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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인 환생했다-37화 (37/150)

4장 출도[2]

4장 출도[2]

“음···.”

장년인이 침음을 삼켰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태산파의 일대제자 신분임에도 사문의 장로가 죽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는 자책감. 반평생을 따르고 모시던 그 장로가 사문을 배신한 인물이라는 울분. 정체 모를 배후세력을 향한 위구심.

하지만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옥현검로 곽현이라는 고수가 손도 써보지 못하고 맥없이 당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내 기세에 압도되어 있었다.

“혼란스럽나?”

내가 묻자, 장년인은 대답 대신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폈다.

널브러져 있는 시체와 잘려나간 신체들. 바닥을 흥건히 적셔가는 핏물과 그 위에 어엿이 서 있는 백의문 사람들. 구석에 처박혀 벌벌 떨고 있는 태산파의 이대제자들.

자칫 저 참상 속에 자신들까지 포함되었을 수도 있었단 생각을 했는지 장년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살려줘서 고맙소. 저 아이들도.”

그는 한차례 고개를 숙인 뒤 이대제자들을 곁으로 불러들였다. 나는 총 여섯 명의 태산파 제자들을 쓱 훑어봤다.

“당신들은 썩은 가지가 아니길 바라지.”

진심이었다. 일대제자와 이대제자는 문파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들이었다. 더군다나 평범한 문파도 아니고 정파의 다섯 기둥이라 불리는 정파오주이자 천하오주 중 하나인 태산파.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도 오래 버티지 못할 테고 순식간에 천장이 내려앉을 수밖에 없다. 배후세력이 노리는 게 그 천장이라면, 놈들의 야심은 천하를 향해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미친놈들이네.’

나도 모르게 속으로 그 말이 튀어나왔다. 욕이자 감탄이었다.

정마대전이 끝난 직후의 빈틈을 정확히 노렸다. 승리했다곤 하지만 정파세력과 정천맹은 큰 피해를 봤고 곳곳의 구멍을 채우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급급했던 만큼 강호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배후세력이 파고들 여지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을 터.

예상보다 괴물의 몸집이 큰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장년인이 포권지례(抱券之禮)를 취했다.

“소인은 태산파의 일대제자, 담자명(譚自明)이라 하오. 보잘것없는 이름이나, 그 이름을 걸고 장담하겠소. 소인을 포함한 이곳에 있는 제자들은 여전히 태산이고, 앞으로도 태산일 것이오. 만약 이 말이 거짓이라면 스스로 목을 베어 참회하겠소이다.”

담자명의 진중한 어조에 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태산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고지식함이었다.

과거에도 그들은 대쪽같은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태산파의 장문인인 동악검선은 그래도 나름 부드러운 면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하긴, 천하십대고수(天下十大高手)의 일인이었던 그다. 태산이 담기엔 큰 그릇이었고 그만큼 올곧으면서도 자유분방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을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내 기색을 읽었는지 담자명이 물었다.

“백의문주께서는 저희 장문인과 어떤 관계시오?”

“동악검선과?”

“그렇소. 인연이 있으신 것처럼 보여서.”

관계라.

“종종 술자리를 가지며 무를 논했던 사이?”

전생에서 이뤄진 관계긴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예? 장문인과 술을?”

내 말에 담자명과 이대제자들이 깜짝 놀랐다. 그 정도의 친분일 줄은 예상도 못 했다는 듯.

“안 믿기나?”

내가 웃자 담자명이 슬쩍 곽현의 시체를 바라봤다.

“좀 놀라긴 했지만, 문주의 실력이라면··· 믿겠소.”

말을 하는 담자명의 태도가 조심스러워졌다. 장문인과 술을 나눈 사이라면 일대제자의 신분으로서는 공경해야 하는 지위라는 듯.

나는 그의 태도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그가 알고 있을 태산파의 정황과 동악검선의 상태가 궁금했다.

여기서 이야기를 나누긴 좀 그렇고.

