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동행[3]
5장 동행[3]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비무네. 급박한 상황이 펼쳐지면 곧장 중단시키겠네. 승패 또한 내가 결정지을 것이고. 둘 다 이해했나?”
담해상이 나와 장진악을 바라보며 진중하게 경고했다. 둘이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장진악을 향한 것이었다.
최대한 장진악의 손속을 제한하기 위해서. 권룡이라는 천하제일의 후기지수와 시골구석 무가의 후계자.
누가 봐도 결과는 뻔한 대결이었다.
“이해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나와 장진악이 대답했고 담해상은 일정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공식적으로 날 두들겨 팰 수 있는 판이 깔리자 장진악의 입이 귀에 걸렸다.
“검을 뽑아라. 선공은 양보해주지.”
자연스럽게 인심까지 썼다. 나로서는 하등 필요 없는 인심이었다.
“검은 필요 없을 거 같은데.”
“무슨 소리야?”
“나도 권법에는 나름 조예가 깊어서.”
내 말에 장진악은 아예 배를 부여잡고 웃어 젖혔다. 감히 권룡이라 불리는 자신과 하남장가의 권법 앞에서 조예를 논하냐는 태도였다.
물론 권왕 앞이라면 이런 소릴 내뱉지 않았겠지. 하지만 용은커녕 뱀 새끼조차 되지 못하는 놈 따위야.
내가 지면을 박찼다.
콰직!
땅바닥에 발자국이 깊게 파일 정도의 진각이었다. 그만큼 빠른 속도로 장진악의 코앞까지 파고 들어간 내가 팔을 뻗었다.
“헛!”
장진악의 미소가 와락 구겨졌다. 동시에 뒤로 눕다시피 몸을 꺾었다. 내 주먹은 놈의 안면이 있던 자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그사이, 황급히 몸을 꺾은 탓에 바닥을 두어 번 구른 놈이 나를 노려봤다.
“무슨 짓이냐!”
느닷없는 기습에 당황한 얼굴이었다. 절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선공을 양보하겠다며? 비무는 이미 시작된 거 아니었나?”
“...”
“적을 앞에 두고 처웃고 계시지나 말던가.”
명백한 조롱이었지만, 사실을 기반으로 한 조롱이었기에 놈은 반박하지 못했다.
“후우.”
그래도 권룡은 권룡이라고 놈은 흥분하는 대신 빠르게 냉정함을 되찾았다. 더는 나를 얕보는 기세도 아니었다.
이어 놈이 내공을 끌어올리자 양 소매가 찢어질 듯 펄럭거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바위도 일권에 가루로 만들어버린다는 하남장가의 권법.
그 권법의 기수식을 취하는 모습에서 다시금 권왕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전생에 만났던 권왕은 권법을 펼칠 때마다 소매가 남아나질 않아서 아예 소매가 없는 무복을 입고 다녔었다. 한겨울에도 우락부락한 근육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장진악은 그런 권왕의 뒤를 착실히 쫓아가고 있는 듯싶었다. 물론 내가 보기엔 아직 한참 멀었지만.
“방심했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니 지금부턴 나도 최선을 다할 거야. 조심해라.”
놈은 한껏 진지한 표정과 함께 몸을 던졌다. 갈지(之)자 모양으로 쇄도하면서 시선을 교란했고 뒤이어 두 주먹이 순차적으로 뻗어 나왔다.
파바바박!
나는 차분하게 놈의 주먹을 하나하나 걷어냈다. 내공을 실어 쳐내고 있음에도 양팔이 저릿할 정도의 충격이었다.
그런 공격이 멈추지 않고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천왕칠십이격(天王七十二激).
단순히 일흔두 번의 주먹질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내공의 흐름에 따라 일권, 일권의 위력이 점차 빨라지고 증가하는 하남장가의 대표적인 가전무공 중 하나였다.
파훼법은 세 가지밖에 없었다.
첫 공격부터 아예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서서 피하거나 정면으로 막아내거나. 혹은 아예 깨부수거나.
