛰어나지만 교활한 늙은이였다. 나는 그렇게 여겼으나 검신 영감은 세가를 책임지는 가주의 역할 때문이라며 그를 옹호했었지.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자였어.”

“현 맹주님 말입니까?”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공손량이 의아해했다. 나와 독고세가주가 접점이라도 있는 건지 궁금해하는 얼굴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공총관은 이만 나가봐. 가서 만금상단의 다음 행보를 주시하도록. 돈을 더 써서라도 감시하는 인원을 늘려. 백의검대원들을 움직여도 좋다. 조만간 일장로를 다시 만금상단으로 돌려보낼 거야.”

“일장로를요?”

“노부를?”

내 명령에 공손량과 홍야가 동시에 반문했다. 나는 덤덤히 의중을 털어놓았다.

“영감은 백의문주를 죽이고 복귀한 거야. 나를 상대하면서 입은 상처가 깊어 좀 더 요양하고자 하는 변명으로. 빈객 생활이 꽤 마음에 들었다며?”

“나쁘진 않았네.”

그랬겠지. 인극고수를 빈객으로 모시게 됐으니 여러 가지 편의를 봐줬을 것이다. 게다가 백의문주를 죽여달라는 부탁을 끝으로 내보내야 하는 빈객이었다.

그런 그가 다시 복귀한다면 만금상단 입장에서는 홍야를 계속 붙잡아두기 위해 성의를 다할 수밖에 없었다.

“만금상단에서 몸도 회복하고. 돈도 뜯고. 좋은 요리도 주워 먹고 하면서 지내고 있으라고.”

“그게 전부인가?”

“그럴 리가. 그곳에서 뭐든 좋으니 증거를 찾아와. 만금상단의 흉계가 뭔지 밝힐 수 있는 증거.”

놈들이 결성하려고 하는 연합회의 본색을 드러낼 수 있는 증거. 놈들조차 배후의 세력을 따르는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증거. 뭐든 상관없었다.

홍야에 의해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 만금상단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테고 그 과정에서 뭐든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공손량은 내 계획을 알아차리고 곧장 방을 나섰다. 홍야도 만금상단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를 잠시 붙잡아두었다. 그에게 아직 물어볼 게 남아있었다.

*

“천영검대주 소이겸?”

홍야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기억을 떠올리려고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재촉하는 대신 잠자코 기다렸다.

“새로이 천영검대주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 있다고 듣긴 했네. 천영검대에 관해선 노부도 관심이 많았으니까.”

“그래서?”

재촉은 하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침이 삼켜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아니었네.”

“뭐? 확실해?”

소이겸이 아니라고? 그럴 리가. 천영검대는 기밀검대인 만큼 정천맹 외부에서는 그들의 정보를 알아볼 수 없었다. 해서 그저 잘 지내고 있겠거니 생각하며 굳이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확실하네. 새로운 맹주가 취임 된 이후, 천영검대의 인원들이 대거 교체됐다고 들었지. 뇌옥의 간수들이 오고 가며 하는 얘길 주워들었을 뿐이지만.”

“그럼 기존의 인원들은?”

“그것까진 모르네. 그래도 정마대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자들이니, 여전히 맹에 남아있지 않겠나?”

그래. 그 누구보다도 정천맹의 승리를 위해 노력하고 희생한 이들이다. 하지면 역시나,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순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중 몇 명은 자호단(自護團)에 배치됐다는 얘길 들은 것도 같네만.”

자호단? 그 이름을 듣자마자 씁쓸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깊은 분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엿 같은 새끼들이···.

홍야도 그 낌새를 느꼈는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간 고생했으니 잠시 편한 자리에서 쉬고 있으라는 배려 아니었겠나?”

배려? 배려가 아니라 배척이다. 검신 백도천의 유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기존의 천영검대원들을 밑에 둘 수 없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자호단. 좋게 말하면 정천맹의 입구를 수호하는 무력 단체고 객관적인 기준에서는 한낱 문지기나 다름없는 집단이다.

자호단원들을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기존의 천영검대원들에게 맞는 역할은 분명 아니었다.

“...영감도 그만 나가봐.”

“그러지.”

홍야를 내보내고 혼자 남게 되자 자연스레 소이겸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그 녀석도···. 아니, 그딴 취급을 받을 바엔 차라리 맹을 떠나는 선택을 할 녀석이었다. 물론 확신할 순 없다. 소이겸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정천맹이 있는 하남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기다려라, 이겸아. 맹에 있다면 맹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고향으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지켜보러 가겠다.

나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밖으로 나와 백의문을 나섰다. 자꾸 하남으로 틀어지려는 발검음을 붙잡아 오대산이 있는 반대 방향으로 이동했다.

지금은 과거의 무공을 회복하는 데 주력할 때였다.

*

이틀을 꼬박 걷고 달려 오대산 인근 마을에 도착했다. 오대산 주변으로 여러 마을이 있었는데, 내가 도착한 곳은 괘월봉 초입과 이어지는 마을이었다.

마을에 객잔 하나가 있어서 그곳에 방을 잡았다.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여독을 풀고 푹 쉴 생각이었다. 알아볼 사람도 없어서 가면은 벗어둔 상태였다.

객잔은 한산했다. 식사를 위해 방에서 내려오니 주인 혼자 주방 입구에 앉아있었다.

그가 말하길 괘월봉은 오대산 다섯 봉우리 중 산세가 가장 험하고 높아 약초꾼들조차 잘 찾지 않는 산이라서 손님이 드물다고 했다.

덕분에 주문한 양보다 더 많은 요리가 내 앞에 차려졌다.

“어차피 상하면 버릴 재료들이라, 괘념치 마십시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후한 인심에 대한 답례로 술도 한 병 주문해서 마셨다.

간만의 손님이라 그런지 객잔 주인은 주변을 맴돌며 이것저것을 물어왔다.

“괘월봉에 오르시려고 이곳을 찾으신 겁니까?”

“예. 오르기 힘든 만큼 절경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러셨군요. 맞습니다. 손님처럼 종종 괘월봉의 절경을 위해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다들 포기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가지요.”

“멀리서 보기에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하. 그래도 강호인이시니 손님께선 꼭 정상에 오르셨으면 좋겠습니다. 과거에도 경공이 뛰어난 강호인 한 분이 다녀가셨던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내가 눈을 빛냈다.

“그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수십 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의 일이라고 이 객잔의 전주인에게 들은 이야깁니다.”

“혹시 오대산의 여섯 번째 봉우리에 대해선 들어보신 적이···.”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객잔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습니다. 그 강호인도 그런 얘기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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