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출도[1]
4장 출도[1]
장원의 문이 잠기고 백의검대원들이 담벼락 위에서 포위망을 펼치듯 서 있자, 반일소를 위시한 무인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새어 나왔다.
기세등등하게 성화상단으로 쳐들어왔다가 덫에 걸린 쥐새끼나 다름없는 형세가 되었으니. 더군다나 무위가 가장 높은 곽현이 싸움을 피하고 있었다.
태산파의 장로. 옥검현로. 정마대전에서 태산파의 명성을 드높인 고수 중 한 명. 태산파의 장문인 앞에서도 언제나 당당하던 그가 저자세를 보이는 걸 처음 봤겠지.
그래서인지, 무리 사이에서 반듯한 인상의 장년인 하나가 걸어 나왔다. 행색을 보아 곽현을 따라온 태산파의 일대제자인 것 같았다.
“장로님.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장년인의 얼굴엔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태산파라는 이름에서 비롯된 자부심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곽현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물러나 있거라.”
“물러나 있으라고요? 눈앞에 적이 있고, 그 적이 지금 태산파를 깔보고 있습니다. 게다가 저자는 저희의 제자를 죽인 원수가 아닙니까? 원수를 두고 물러나라니요. 그 명령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놈이···.”
“불복에 대한 벌은 태산으로 돌아가 달게 받겠습니다.”
장년인은 제 할 말만 하고 곽현을 지나쳐 중앙으로 걸어왔다. 그의 뒤로 반일소가 씩 미소 짓는 게 보였다.
장로와 일대제자라는 신분의 차이가 있을 뿐, 장년인은 곽현 못지않은 실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나섰으니 금방 상황이 정리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런 반일소를 향해 마주 비웃어주고는 내 앞에 서 있는 장년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미 살기를 풀풀 풍겨대는 상태였다.
확실히 원수를 마주한 듯한 태도다. 그래서 궁금했다. 이자는 진정 태산파의 속가제자였던 만금상단 둘째 공자의 복수를 위해 나선 것인지.
“태산파의 일대제자?”
“그렇소. 그대가 백의문주요?”
“들었다시피.”
“잘됐군. 그대가 아무리 일문의 문주라도, 태산파의 제자를 죽인 것에 대한 대가는 받아내야겠소.”
“정말 그게 전부야?”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야. 속가제자 하나 죽은 게 태산파의 장로나 일대제자가 움직일 명분이 되나? 만금상단에서 받아먹은 돈의 액수가 적지 않다고 해도 말이야.”
내 말에 장년인이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본문은 제자를 대함에 있어 차별을 두지 않소. 진신제자든 속가제자든 모두 태산의 제자들이오. 지금도 마찬가지요. 만금상단의 배경 때문에 나선 게 아니라 태산의 제자가 죽었기 때문에 나선 것이지.”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면?”
“그대에게 패배해 죽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내 실력이 부족했던 걸 테니. 그래도 나는 물러서지 않을 거요.”
그의 음성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전생의 내가 마주했던 태산의 정신과 기개가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덕분에 나는 깨달았다. 태산파는 아직 건재하다는 걸. 배후세력은 아직 태산파를 온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그런가? 훌륭한 정신이야. 저 뒤쪽에 있는 이대제자들도 마찬가지겠지?”
“당연한 소릴 하는군.”
“그럼 장로라는 새끼는 왜 저러는데?”
내가 눈짓으로 곽현을 가리키자 장년인이 입을 다물었다. 그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는 듯. 해서 내가 대신 말해주었다.
“만금상단을 앞세워 산서의 상권을 집어삼키려는 배후세력이 있다. 태산파의 장로 몇 명이 그 배후세력에 가담했지. 그게 전부는 아닐 거야. 가지가 썩었다는 건 이미 그 뿌리에도 문제가 생겼다는 뜻일 테니까.”
“...!”
내 말에 장년인이 눈을 치떴다. 반일소와 곽현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내공을 실어 말했으니까.
