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동행[1]
5장 동행[1]
“이야. 저게 정천맹이군요.”
왕삼이 창가 너머로 정천맹의 웅장한 규모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관광객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고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정천맹은 강호의 중심인 동시에 하나의 명소기도 하니까. 이 객잔은 그런 정천맹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 늘 수많은 인파로 붐볐다.
“경비를 서는 무인들만 수십 명이네요. 정문을 지키는 자들도 다들 기세가 예사롭지 않고요.”
왕삼은 높은 담과 망루, 거대한 정문을 지키는 무인들을 눈에 담았다.
“자호단의 무인들이다.”
“자호단이요?”
“그래. 정천맹의 입구와 경비를 책임지는 무력 집단이지.”
내 설명에 왕삼은 공경심 어린 눈빛으로 맹의 입구를 바라봤다.
“대단한 분들이시네요.”
“대단해?”
“네. 저 거대한 정천맹의 입구를 수호하시는 분들이라는 거잖아요? 그만큼 중요한 직책이고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이렇게 멀리서 봐도 다들 자부심을 품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게 느껴져요.”
그 말에 나도 시선을 따라 자호단의 무인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미동도 없이 사방을 경계 중인 자들. 입구를 지키며 방문자들의 신분과 목적을 밝히고 기록하는 자들. 말 그대로 철통같은 경계였고 절도 있는 태도였다.
홍야에게 기존의 천영검대원 중 몇 명이 자호단으로 배치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었다.
막상 눈으로 보고 있으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의도는 없었어도 내심 자호단을 경시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게. 다들 대단하네.”
“다들 월봉도 엄청 높으시겠죠?”
“너보다 몇 배는 높을걸.”
“헉!”
몇 배라고는 했지만,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자호단은 정천맹 산하의 정규 무력 단체인 만큼 입단 기준도 높고 경쟁도 상당하다.
깜짝 놀란 왕삼은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왜? 입맹하고 싶어?”
“에이. 저 같은 게 어떻게 들어가요.”
“지금의 너라면 말단 정도는 가능할 거야.”
“제가 그렇게 강해졌나요?”
왕삼이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자신을 스스로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씩 웃어 보인다.
“가능하다고 해도 저는 도련님의 곁을 지켜야죠. 강해진 것도 전부 도련님 덕분인데요.”
“맹에서 네가 받는 월봉의 열 배를 준다고 해도?”
“그건 고민을 좀 해봐야···.”
“역시. 우리의 의리는 고작 그 정도로 얄팍한 관계였구나.”
“농입니다!”
“괜찮아. 떠나고 싶다면 언제든 떠나도 좋다. 우리 가문에서 주는 월봉으로는 네 마음을 충족시킬 수 없으니, 아버지도 이해하실 거야.”
“앗. 행여라도 가주님께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진짜 아니라니까요!”
왕삼은 울상을, 나는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서서 일 층으로 내려왔다. 녀석 덕분에 한층 마음이 편해졌다.
기존의 천영검대원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던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라는 확신도 섰다.
왕삼 말대로 자호단 또한 충분히 자긍심을 품을만한 지위였다. 그 자리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알아서 떠나가면 될 일이었다. 당장 내가 나서서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고.
일 층에서 나는 왕삼과 함께 식사를 주문했다. 구석 자리에 앉아서 배를 채우며 객잔 손님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내공을 끌어올려 청각에 집중하자 모든 이야기를 귀에 담을 수 있었다.
새로운 맹주를 향한 존경과 기대감. 새로운 고수와 인사들의 출현. 그 외에 여러 가지 소문과 일상적인 얘기들.
주제는 달랐지만 모두 평화로움을 기반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딱히 내가 기대하던 정보는 듣지 못했다. 정보상을 통해 배후세력을 조사해볼까도 싶었지만, 놈들의 은밀함을 생각하면 별다른 수확은 없을 것 같았다.
