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출도[3]
4장 출도[3]
방 내부는 어두웠다. 휘영청 밝은 달빛마저 피해 가는 어둠이었다. 탁자에 앉아있는 인영은 어둠 따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보고서를 읽어내려갔다.
“성화상회와 백의문이라. 산서 쪽은 당분간 배제해야겠군.”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으나 허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백의문주와 성화상회주. 두 사람만 처리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상인 놈이야 언제든 죽일 수 있지. 한데 백의문주라는 인물이 마음에 걸려. 만검노수와 옥현검로조차 감당하지 못한 자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어.”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인영이 고개를 저었다.
“널 보낼 순 없지. 태산이 먼저다.”
“하지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어차피 자금은 충분하잖아?”
“그렇습니다.”
“그래. 산서의 상권 따위는 급한 게 아니야.”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 인영이 상념에 잠겼다가 깨어났다.
“일은 얼마나 진행됐지?”
“아직은 조금 시간이 걸릴 듯싶습니다. 아무래도 동악검선인지라, 진척이 더딥니다.”
“더뎌도 상관없으니까 성공하는 데만 집중해야 할 시기다. 재료는 모두 준비됐으니 깨지지 않는 그릇이 필요해.”
“명심하겠습니다.”
“련주께서도 관심을 보이고 계신다. 입지를 다질 기회야. 우리 금월보(金月堡)가···.”
빛 한점 없는 방안에서 인영의 두 눈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
산서를 떠나있어도 되겠다고 마음먹은 시기에 맞춰 종승재가 방문했다.
성화상단주에서 산서의 상단을 이끄는 회주가 되었음에도 그는 이전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호위무사 몇 명과 종화설을 대동한 조촐한 인원이었다.
“자네 왔는가.”
“하하. 오랜만일세.”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를 스스럼없이 맞이했다. 이번 방문은 성화상회의 결성을 기념하고 축하하고자 하는 취지였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성화상회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회주로 임명되셨다는 얘기도요. 감축드립니다.”
정중히 인사를 올리자 종승재가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고맙구나, 진휘야.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이끌어보마. 걱정하지 말거라.”
그의 목소리에서 고마움과 결의가 묻어나왔다. 나에게 하는 말이자 백의문주에게 전하는 말이어서 나는 마주 웃어 보였다.
이후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객청으로 이동했다. 작은 연회가 열렸고, 어머니가 며칠 동안 직접 준비한 식사와 종승재가 가져온 값비싼 술병들이 빠르게 동났다.
해가 질 무렵엔 아버지와 종승재 그리고 나까지. 세 사람만 자리에 남아있었다. 때가 됐다 싶어 나는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강호행을 떠날까 합니다.”
“강호행?”
내 말에 아버지가 의외라는 듯 눈을 빛냈다. 환생한 이후 수련을 위해 집을 비워둔 적은 있었어도 산서 밖을 떠나본 적이 없는 나였다.
내가 환생하기 전의 유진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정마대전이 일어나고, 소룡단에 입단해 가문을 나섰으나 얼마 못 가 소룡단이 전멸하는 참상을 겪었다. 강호행이라고는 할 수 없는 전쟁의 폐해였다. 유진휘의 강호는 거기서 끝이었다.
아버지로선 그런 아들의 강호가 다시 시작될 거라는 생각에 살짝 들떠있는 표정이었다. 걱정이 되기도 하겠지만 기대가 더 컸던 것 같다.
“어디로 가려고?”
나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하남의 정천맹도 들러보고 이후엔 산동의 태산에 가보려고요. 동네 뒷산의 경치만 해도 절경인데 오악이라는 태산은 어떤지 궁금해서.”
“정천맹을? 괜찮은 것이냐?”
정천맹이란 말에 아버지가 떠올리기 싫은 과거를 염두에 뒀다. 아들이 무너져버린 계기가 그곳에서 비롯됐으니까.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 지난 일입니다. 이겨낸 일이기도 하고요. 보셔서 아시잖아요.”
