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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인 환생했다-34화 (34/150)

3장 선택[2]

3장 선택[2]

“상단주님. 묵철(墨鐵)과 오철(烏鐵)의 가격이 급락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남은 물량을 정리해야···.”

“서호용정차(西湖龍井茶)가 시장에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더는 독점이익을 기대하기가 힘들 것···.”

“휘연전장에서 자금 융통을 거절했습니다. 다른 쪽을 모색하고 있긴 한데 이마저도···.”

성화상단주 종승재가 골머리를 앓았다. 만금상단의 견제는 각오하고 있던 부분이지만 그 외에 나머지 상단들도 사방에서 자신이 벌이는 사업에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한통속이었고, 중심에 놓인 성화상단이라는 먹잇감을 물어뜯고 있었다.

와중에 만금상단주 반일소가 며칠 뒤에 찾아오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의사를 물어본 것이 아닌, 일방적인 통보였다. 태산파의 장로를 소개해주겠다는 빌미로.

하지만 소개 따위가 목적이겠는가. 칼을 들고 찾아와 협박하는 형세나 다름없었다. 금력과 무력. 양면으로 성화상단이 밀리는 꼴이니 슬슬 마무리를 짓겠다는 거겠지.

이런 상황에 유씨세가를 끌어들일 순 없다. 산서의 명가라고는 해도 천하오주인 태산파와 맞섰다간 큰 화를 입을 것이다.

백면공자라고 불렸다는 백의문주처럼.

‘화설이가 어렵게 맺은 인연이라고 했었는데.’

종승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강한 고수는 처음 봤어요. 게다가 노주 사람들은 그분을 협을 추구하는 협객이라며 찬양하고 있고요. 분명 저희 상단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노주에서 돌아온 딸이 자신을 설득하고자 침을 튀겨가며 이야기했었다. 이후 백의문주에 대해 조사해본 결과 확실히 놀라운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됐다.

해서 그를 꼭 만나보고 싶었는데 그러기도 전에 만금상단에 의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 줄기 희망마저 사라진 마당에 종승재는 더는 버티기가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어쩔 수 없구나.”

체념한 듯 허탈한 목소리가 종승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만금상단에게 굴복하기가 죽기보다 싫었지만, 더 저항하다간 자신뿐만 아니라 성화상단의 사람들 모두가 위험했다.

물론 만금상단이 연합회를 결성하고 산서의 상권을 장악하게 되면 온갖 비리와 부조리가 난무하게 될 것이다.

그 꼴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한다니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방법이···.”

종승재가 이마를 싸매고 눈을 감았다.

그때.

“방법이 있으면요?”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종승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누구냐!”

챙!

상인이지만, 일정 수준의 무공을 익힌 종승재였다. 본능적으로 검을 뽑은 그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주시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방안으로 누군가가 잠입해올 때까지 알아채지 못하다니. 자신은 물론이고 건물 전체를 지키고 있는 경비 무사들마저 잠잠했다.

‘살수인가?’

만금상단이 보낸 자객일 수도 있었기에 종승재는 잔뜩 긴장하며 어둠 너머의 인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인물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단정한 무복을 입고 머리를 묶어 올린 그는 검상이 새겨진 백색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유심히 살펴보던 종승재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백의문주···?”

*

“그럴 리가. 분명 죽었다고···.”

종승재가 당혹스러워하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귀신이라도 본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죽었다고 여기도록 연기 좀 했습니다. 만금상단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려고요. 찾아야 할 것도 있고.”

나는 중앙으로 걸어가며 간단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종승재는 여전히 시선으로 나를 쫓으며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죽음을 가장했다는 말이오? 찾아야 할 건 또 무엇이고?”

그의 물음에 나는 핵심만 짚어주었다.

“만금상단이 연합회를 만들어 산서의 상권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소.”

“그리고 만금상단은 정체가 불분명한 세력의 명령을 받고 있고요.”

“그게 무슨?”

종승재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나를 마주할 때 보다 더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그럴 것이다. 만금상단주가 누군가의 하수인이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겠지.

“산서 제일의 상단을 장악한 세력이 있다?”

한평생을 만금상단과 경쟁하며 살아온 종승재였다. 그 누구보다도 만금상단의 저력을 잘 알고 있을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런 경쟁상대가 고작 누군가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만감이 교차한 것 같았다.

동시에 만금상단의 배후 세력에게 위구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대체 어떤 세력이란 말이오?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천맹에 알려야 할 일이 아닙니까?”

맞는 말이다. 그런 세력이 있다면 일개 개인이나 문파가 아니라 정천맹이 나서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정천맹에도 그 세력의 입김이 닿아있는 것 같습니다.”

“허.”

어이가 없을 테지. 나도 그랬으니까. 정천맹의 장로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놈들이었다. 이 말을 처음 들으면 개소리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 앞에서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종승재처럼.

“그 말을 어떻게 믿소? 증거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오?”

“아직은요. 찾아야 한다는 게 그거였습니다.”

“그럼 그대가 백의문주라는 사실은? 만금상단에 의해 백의문주가 죽었다는 정보는 내가 직접 알아봤소. 한데 죽은 자가 지금 내 앞에 살아 돌아와서 허황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군.”

“도움을 드리려고 왔고, 진실을 전해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진위를 가릴 방도가 없지 않소.”

지금은 딱히 없지. 홍야가 돌아온 다음에야 찾아올 걸 그랬나? 멋쩍은 마음에 나는 피식 웃었다.

