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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인 환생했다-33화 (33/150)

3장 선택[1]

3장 선택[1]

“오셨습니까.”

만금상단주 반일소는 뜻밖이라는 얼굴이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사로잡혀 말투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백의문주를 죽여달라는 청탁을 받고 떠났던 홍야가 상단으로 돌아온 것이다. 인극고수인 만큼 그가 실패할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다만, 백의문주를 처리하고 나면 그대로 산서를 떠나기로 되어있었다. 윗선에서도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건 한 번뿐이고, 이후에 그가 떠나고자 한다면 말없이 보내주라는 지령을 받았다.

한데 그런 홍야가 상단으로 복귀했다.

‘빈객으로 모시는 동안 극진히 대접하긴 했지.’

반일소는 자신과 상단이 내보인 성의가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계속 상단의 빈객으로 남고자 한다면 그 성의는 지속될 것이다. 홍야같은 고수에겐 만금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백의문주는 처리했네. 젊은 놈의 무위가 예상외로 높더군. 꽤 애를 먹었어.”

그 말에 반일소가 슬쩍 홍야의 몸 상태를 살폈다. 확실히, 안색이 좋지 않고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깊은 상처가 드러나 있었다.

백의문주가 그 정도의 실력자였던가? 놀랍긴 했지만 이미 죽은 놈에게 더는 신경 쓸 이유가 없었기에 반일소는 미소를 지었다.

“노주에 한해서긴 하지만,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습니다. 쉽지 않은 상대였을 텐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쉽지 않다니. 노부를 뭘로 보고? 나이가 어린 탓에 조금 방심했을 뿐이네.”

“그렇습니까? 송구합니다. 방금 한 실언은 잊어주십시오.”

반일소는 홍야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최대한 애를 썼다.

“일단 몸부터 치료하시지요, 어르신. 곧장 의원들을 불러오겠습니다.”

“그러지. 그리고···.”

홍야가 입맛을 다시며 뒷말을 흐렸다. 반일소는 그가 뭔가 원하는 게 있음을 깨닫고 눈을 빛냈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뭐든 내주겠다는 태도여서 홍야는 씩 웃었다.

“편하게 말하라고 하니 부담 갖지 않겠네.”

“예.”

“자네, 영약 가진 것 좀 없는가?”

영약이라는 말에 반일소가 움찔했다. 산서 제일 상단이라 불리는 만금상단이다. 영약이 없을 리가 있나.

하지만 최근 영약의 값어치가 폭등한 상황이다. 보유한 영약들은 최대한 묵혔다가 적절한 순간에 하나씩 시장에 풀어둘 계획이었는데.

“...하(下)품 영약 정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반일소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붙잡아두려면 원하는 걸 내줘야지.

“역시 산서 제일 상단이로구나.”

홍야가 만족스럽다는 듯 껄껄거렸다.

겉은 웃고 있지만 속은 아니었다. 자신을 만금상단으로 돌려보낸 백의문주의 목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감은 백의문주를 죽이고 복귀한 거야. 나를 상대하면서 입은 상처가 깊어 요양하고자 하는 변명으로.’

‘만금상단에서 몸도 회복하고. 돈도 뜯고. 좋은 요리도 주워 먹고 하면서 지내고 있으라고.’

어쩌다 보니 백의문의 장로가 되어 그를 따르게 됐지만 잠깐일 뿐이다.

‘뭐든 좋으니 증거를 찾아와. 만금상단의 흉계가 뭔지 밝힐 수 있는 증거.’

오냐. 증거도 찾아주마. 대신 그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몸과 무공을 회복하고, 영약으로 내공도 늘릴 계획이다.

백의문주의 무위가 높다는 건 인정하긴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천하제일이라는 천영검대주의 검법을 사용하지 않던가. 하지만 내공은 아니었다. 살아온 세월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으니까.

‘하품 영약이면 십 년에서 십오 년 정도는 늘어나겠군. 그렇게 되면 노부의 내공은 이 갑자에 육박한다.’