“일단 백의문으로 함께 가지. 듣고 싶은 얘기가 있으니까. 그쪽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내 제안에 담자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

백의문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홍야와 담자명을 이끌고 창고로 향했다. 홍야가 납치해온 만금상단의 첫째 공자 반세운이 그곳에 갇혀 있을 테니까.

안으로 들어서니 초췌한 몰골의 사내 하나가 사지가 포박된 채 널브러져 있었다.

“죽은 거 아니야?”

“그럴 리 없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홍야가 내심 당황하는 게 보였다. 그만큼 반세운의 상태는 처참했다.

담자명은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이 상황 자체를 거북해하고 있었다. 고지식함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성정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태겠지. 물론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나는 의식이 없는 반세운에게 다가가 놈의 몸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기운을 북돋아 주자 놈의 안색에 미약한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으윽.”

떨리는 눈꺼풀 사이로 시야를 되찾은 그는 나와 홍야를 발견하고는 눈물, 콧물을 쏟아냈다.

“사, 살려주세요. 아는 건 전부 다 말씀드렸잖아요. 전부 놈들이 시킨 일입니다. 아버지와 저는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요.”

나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놈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래서. 너는 죄가 없으니 살려달라?”

“그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겠지. 하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놈이 눈을 빛냈다.

“알고 있는 걸 전부 털어놓은 게 맞아? 좀 더 머리를 굴려봐. 놈들에 대해서. 혹은 태산파에 관해서. 아무거라도 좋으니까. 혹시 알아? 내 마음이 바뀔지.”

희망을 슬쩍 던져주자 반세곤이 기억을 쥐어 짜내기 시작했다.

“놈들에 관해선 정말 그게 전부입니다. 위에 누가 있는지 놈들의 이름이 뭔지 아무것도 몰라요. 명령을 내릴 땐 항상 정체를 가린 인물이 은밀하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태산파는···.”

태산파의 이름이 나오자 담자명이 움찔하며 귀를 기울였다.

“옥현검로 곽현. 그자와··· 아, 재경당주도 있습니다. 그 노인네가 저희 상단에서 뜯어간 돈만 해도···. 더 있긴 할 텐데 제가 아는 건 그 두 사람이 전붑니다. 진짜예요.”

재경당주? 나는 모르지만, 담자명은 알고 있을 거란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경당주가 누구지?”

내 말에 담자명이 분을 삼키며 답했다.

“본문의 재정을 담당하는 장로 중 한 분이오.”

“그렇군. 정체가 밝혀진 새끼만 해도 벌써 두 명이네?”

“어찌 이런 일이···.”

담자명이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글로 읽었고 이제는 귀로 들었다. 남은 건 태산으로 돌아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일뿐이었다.

솟아오르는 격분에 몸을 떠는 담자명을 뒤로하고 나는 턱짓으로 반세곤을 가리키며 홍야에게 말했다.

“저놈은 적당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풀어줘.”

그 말에 반세곤은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안고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놈이 만약 나와 홍야의 표정을 봤다면 미소 따윈 짓지 못했을 텐데. 애석하게도 나와 홍야는 등을 돌린 채였다.

“큭큭, 그렇게 하겠네.”

홍야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씹어 삼키며 비틀거리는 반세곤을 이끌고 창고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둘만 남게 되자 담자명이 의외라는 듯 나를 바라봤다.

“저자를 살려 보낼 줄 몰랐소.”

“왜? 이 자리에서 그냥 죽일 걸 그랬나?”

“아, 아니오. 단지 문주님의 아량에 감복했을 뿐이외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를 위한 선의의 거짓이 제대로 먹혀든 것 같았다. 창고를 더럽힐 수도 없었고.

“아무튼. 내가 알려줄 수 있는 진실은 현재로선 이게 전부야.”

“이걸로도 충분하오. 감히 소인이 태산을 대표할 순 없으나, 분명 태산은 문주께 큰 은혜를 입었소.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바요.”

“이제 어쩔 생각이지?”

“솔직한 심정으론 아직 모르겠소. 재경당주까지 배신한 마당에 이젠 누굴 믿고 누굴 믿지 말아야 할지.”

“장문인의 빈자리는 누가 대신하고 있는데?”