실상 물러서는 건 기세를 내주는 거나 다름없어서 패착으로 가는 지름길이었고, 정면으로 막아내는 것도 점차 위력이 증가하는 칠십이격을 전부 막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무용지물이었다.
깨부수는 건 내가 검을 쥐고 있었다면 가능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으니 차치하고. 나는 하릴없이 두 번째 방법을 택했다.
파바바박!
장진악의 공격이 점차 거세졌다. 마치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두 주먹을 나는 연신 흘리고 퉁겨냈다.
칠십이격의 중반을 지나니 소나기가 태풍이 되어 내 전신을 휩쓸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장진악은 승기를 잡았다는 듯 눈을 빛냈고 비무를 지켜보던 담해상은 몸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공세에 버티지 못한 내 수비가 무너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생각보다 좀 더 많은 내공을 끌어다 쓰긴 했지만 나는 장진악의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어, 어떻게···.”
놈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자신이 펼친 천왕칠십이격을 정면으로 막아낸 상대는 처음이라는 듯.
그럴 테지. 만일 장진악이 홍야와 같은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면 이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처음부터 검을 뽑아 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놈은 높게 쳐줘도 이자청이나 마협문주보다 조금 더 강한 수준이었다.
“천왕칠십이격?”
“이 무공을 알아?”
“알지. 나도 비슷한 무공을 하나 알고 있으니까.”
나는 피식 웃으면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적당히 장진악의 자세를 흉내 내 놈의 곁으로 파고들었다.
“헉!”
놈이 깜짝 놀라 물러서려다가 멈칫하면서 양팔을 들어 올렸다.
내가 천왕칠십이격을 정면으로 막아냈듯이 자신도 내 공격을 정면에서 막아내겠다는 심보였다. 물러나는 건 자존심이 상할 테니까.
예상했던 부분이라 나는 마음 놓고 주먹을 뻗었다.
파바박!
내 공격이 장진악의 그것과 비슷한 형세로 놈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모양새는 비슷하겠지만, 딱히 무공이라고 칭할 것도 없었다.
나는 그저 내공을 실어서 두들겨 패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걸로도 충분했다.
퍽!
“억!”
퍼퍽!
“커억!”
팍!
“그, 그만···.”
장진악은 내 주먹을 열 번도 채 막아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구르면서 피하다가 구석에 몰려 복날의 개처럼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주먹을 쓰다가 놈이 바닥으로 쓰러졌을 땐 어쩔 수 없이 발로 지르밟았다.
퍽퍽!
“져, 졌다!”
퍽!
“컥! 내가 졌다니···.”
흥분한 나머지 놈의 말도 듣지 못하고 나는 계속 밟아댔다. 아니, 흥분해서 못 들은 척했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결국, 화들짝 놀라 달려온 담해상이 나를 끌어안듯이 붙잡아 만류했다.
“그, 그만하게!”
*
“권룡이라는 별호는 떼라.”
“예?”
“바닥을 구르는 게 꼭 지렁이 같더라. 네 별호는 앞으로 토룡(土龍)이다.”
“...”
“대답.”
“예.”
마부석에 앉아있는 장진악이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마차의 천장에 앉아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천맹이 있는 하남에서 태산이 있는 산동까지의 거리가 멀기도 한데다가 태산파는 태산 옥황봉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산행이 불가피했다.
나와 나머지 일행은 상관없었지만, 기본적인 무공밖에 익히지 않은 선우유란에게는 다소 힘겨운 행로여서 출발 전에 미리 마차를 구해놨다.
장진악은 기밀 유지라는 목적으로 마부에 낙점된 상황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객잔 안에서부터 담해상과 임평, 선우유란과 왕삼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정을 위한 식량을 갖추느라 뒤늦게 나타난 것이다.
왕삼과 임평이 짐과 식량을 마차에 싣는 사이에 선우유란은 마부석에 앉아있는 장진악을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라버니?”
“어? 왜? 뭐가?”
“거기서 뭐 하세요? 직접 마차를 몰게요?”
그녀의 물음에 장진악은 내 눈치를 보면서 대답했다.