“옥검현로 곽현. 저 새끼도 그중 하나야. 속가제자의 복수 따윈 안중에도 없을걸? 단지 그 사실을 빌미로 만금상단을 돕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을 뿐이야. 지금은 죽기 싫어서 어떻게든 도망쳐보려고 대가릴 굴리는 중이고.”
내가 피식 웃자 곽현의 얼굴이 시뻘게지기 시작했다. 반일소는 여전히 경악하는 중이었다. 내가 배후세력에 대해 어떻게 알아냈는지 의아해하는 중이기도 했다.
와중에 장년인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딴 헛소리로 본문을 욕보이지 마시오.”
“욕보여? 나는 태산파를 위해 진실을 알려주고 있는 거다. 일대제자라면 문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파악하고 있을 텐데. 의심 가는 부분이 하나도 없나?”
내가 묻자 장년인이 다시 침묵에 빠졌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는 걸 보니 뭔가가 스쳐 지나가긴 했나 본데.
나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하나 더 물었다.
“동악검선(東嶽劍仙)께선 강녕하시고?”
오악 중 하나인 동쪽의 태산. 그 태산을 책임지는 태산파의 장문인이 동악검선이다. 검신 영감과도 절친한 사이여서 전생에 종종 마주쳤던 기억이 있다.
그래. 동악검선이 버티고 있다면 배후세력으로서도 태산파를 장악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지금껏 장로 몇 명이 배신하는 선에서 끝나지 않았을까 싶었다.
한데 장년인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장문인께서는··· 병상에 누워계시오.”
이것 봐라?
*
‘허허. 맹주님께서 입이 닳도록 자랑하시던 천영검대주를 여기서 보게 되는구려.’
‘이거 참 아쉽지 않소? 전쟁 중인 시기가 아니었다면 검이라도 한번 섞어봤을 텐데. 물론 오늘만 날이 아니지. 훗날 전쟁이 끝나고 서로가 살아만 있다면 기회가 생기지 않겠소?’
동악검선과 처음 대화를 나눴던 때가 떠올랐다. 언젠가 서로 실력을 겨뤄보자고 약조했으나, 내가 죽는 바람에 약조를 어기는 꼴이 되었다.
나와 달리 그는 분명 종전 이후에도 정정한 모습으로 태산으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그런데 병상이라니?
“뭐 때문에?”
원인을 묻자 장년인이 고개를 저었다.
“외부인에게 자세히 발설할 수는 없소.”
“그렇겠지.”
나는 덤덤히 수긍했다. 그가 직접적으로 대답해주지 않았지만,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표정을 통해 어느 정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해서 나는 검을 뽑았다. 뭔지 모를 분노가 가슴 한편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살기가 뒤따랐다.
장년인은 움찔 놀라 마주 검을 뽑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가 무어라 말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하지만, 태산파를 위해 진실을 알려줬을 뿐이야. 그쪽과 이대제자들은 덤비지만 않으면 살려두겠다. 비켜.”
“하지만···.”
“마지막 경고야. 비켜.”
내 진심을 느꼈는지 장년인이 망설이다가 옆으로 물러섰다. 그를 지나치면서, 품속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 그에게 던졌다.
홍야가 반세운을 납치해 알아낸 정보가 적혀있는 서류. 그중 종승재에게 넘긴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였다.
“병신같이 굴지 말고 그거나 보면서 정신 차리고 있어. 태산파와 장문인을 구하고 싶으면.”
안면을 때리며 바닥으로 추락하는 서류들을 주워 드는 장년인을 뒤로 하고 나는 곽현과 반일소 무리에게 다가갔다.
내 옆으로 홍야가 따라붙었다.
“태산파의 제자들만 살려두면 된다는 게지?”
그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입맛을 다셨고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청과 백의검대원들은 여전히 담벼락 위에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미리 지시해둔 부분이었다. 도망치는 놈들만 신경 쓰라고.
나와 홍야가 거리를 좁혀가자 반일소가 곽현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가 믿을 건 이제 곽현뿐일 테니까.
“곽 장로님! 어서···.”
하지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쉭! 푸욱!