백의문주의 내공은 높게 쳐줘 봐야 일 갑자일 터. 그가 어디서 기연이라도 얻지 않는 한, 재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홍야였다.

*

“후우.”

운기를 끝낸 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양지초를 복용하고 영기를 흡수하는 데만 며칠이 걸렸다. 모든 정신을 쏟아부어 집중한 덕에 한 톨의 기운도 흘리지 않고 흡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단전의 내공이 일 갑자 반을 넘어섰다. 거의 백 년 내공에 육박했다. 가까운 목표로 잡았던 일 갑자를 훨씬 웃도는 양이다.

그것만으로도 아주 만족스러웠을 테지만 아직 하나가 더 남아있었다.

괘월선보.

처음 훑어보기만 했을 때도 느꼈다. 신법과 보법을 총괄한 뛰어난 경신공이라고. 익히기 위해 자세히 들여다봤을 땐 뛰어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 기준에서 괘월선보는 천일백야검법과 같은 천외천의 무공이었다.

스륵!

백의문의 장원만큼이나 넓은 동굴 속 공간. 그 공간의 끝과 끝을 순식간에 가로질렀다. 미세한 소리조차 나지 않았고 눈 깜빡할 시간도 없을 만큼 빨랐다.

속도를 주체하지 못해 자칫 벽과 충돌할 뻔했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내공의 소모가 크지 않아 부담이 없다. 내공 소모가 무지막지한 천일백야검법과 함께 사용하기에 알맞은 경신공이었다.

게다가 비급에 적혀있길, 괘월선보를 오성까지 익히면 이형환위(移形換位)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이형환위는 전생의 나도 가까스로 다다른, 상대방이 인지하지 못할 속도로 이동해 서 있던 자리에 잔상마저 남게 하는 경지였다. 상대방에는 검신 영감이나 천마도 포함됐다.

천하제일에 가까운 고수들의 눈에서도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게 이형환위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괘월선보를 육성까지 익히면 이형환위를 연달아 펼칠 수 있고 이후 성취가 오를 때마다 횟수가 늘어난다고 적혀있었다.

괘월선보를 창안한 고인이 누구인지 더욱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언예령과 인연이 있다던 약초꾼의 조상이라고 했으니 보답도 할 겸 나중에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일단 괘월선보를 육성까지만 익힐 생각으로 수련에 매진했다. 육성 정도는 열흘이면 충분했으니까.

*

열흘이 지나 동굴에서 빠져나왔다. 빠져나오면서 미소를 주체하지 못했다. 이런 대단한 기연을 환생한 이후에 또 얻게 될 줄이야.

나는 숨기지 않고 마음껏 웃었다. 이어 괘월봉의 정상과 동굴을 이어주는 이십여 개의 석봉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올 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신중했는데, 떠날 때는 더없이 가벼웠다.

괘월선보가 얼마나 대단한 경신공인지 몸소 체험하게 된 것이다.

산에서 내려갈 때도 경신공을 유지했다. 내공까지 든든한 마당에 거리낄 게 없었다.

마을에 도착하자 객잔 주인과 마주쳤다. 객잔 주변을 청소하던 그가 나를 발견하곤 미소를 머금었다.

“정상에 다녀오셨군요.”

“뛰어나 경치였습니다.”

“표정만 봐도 알겠습니다. 무척 만족하셨나 봅니다.”

객잔 주인이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나는 기분이 좋았다.

“덕분입니다. 잘 쉬다 갑니다.”

“언젠가 괘월봉의 경치가 그리워지시면 또 놀러 오십시오.”

나는 그러겠다고 답한 뒤 마을을 떠나 백의문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쉬지 않고 계속 달려 불과 반나절 만에 백의문에 도착했다.

장원에는 공손량과 이자청이 전부였다. 백의검대원들은 만금상단의 행보를 감시하기 위해 떠나있는 것 같았다.

나는 먼저 연무장 쪽으로 향했다. 이자청이 그곳에서 검을 휘두르며 수련하고 있었다. 녀석의 뒤편으로 소리 없이 이동한 내가 적당한 힘을 실어 검을 검집째로 휘둘렀다.