“그렇지.”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그랬지만 근래에 들어 아버지는 나를 더욱 전적으로 믿어주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금검대주 위사평을 비롯한 금검대원들이 나를 크게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왕삼과의 비무 사건 이후 금검대의 무위와 분위기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으니까.
내가 보기에도 그들은 정말 강해졌다. 특히나 위사평은 금검대의 무공이 지닌 단점을 완벽히 보완했고 다음 경지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알게 모르게 그는 내게 존경심을 표했고 아버지도 어느 정도 그걸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때, 종승재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거악부 같은 악인을 쓰러트릴 정도로 강한 녀석이니 슬슬 세상에 내놓을 때도 되지 않았겠나? 저번에는 가문의 검법까지 대성했다면서?”
자식 칭찬에 기뻐하지 않을 부모는 없었다. 아버지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대성뿐인가? 진휘 덕에 운류검법이 더욱 완벽해졌네. 그 때문에 나도 늘그막에 가문 일은 내팽개치고 수련에만 몰두하고 있지.”
“하하. 어쩐지 자네의 기도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했더니.”
애초에 설득까진 필요 없었지만, 기분 좋게 가문을 떠날 생각으로 종승재를 부른 것인데 그는 제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그렇게 내 강호행이 결정됐다.
*
아버지와 종승재를 뒤로하고 객청에서 먼저 빠져나왔다. 내일 바로 떠날 생각이었고 그 채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채비라고 해봐야 옷가지 몇 벌과 백의문에서 가져온 은자 및 전표 정도가 다였지만.
성화상회에서 매달 후원을 약속했고, 언예령의 의방에서 수익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예산까지 합하면 백의문은 중소문파치곤 꽤 부유한 측에 속했다.
공손량에겐 돈을 아끼지 말고 문파를 키우는 데만 집중하라고 말해두었다.
백의검대원들의 숫자를 늘리고 홍야와 이자청으로 하여금 그들의 실력을 키워 일차적으로 사십 명의 백의검대를 조직하는 게 목표였다. 최소 일류 이상의 무위를 지닌 검대.
훗날 몸집이 얼만지 모를 배후세력에 대항할 때를 대비한 세력이기도 했다. 몸집의 크기는 차차 확인해봐야지.
여러 생각을 하며 내 건물로 걸어가는 도중이었다. 내원의 연못가 쪽에 종화설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모른척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요즘 바쁘게 지낸다며?”
종화설의 시선을 따라 잉어들이 헤엄치는 연못 안쪽을 바라봤다. 그녀 또한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나야 뭐. 아버지가 바쁘시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종승재가 상회의 일을 맡게 되면서 성화상단의 일 대부분을 종화설에게 인계했다고 들었다.
방년의 나이에다 여식이어서 불안해하는 시선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라면 종승재만큼이나 상단을 잘 이끌 거라 믿었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우리 가문은 물론이고 백의문에게도 망설이지 말고 도와달라고 요청해. 다들 기꺼이 나서줄 거야.”
“백의문?”
“그래. 이번에 너를 통해서 성화상단과 인연을 맺게 됐다며?”
“응. 백의문주님께서 우리 상단을 좋게 봐주셔서 가능했어.”
“산서 제일 상단으로 성장할 거란 걸 알았겠지. 산서제일검과 산서 제일 상단이라니, 무서울 게 없겠군.”
내가 피식 웃자 종화설도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희미했지만 달빛마저 홀린 듯 그녀의 주변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그녀가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왜?”
내가 묻자, 그녀의 시선이 이번엔 내 허리춤의 청로검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청로검의 손잡이 끝에 달린 청색 수실이었다.
“그거 기억나?”
“이 수실?”
기억날 리가. 청로검은 과거에 유진휘가 사용하던 검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유씨세가의 소가주임을 증명하는.