정천맹에 놈들의 입김이 닿아있는 건 확실한데, 아직은 암암리에 움직이고 있는 듯싶었다. 맹 내부에서 본격적으로 조사하는 게 아닌 이상 하남에서 놈들의 흔적을 찾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정천맹 안으로 잠입해 들어갈 수도 없었다. 지금 실력이면 외원까진 어떻게 숨어들어 간다고 쳐도 그 이상은 무리였으니까. 놈들의 꼬리를 밟는 건 태산에서 시작하면 된다.
나는 배후세력에 대한 건 일단 제쳐두기로 했다. 해서 식사를 마치고 객잔을 나섰다.
왕삼과 함께 여느 관광객들처럼 저잣거리를 돌아다녔고 좀 더 가까이서 정천맹을 구경했다. 별다른 목적 없이는 맹 안으로 출입할 수 없었고, 관광객들에게는 한정된 장소만 제공됐다.
그렇게 군중 속에 섞여 있던 내가 눈을 빛냈다.
정천맹의 입구는 자호단의 무인들 스무 명이 교대로 경비를 서고 방문객들을 관리한다. 마침 교대 시간이 되었는지 근무 인원이 교체됐는데 그중에 익숙한 얼굴이 섞여 있었다.
홍야에게 들은 그대로였다.
전생의 나와 함께 천영검대에 속해있던 녀석들. 그중 네 명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순간 입술이 달싹거렸다. 나도 모르게 놈들의 이름을 외칠 뻔했다. 과거에 수도 없이 불러봤던 이름들을.
나는 반쯤 벌어진 입을 다물고 덤덤히 녀석들을 지켜봤다. 수백 명의 마교인들을 베어 넘겼던 천영검대원의 모습을 더는 찾아볼 수 없는 녀석들이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내고 있었다.
속내를 정확히는 알 수 없겠지만 녀석들의 표정에서 불만은 드러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자호단원들과 마찬가지로 긍지가 느껴졌다.
하긴, 과거의 나와 천영검대는 검신 백도천을 따르던 이들이다. 현 맹주가 아니라. 어쩌면 녀석들도 천영검대의 자리에 더는 미련이 없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나대로 녀석들은 녀석들대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소이겸을 포함한 나머지 녀석들도 마찬가지겠지.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지내고 있다는 걸 확인했고 잘 지내고 있다는 건 정천맹에는 아직 큰 변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해서 나는 덤덤히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가자.”
“네.”
나와 왕삼은 군중 속에서 빠져나와 객잔으로 돌아왔다. 오늘 하루는 푹 쉬고 내일 곧장 태산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객잔에 도착해 객실이 있는 삼 층으로 올라가려 할 때였다.
“잠시만요!”
낯선 목소리가 나를 불러세웠다.
*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젊은 여인과 그녀의 무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볍게 술을 마시는 자리인 듯 보였는데 나로서는 전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내가 묵묵히 서 있자 여인이 다가와서 나를 유심히 살폈다. 그녀의 시선에서 반가움이 느껴졌다.
“저 기억 안 나세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잠시 왕삼을 돌아봤다. 녀석도 모른다는 얼굴이어서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 납니다.”
“그럴 리가. 소룡단에 계셨던 유 공자 아니세요?”
그 말에 나는 하릴없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다만 사연이 있어 그때의 일을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라.”
“아···. 이해해요. 그런 일을 겪으셨는데.”
내가 아닌 유진휘와, 그것도 소룡단 시절의 인연일 줄은 몰랐기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놀라기도 했다.
“소녀는 선우유란(鮮于裕蘭)이라고 합니다. 저는 아니어도 선우약가는 기억하시죠?”
선우약가라. 정마대전 당시 소룡단이 전멸을 감수하고 지켰던 세력이다. 선우약가의 사람이라니 대충 어떤 사연인지는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뒤에서 왕삼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사룡일화의 그 일화(一花)인 것 같은데요, 도련님.”
사룡일화(四龍一花).
천하의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다섯을 칭하는 별호였다.