“소인의 스승이오. 강호에선 스승님을 태산검존(泰山劍尊)이라고···.”

태산검존. 누군지 알고 있다. 동악검선의 뒤를 이어 태산제일검의 자리를 물려받을 인물이라고 명성이 자자한 자였다.

문제는.

“장문인 대리를 맡긴 했지만, 스승님께선 태산에 계시지 않소. 어디에 계시는지도 모르고. 원래에도 스승님은 수련을 위해 문파를 떠나계시는 시간이 더 많은 분인지라.”

담자명의 말대로 그는 태산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는 자였다. 오로지 검과 수련에만 미쳐 살아서 태산검귀라 불리기도 했다.

결국, 태산파는 현재 동악검선과 태산검존을 제외한 나머지 장로들이 이끌어가는 실정이었다.

“방법은 하나뿐이겠네.”

“그렇소.”

담자명은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병상에 누워있다는 동악검선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길 바랄 수밖에.

“하지만 장문인을 치료하기 위해 수많은 의원이 다녀갔소. 그리고 아무도 원인과 치료할 방법을 밝혀내지 못했지. 문주께 말씀드리지 못한 것도 알고 있는 게 없어서였소. 물론 지금은 원인을 깨닫게 됐지만, 그 방법은 여전히···.”

“언제부터였지?”

“정마대전이 끝나고 장문인께서 돌아오신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쓰러지셨소.”

그때 이미 배후세력 놈들은 태산파를 장악하거나 무너트리기 위해 수를 쓴 것인가.

“문주께서 더 궁금한 게 없으시다면 소인은 이만 태산으로 돌아가야겠소. 은혜에 대한 보답은 훗날 소인이 꼭 갚겠소이다.”

담자명은 야심한 시각인 것도 개의치 않고 그날 바로 이대제자들을 데리고 떠나갔다.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겠다는 결의와 함께.

나는 순순히 그를 보내주었다.

담자명이라면 태산의 뿌리를 위협하는 흉계를 걷어내진 못하더라도 버텨낼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태산으로 향할 그때까지는.

*

담자명이 돌아간 다음 날에 나는 가문으로 돌아왔다. 수련을 핑계로 꽤 오래 집을 비워서인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근심이 많았다며 걱정이 가득 담긴 쓴소리를 해왔다.

이후 다시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산서에 큰 변화가 생겼다.

첫 번째로는 산서 제일 상단이었던 만금상단. 반씨 일가의 죽음과 함께 놈들의 야욕이 산서 전역에 밝혀지면서 만금상단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다음은 산서 상인연합회. 다른 명칭으로는 성화상회(聖化商會)라 불리는 상인들을 위한 세력이 종승재의 주도하에 결성됐다. 만금상단의 야욕을 저지한 인물이 종승재였기에 산서의 모든 상단이 그를 지지했다.

그 덕에 종승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유씨세가와 백의문. 두 가문과 문파의 명성도 자연스레 높아졌다.

더욱이 자세히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백의문주가 태산파의 장로를 꺾었다는 소문이 은근히 퍼져나가면서 산서의 강호인들이 백의문주를 산서제일검으로 추앙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는 내 내공이 정확히 일갑자 반을 넘어 백 년 치에 도달했다.

천일백야검법의 전반부 삼초식. 중반부 삼초식을 넘어 후반부의 사초식을 넘보는 기반을 다지게 된 것이다. 더불어 괘월선보는 칠성까지 익혀두었다.

한 달 동안 집에만 틀어박혀 수련에 매진한 결과였다.

그사이 예상과 달리 배후세력은 산서에 손길을 뻗어오지 않았다. 내가 곧장 태산으로 가지 않고 한 달이란 시간을 보낸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이 정도면 안심하고 산서를 떠나있어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홍야와 이자청을 비롯한 백의문은 산서에 남겨둘 생각이었다. 거기엔 백의문주도 포함이다.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더불어 백의문의 명성이 높아진 마당에 배후세력은 서서히 백의문주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했을 테니.

유진휘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백의문주로 움직였다면, 지금은 백의문주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유진휘로서 움직여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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