종승재의 태도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가뜩이나 예민한 상황이니 쉽게 믿을 수 없고 내민 손을 무턱대고 맞잡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대와 백의문이 어째서 본 상단을 도우려는 건지 조금 의아한 부분도 있었소.”

성화상단은 바람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발을 빼면 뺏지, 발을 담그려는 이들은 없었다. 그 때문에 종승재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신중히 의심했을 터였다.

나라도 그의 입장이었다면 그랬을 것 같다.

“그 부분부터 이해시켜드려야겠네요.”

결국, 나는 천천히 가면을 벗었고 종승재는 여태까지 쥐고 있던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진휘야. 네가?”

종승재가 떨리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감정이 뒤엉켜 있는 눈빛이었다.

더는 백의문주가 아니었기에 나는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

종승재와는 칠엽설삼을 받게 됐을 때 이후 몇 달 만의 만남이었다. 그는 방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술을 술병째로 들이키며 놀란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곤 내 맞은편에 앉아 손을 맞잡았다. 그 손에서 여전히 떨림이 느껴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진휘 네가 백면공자이고, 백의문주라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나는 덤덤히 그동안의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흑사방과 마협문 사건으로 시작된 일들을, 숨길 건 적당히 숨기면서 털어놓자 종승재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마협문과 흑사방이 서로 자중지란을 일으켰다기에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론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전부 네가 주도한 일이었다니. 대단하구나.”

“대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대단하지 않다니? 철혈검을 단신으로 쓰러트리고 마협문과 흑사방을 무너트려 가문을 지켜냈다. 이게 대단한 일이 아니면 뭐가 또 대단한 일이겠느냐?”

자기 자식 일처럼 기뻐하기에 더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웃고만 있는데 종승재가 물었다.

“이 사실은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을 생각인 게냐?”

“예. 나중에 기회가 있겠죠.”

“알겠다. 굳이 이유는 묻지 않으마.”

이유를 물어도,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처음 가면을 썼을 때만 해도 내가 백면공자가 되고, 백의문주가 될 줄은 몰랐고 이 행세를 지금껏 이어올 줄은 몰랐다. 아마 당분간은 계속되겠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밝히면 종승재처럼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면서도 걱정과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럴 바엔 알리지 않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올바른 판단이 아닐지라도 그게 마음이 편했다. 말했듯이, 언젠가 자연스럽게 밝힐 기회가 있겠지.

그때 종승재가 진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 백의문이 왜 성화상단을 도우려는 지는 충분히 이해했다. 놀랍고 대견스러우며, 무척 고마운 일이지. 하지만.”

그는 백의문주인 내가 아닌 유진휘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일은 너무 위험하다. 만금상단과 태산파. 게다가 네 말대로 만금상단의 뒤에 그런 배후세력이 숨어있다면 더더욱 위험하겠지. 그런 일에 너를 끌어들일 수는 없구나.”

나는 미소와 함께 그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성화상단이 저를 끌어들이는 게 아니고, 저와 백의문이 성화상단을 끌어들이는 겁니다.”

“...”

“지금 저는 백의문주로서 상단주님 앞에 앉아있는 것이니 현명한 선택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내가 다시 가면을 쓰자, 종승재가 침묵했다.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의 선택을 도와줄 생각으로 씩 웃었다.

“자청아.”

“예.”

내가 부르자, 이자청이 천장의 어둠 속에서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깜짝 놀란 종승재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냐며 눈으로 묻고 있었다.

“마땅히 인사드릴 기회가 없어서 계속 숨어있었는데···. 실례는 아니었겠죠?”

이자청이 목을 긁으며 너스레를 떨자 종승재가 실소를 머금었다.

“괜찮네.”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하하.”

종승재는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적잖이 감탄했다. 절정고수인 이자청의 기세와 그런 이자청을 수하로 부리고 있는 내게 감탄한 것이기도 했다.

“만금상단의 둘째 공자. 그러니까, 태산파의 속가제자는 이 녀석이 죽였습니다.”

“또 그 얘깁니까?”

이자청이 입을 삐죽였고 나는 그를 무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태산파는 저희가 알아서 상대하겠습니다. 물론 만금상단도요.”

“그놈들을 너와 백의문이 전부?”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배후세력에 대한 정보도 조만간 찾을 수 있을 거고요.”

“이미 손을 써놨단 말이구나.”

써놓긴 했지. 그게 납치라는 방법이 될 줄은 몰랐지만. 나는 속으로 실소를 지으며 종승재에게 할 일을 알려주었다.

“상단주님께서는 만금상단이 만들려는 연합회를 집어삼키시기만 하면 됩니다.”

“...쉽지 않은 일이야.”

“쉽지 않지만, 해야 할 일이기도 하죠. 산서의 상권을 놈들에게 고스란히 갖다 바칠 수는 없으니까.”

내가 돕는다면 종승재와 성화상단은 충분히 산서의 상권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배후세력은 계획이 실패했다는 걸 깨닫고 다시 손길을 뻗어올 테지. 혹은 꼬리를 끊고 숨어들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놈들의 정체를 알게 된 이상 어떻게든 장막 속에서 끄집어낼 생각이니까.

“알겠다. 성화상단의 이름을 걸고 최선을 다해보마.”

종승재가 결의를 다지듯 대답했다. 그리고.

“삼일 뒤에 만금상단주가 태산파의 장로와 직접 찾아오겠다고 했었는데. 어찌하겠느냐?”

어쩌긴?

내가 웃자, 이자청이 옆에서 따라 웃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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