“하하, 굳이 마부를 고용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마차가 그리 큰 편도 아니고. 손도 많이 남잖아.”
그의 말대로 마차는 딱히 크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으려는 조치였다. 선우약가의 호위무사들은 일정 거리에서 말을 타고 뒤쫓아오기로 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선우유란이 이번엔 장진악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장진악이 최대한 고개를 꺾고 숙이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지만, 의술에 도가 튼 그녀였다.
“얼굴은 왜 그래요? 그러고 보니 몸에도 상처가 있는데요?”
장진악은 내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했다. 최소한 선우유란에게만이라도 알리지 말아 달라며 나와 담해상에게 빌고 또 빌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건 어제···.”
거기까지 말했을 때 장진악이 나를 올려다보며 애원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야밤에 계단에서 굴렀답니다.”
대신 변명해주자 장진악이 황급히 부연했다.
“마, 맞다. 어제 잠결에 그만 발을 헛디뎠어.”
“오라버니 같은 고수가 그럴 때도 있나요?”
“술을 너무 마신 탓도 있고.”
“그러고 보니 과음하시긴 했죠. 어휴, 조심 좀 하시지.”
선우유란이 금창약 등을 건네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짓자 장진악은 언제 당황했냐는 듯 히죽거리고 있었다.
그 한심한 꼬락서니를 보며 혀를 차는 사이에 출발 준비가 끝났는지 담해상과 임평이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선우유란이 마지막이었고 왕삼은 선우약가의 호위무사들과 함께하겠다며 물러났다.
그렇게 예상치도 못한 만남이 동행으로 이어졌다.
*
빛 한점 용납하지 않는 금월보의 내부.
“보주님.”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탁자에 앉아있던 인영이 고개를 들어 어둠을 들여다봤다.
“선우약가?”
그는 보고를 받지 않았음에도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는지 먼저 물었다.
“예. 태산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누구야?”
“선우약가의 삼녀입니다.”
“셋째라. 사룡일화의 그 일화 말이지?”
“그렇습니다. 첫째나 둘째도 아니고 그녀가 움직일 줄은 몰랐습니다. 태산파와 딱히 접점도 없는 후기지수여서 미처···.”
실수를 인정하는 대답에 금월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는 듯.
“어린년이긴 하지만 의술에 대한 재능은 제 아비만큼 뛰어나다고 들었지. 그게 전부라고만 생각했고. 태산삼검 놈들이 급하긴 했나 보군.”
“어떻게 처리할까요?”
금월보주가 고심에 빠졌다가 반문했다.
“곁에 누가 있지?”
“사룡의 권룡과 태산삼검의 둘째입니다. 그 외에 떨거지 십여 명 정도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권룡과 태산삼검이라면 상당한 실력자라는 듯 금월보주의 고심이 길어졌다.
“그년이 무사히 태산을 오른다고 해도 지장은 없겠지만···.”
금월보주가 히죽 웃었다.
말한 대로 이미 계획의 성공이 눈앞이었다. 지금이라면 선우약가의 삼녀가 아니라 가주가 직접 온다고 해도 저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를 위해 지금까지 선우약가의 발을 묶어 놓은 것인데 갑자기 삼녀가 튀어나온 상황이었다. 혹시라도 조약돌에 걸려 넘어지는 상황은 방지해야 했다.
“처리해.”
“저희가 직접 나섭니까?”
“굳이?”
“그럼 적당한 곳을 물색해보겠습니다.”
“돈이 얼마나 들어도 상관없으니 확실한 곳이어야 해. 권룡과 태산삼검은 몰라도 그년은 확실히 죽일 수 있으면서 꼬리는 밟히지 않게.”
“...야막(夜幕)에 의뢰하면 될 것 같습니다.”
금월보주가 눈을 빛냈다.
“네가 막주로 있었다던?”
“오래전의 과거일 뿐입니다. 비싼 만큼 일 처리는 확실할 겁니다.”
“그렇게 해.”
“예.”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흑로(黑老)에겐 신중히 움직이라고 전해두고.”
“알겠습니다. 그럼.”
대답과 함께 허공에서 기척이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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