화살처럼 쏘아진 검 한 자루가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내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검이었다. 두 자루의 검 중 하나였다. 그는 원통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다가 그대로 허물어졌다.
그 사이에 홍야가 무인들 곁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난 태산파의 제자들을 제외한, 이십여 명의 무인들이 각자 병장기를 꺼내 들었으나.
“크악!”
“컥!”
“치, 침착해라! 중앙으로 몰아 한꺼번에 덤벼들···아악!”
놈들은 인극고수인 홍야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는 양 떼 속으로 뛰어든 이리처럼 놈들 사이를 누비며 검을 휘둘렀다.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난무했다.
뒤쪽에서 참상이 벌어지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곽현은 오로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
곽현은 결국 검을 뽑았다. 깨달은 것이다. 무슨 말을 해도 내 살기를 피해 가지 못한다는 것을.
“만금상단뿐만 아니라 태산파의 정황까지 파악하고 있을 줄은···. 산서에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 했군.”
“아쉬워하지 마. 나머지도 뒤따라 보내줄 테니까.”
내가 장담한다는 듯 말하자 곽현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도 착각은 마시오. 만금상단과 태산파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요.”
“알아. 내가 말한 나머지엔 그 빙산 자체도 포함이야.”
“광오하군. 그대 실력이 나를 압도할지라도 고작 그 정도로···.”
곽현이 말을 하다 말고 기겁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터엉!
“큭!”
내가 기습적으로 뽑아 내지른 검을 가까스로 막아낸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잔뜩 긴장한 모양새였다.
나는 픽 웃었다.
“빈틈이 보여서 나도 모르게 그만. 다시 말해봐. 내 실력이 어떻다고?”
“...”
곽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집중을 잃는 순간 목이 달아날 테니. 하지만 오판이었다. 집중한다고 해도 목은 달아날 것이다.
나는 내공을 끌어올리며 괘월선보의 행로를 밟았다. 괘월봉에서 육성까지 수련해둔 보법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곽현의 뒤로 돌아들어 갔다. 그때까지도 놈은 내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잔상이었다.
괘월선보를 통해 발휘된 이형환위. 전생의 내가 펼쳤다고 해도 믿을 만큼 완연한 수준이었고 나는 그대로 검을 그었다.
촤악!
검날이 목을 베어가는 순간 곽현은 그 감촉에만 의지해 목을 비틀어 검을 피해냈다. 그래도 상처는 꽤 깊어서 목을 부여잡은 손 위로 핏물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형환위라고? 이게 무슨···.”
내 신형을 쫓아 시선을 돌렸던 곽현은 또다시 내가 아닌 내 잔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육성에 도달한 괘월선보는 이형환위를 연달아 펼칠 수 있다. 이건 전생의 나라도 불가능한 한 수였다.
더욱이 곽현으로서는 예상하지도 못할 한 수였고.
푸욱!
이어진 내 검이 놈의 가슴을 관통했다.
“커억!”
놈은 자기 가슴을 뚫고 나온 검을 내려다보다가 피를 토했다. 검을 뽑자, 놈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털썩 무릎을 꿇었다. 부들거리던 놈은 고개만 틀어 나를 올려다봤다.
“대체··· 누구···?”
죽는 마당에도 그게 궁금했던지 놈은 멀어져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입을 물어뜯고 있었다. 검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했으니 억울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살려두기로 한 태산파의 제자들에게 내 검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괘월선보만으로 빈틈을 만들어냈다.
만약 괘월선보를 얻지 못했다면 하릴없이 천일백야검법을 발휘해야 했을 것이다. 그만큼 곽현은 강했고 내게는 다행인 부분이었다.
살려두겠다곤 했지만, 태산파의 제자들을 아직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으니까. 믿을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이지.
서-걱!
나는 나를 올려다보는 곽현의 목을 그대로 베어버린 뒤 주변을 살폈다. 홍야가 이제는 열 명으로 줄어든 무인들을 도륙하고 있었고 그중 도망치려는 이들은 이자청과 백의검대원들이 처리했다.
저쪽은 금방 정리될 것 같고.
다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입을 쩍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장년인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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