나는 선우유란의 무리도 슬쩍 살폈다. 젊은 사내 두 명과 사십 대의 중년인이었는데 그들 모두 기세가 남달랐다. 더욱이, 중년인과 두 사내 중 하나의 행색이 눈에 익었다.
태산파의 일대제자였던 담자명과 같은 무복을 입고 있었다. 태산으로 가는 길에 태산파의 제자를 보게 될 줄이야.
그때 선우유란이 말을 이었다.
“본가가 소룡단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에요. 그날···.”
그녀는 머뭇거리며 내 표정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계속 말했다.
“유일한 생존자셨던 유 공자께서 본가의 치료를 받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셨잖아요. 본가의 어른들께서는 그럴 사정이 있었겠거니 여기며 행방을 쫓지 않았고요.”
“그때 일도 기억은 잘 안 나네요.”
“그렇군요. 그래도 이렇게 무사하신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니 기뻐요. 본가의 어른들도 이 소식을 들으면 정말 반가워하실 거예요.”
그녀는 진심으로 기꺼워하는 표정이었다. 선우약가를 대표해서 감사하다는 말과 기회가 되면 자신의 가문으로 꼭 초대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유진휘를 대신해서 그녀의 마음을 건네받았다. 마땅히 받을 대접을 내가 대신 받게 되니 아쉽기도 했다. 이 만남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당장 지금이라도 유 공자님을 초대하고 싶지만, 하필 제가 태산으로 가는 길이라···.”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빛냈다.
태산파의 제자들과 함께 있는 걸 보고 짐작은 했다. 게다가 선우약가는 당대 최고의 의가(醫家)였다.
태산으로 돌아갔던 담자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동악검선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었는데.
“담자명 대협이 부탁한 일입니까?”
내가 묻자, 선우유란이 깜짝 놀라는 게 보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저도 담 대협을 만나러 태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목적지가 같다는 말에 그녀가 활짝 웃으며 동행을 제안했다. 마침 태산파의 제자들에게 안내를 받는 참이라며. 거기에 자신과 같은 사룡일화의 후기지수 한 명이 함께라고 했다.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녀의 일행에 녹아들어 자연스럽게 태산파에 잠입할 수 있을 테니까.
*
선우유란이 그녀의 일행을 소개했다.
담해상(譚諧商)은 담자명의 사제로 일행의 책임자이자 같은 항렬인 태산파의 일대제자였다. 젊은 사내 중 하나는 밑에 항렬인 이대제자 임평(林平). 임평은 사룡일화는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후기지수였다.
그리고 임평과 같은 나이대에 강호에서 권룡(拳龍)이라 불린다는 사내가 하남장가의 둘째인 장진악(章振岳).
“산서 유씨세가의 유진휘라고 합니다.”
담담한 내 소개에 세 사람이 나를 응시했다. 담해상과 임평은 내가 담자명과 인연이 있다는 말에 의아해했다.
“담자명 대협께서 산서에 들리셨을 때 우연히 기회가 닿았습니다. 며칠 전에 작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서찰을 받아 태산으로 가던 길이었고요.”
“사형께서? 그런 말은 듣지 못했는데, 어떤 도움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의심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만.”
대충 지어낸 말이라 의심은 당연했다. 사연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여기서 이야기하기엔 조심스러운 부분이라서.”
말하는 중간에 슬쩍 선우유란을 쳐다봤다.
“같은 목적이지 않겠습니까?”
내 시선을 알아차린 담해상은 쉽게 수긍했다. 담해상이 수긍하니 이대제자인 임평도 그러려니 하며 나직이 인사해왔다.
두 사람과 적당히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좀 더 확실히 해둬야 하는 부분 아닙니까? 어물쩍 넘어가는 게 아니라요.”
권룡 장진악이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봤다.
나도 그를 마주 바라봤고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이 경계심보다는 불만과 시기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유 공자의 신분은 제가 보증할게요.”
선우유란의 그 한마디에 장진악의 안광이 더욱 깊어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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