그만큼 나름 비싸 보이는 수실이긴 한데 그것 외에 별다른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종화설은 그 수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소룡단의 단원으로서 산서를 떠나던 날. 내가 달아준 수실이야.”
“아. 그랬나?”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환생한 이후 왕삼을 통해 유진휘의 삶을 공부하긴 했다. 하지만 이런 세세한 사연까진 듣지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도 같네.”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어색한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했다.
“기억 못 하는 걸 탓하려던 건 아니야.”
“그럼 다행이고.”
“다만 우리 상단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 백의문주에게 직접.”
“...”
백의문주로서 활동할 땐 정체를 숨기기 위해 꽤 심혈을 기울였다. 가면을 쓰고. 내공을 섞어 목소리를 변조하고. 청로검도 물론 천으로 둘둘 감아 형체를 가렸다.
그랬는데 수실까진 신경을 쓰지 못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종화설이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고 해도 문제가 될 건 없었기에 나는 금방 덤덤해졌다.
“별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어.”
“응. 알아. 아버지에게 사정을 전해 들었어.”
“입이 무거우신 분인 줄 알았는데.”
내가 종승재가 있을 객청 쪽 방향을 슬쩍 흘기자 종화설이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먼저 알아차리고 난 뒤에 아버지에게 다 알고 있다고 따지듯이 물었어. 워낙 솔직하신 분이라···. 아무튼 고마워.”
“고마우면 백의문의 힘 좀 자주 빌려다 써. 실전경험도 겪고 돈도 벌고. 백의문에게도 도움 되는 일이니까. 산적 놈들 정도는 손쉽게 때려잡을 수 있는 애들이야.”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런 일이라면 자주 도움을 요청할게. 그리고··· 조심히 다녀와.”
내가 강호행을 떠난다는 것도 종승재가 말해줬나 싶다.
“그래.”
내 대답을 끝으로 종화설은 객청으로 향했다. 나도 다시 내 거처로 이동했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둥 뒤에 숨어있던 왕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하냐?”
녀석은 황급히 눈을 돌렸다.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정말이에요, 도련님.”
*
다음날 새벽녘에 나는 가문을 나섰다.
목적지는 정천맹의 본단이 있는 하남. 어차피 하남을 지나쳐 태산이 있는 산동으로 진입할 수 있으니 말 그대로 들러보는 것뿐이다.
하남에서 배후세력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될 수도 있고, 기존의 천영검대원들과 소이겸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알아볼 요량이었다.
그런 내 옆에는 왕삼이 함께였다.
연활팔식을 오성까지 익히면 앞으로 어딜 가든 내 호위무사로서 대동하겠다고 약조했었다. 그리고 녀석은 놀랄 정도로 빠른 성취를 보였다. 오성을 넘어 육성을 앞두고 있으니.
“후. 떨립니다, 도련님.”
“이번엔 왜? 강호초출도 아니잖아?”
“그건 아니지만, 산서 밖으로 나가보는 건 처음이잖아요. 게다가 정천맹이라니. 멀리서 봐도 웅장할 정도로 거대하다고 들었는데. 정말일까요?”
정말이다.
정천맹의 거대한 규모는 하나의 도시와 버금갔다. 수많은 사람이 상주하고 있고 수많은 무인이 오고 가는 곳이기도 했다.
“현 강호의 본체라 할 수 있는 곳이니 그렇겠지?”
“제가 그런 정천맹에 가보게 된다니.”
왕삼은 감정이 북받친다는 듯 눈을 빛냈다. 녀석만큼은 아니겠지만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생의 내 마지막을 함께 했던 곳이었으니까. 동시에 천영검대원들과 소이겸을 다시 보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끓었다.
그렇게 며칠을 빠르게 내달려 하남에 도착했다. 이어 본단에서 가장 가까운 객잔에 방을 잡았다.
창가로 눈에 익은 정천맹 외부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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