“으억!”

터-엉!

기겁한 이자청이 반사적으로 일격을 막아냈다. 녀석은 놀란 얼굴로 나를 발견하곤 이내 차분해졌다.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그새 벽을 넘었네?”

이자청을 단련시키는 도중에 홍야가 찾아오고, 뒤따라 언예령이 방문하면서 끝까지 봐주지 못했었다. 한데 이자청은 기어코 혼자서 얼마 남지 않은 벽을 뛰어넘어 절정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문주님께 개처럼 두들겨 맞으면서 뭔가 깨닫긴 했나 봐요.”

“아쉽네. 손맛이 그리웠는데.”

“그러실까 봐 악착같이 수련한 것도 있죠.”

이자청이 지난 경험을 떠올리면서 몸서리를 쳤다.

“고생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녀석의 성취를 격려해준 뒤 공손량이 있는 집무실로 걸어갔다. 이자청이 나를 뒤따르면서 말했다.

“공총관이 문주님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만금상단 놈들이 움직인 것 같습니다.”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홍야를 통해 내 죽음을 가장했고 시간이 꽤 흘렀다. 어떻게 나오려나. 본격적으로 움직일 듯싶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공손량이 나를 크게 반겼다.

*

예상대로 내가 괘월봉에 다녀오는 동안 움직임이 있었다. 공손량이 기다렸다는 듯 정보를 내놓았다.

“태산파의 무인들이 며칠 전에 산서에 진입했습니다. 곧 만금상단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태산파의 누군지는 알 수 없었고?”

“누군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장로 한 명과 젊은 나이의 일대 제자를 필두로 이대 제자들 다섯 명이 함께라고 합니다.”

“속가제자가 죽었다고는 해도 장로까지 나선다?”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만금상단의 금력이 작용했다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속가제자였던 만금상단 둘째 공자의 죽음은 핑계일 뿐이겠지요.”

적지 않은 돈을 쥐여줬을 것이다. 엉덩이가 무거운 장로까지 움직이게 했으니.

“그리고 만금상단주가 직접 성화상단주와 대면하기로 했답니다.”

“슬슬 담판이라도 지으려는 모양이네.”

“문주님이 죽은 줄 알고 있고, 태산파의 위세로 인해 유씨세가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테니 성화상단주는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굴복하고 연합회에 가입하거나 맞서다가 무너지거나···.”

공손량이 뒷말을 흐렸다. 성화상단주인 종승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상황이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신뢰와 덕망을 기반으로 하는 성화상단이 연합회에 가입한다면 연합회의 평판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만금상단에게는 가장 이득인 방향이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연합회가 불법적인 일을 저질러도 몇 번은 눈감아주고 넘어갈 만큼 성화상단의 명망은 높았으니까.

만일 종승재가 거절한다면 칼을 뽑을 것이다. 말로 안 되면 강제로라도 빼앗거나 아예 치워버리겠지.

물론 내가 있으니 놈들이 무슨 짓을 벌이든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놈들의 배후였다.

“일장로에게선 소식 없었어?”

만금상단으로 복귀한 홍야라면 지금쯤 뭔가를 찾아냈을 수도 있다. 역시나 공손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표정이 묘했다.

“뭐라는데?”

“그게···. 쥐새끼처럼 건물이나 뒤지고 다니기엔 자존심이 상한다고, 적당한 기회를 봐서 만금상단의 후계자를 납치해오겠답니다.”

후계자라면 만금상단의 첫째 공자였다. 둘째와 달리 상단의 일에 깊게 관여되어 있을 터. 꽤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일은 영감에게 맡겨두기로 하고.

“자청아.”

“네.”

“성화상단으로 가자.”

“지금 바로요?”

“바로. 도와주기로 했으니 도와줘야지.”

만금상단에게 굴복하거나 맞서다가 무너지는 선택이 아닌 세 번째 선택지가 되어줄 생각이었다. 만금상단이 결성하려고 하는 연합회를 성화상단이 집어삼키는 세 번째 선택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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