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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인 환생했다-42화 (42/150)

6장 태산[1]

6장 태산[1]

여정은 순조로웠다.

성도를 벗어나면서부터 매일같이 야영이 이어졌지만 다들 익숙하다는 듯 태연했다. 오히려 담해상이 나를 향해 의외라며 놀라고 있었다.

“소룡단 시절을 제외하면 강호행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그런 사람치고는 모든 일에 능숙하던데.”

능숙할 수밖에.

천영검대원을 거쳐 천영검대주까지. 정천맹에 있는 날보다 외부에 머무른 시간이 훨씬 많았다. 천하 각지를 돌아다녔고 오지 산골에서 잠드는 날이 대다수였다.

덕분에 야생에서 의식주를 확보하는 기술이 몸에 배 있었다.

지금도 육식을 위해 사냥해온 짐승들을 손질하는 중이었다. 육포 따위론 성에 차지 않아서 나선 거긴 한데 그렇다고 내 입에만 기름칠할 수는 없었기에 양이 꽤 많았다.

“왕삼아!”

“네, 도련님.”

내 부름에 왕삼이 후다닥 달려와 선우약가의 호위무사들을 위한 양을 받아 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흘렀을 때 녀석은 벌써 그들과 호형호제하는 관계를 맺었다. 같은 호위무사라는 동질감이 한몫했겠지.

“감사하오, 유 공자!”

“신경 써줘서 고맙습니다!”

그런 그들이 내게 감사를 표했고 나는 고개를 숙여 보이며 화답했다.

왕삼에게 떼어줘도 넉넉한 양이 남아있었다.

객잔에서 사 온 조미료로 양념까지 끝마친 고기를 모닥불 주변에 세워두자 노릇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와! 유 공자의 솜씨는 숙수라고 해도 믿겠어요. 정말 먹음직스러워요.”

선우유란이 눈을 빛냈고 담해상과 임평이 동의한다는 듯 군침을 삼켰다. 여태까지 고기라곤 건육이 전부였으니까.

장진악은 한옆에서 자신이 사냥해온 토끼 한 마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손질이라기보단 그냥 아작을 낸 수준이지만.

“진악아.”

“왜.”

“왜?”

“...왜요.”

“뻘짓하지 말고 이리로 와라.”

내 말에 장진악은 이제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덩어리를 내팽개치고 스리슬쩍 모닥불 앞에 자리 잡았다.

다들 말없이 기다리길 한참.

나는 잘 구워진 뒷다리 부분을 큼지막하게 뜯어서 담해상에게 건넸다.

“선배께서 먼저 드셔보시죠.”

“배가 아우성을 치고 있으니 사양하지 않겠네.”

태산의 초입 근처에 있는 마을까지 도착하려면 아직 며칠은 더 야영을 이어가야 했기에 피로감과 헛헛함이 가득한 일행들이었다.

그걸 달랠 수 있다는 생각에 담해상은 미소 가득한 얼굴로 고기를 베어 물었다.

“오. 이것 참 별미···.”

담해상은 감탄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가 식사를 시작하자마자 임평과 장진악이 배곯은 개처럼 구워진 고기를 향해 달려들었으니까. 선우유란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멧돼지 고기가 원래 이렇게 부드러웠나요?”

“그것보단 이게 더 놀랍습니다. 곰 고기는 원래 누린내가 심해 일반적으론 사냥해서 먹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누린내는커녕 단맛이 나요.”

선우유란과 임평이 각자 소감을 늘어놓으며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장진악은 아예 양손에 고기를 쥐고 우악스럽게 처먹고 있었다. 하남장가의 식성은 원래부터 유명했지.

내가 피식 웃으면서 노려보고 있자 장진악은 사레가 들려 헛기침을 하다가 내 눈치를 봤다.

“크흠.”

그러더니 고기의 새 부분을 하나 뜯어 나에게 가져왔다.

“드시죠, 형님.”

내가 자연스럽게 고기를 건네받았고 뒷사정을 모르는 선우유란과 임평은 의뭉스러운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나이로 보나 명성으로 보나 형님이란 소리는 내 입에서 나와야 하는 게 정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여정을 이어오는 동안 몇 번을 봤던 광경이기도 하고 그때마다 장진악이 눈에 불을 켜며 의문을 묵살시켰었다.

‘그냥 내가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으니 더는 묻지 말아라.’

듣자 하니 권룡은 강호에서도 때때로 괴짜 같은 고집을 부리는 걸로 유명하다고 했다. 덕분인지 선우유란과 임평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렇게 나를 포함해 다들 배부르게 식사를 마무리할 때쯤이었다.

담해상이 나에게 은밀한 눈짓을 보내왔다. 잠시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태산에 가까워지고 있는 만큼 슬슬 사정을 물어볼 때였다.

*

나는 담해상과 함께 일행에게서 멀어졌다. 한적한 장소에 도착하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담해상의 입이 열리길 기다리는 중이었고 그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말했다.

“장 후배가 자네를 깍듯이 모시더군.”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했으니 놈도 어쩔 수 없겠죠. 정당한 내기비무이기도 했고요.”

“그랬지.”

담해상이 짧게 웃다가 나를 응시했다. 눈빛을 보니 내 기세를 헤아려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철저히 기세를 숨긴 상태여서 그는 곧 그만두었다.

“솔직히 말해서 정당한 비무는 아니었지. 한쪽의 실력이 너무 높았으니까. 물론 그게 자네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네.”

“그러셨습니까?”

“내 짐작일 뿐이지만 자네는··· 적어도 나보다 무위가 높아.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 내 짐작이 맞는가?”

그의 어조는 진지했다. 해서 나도 정중히 대답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하, 역시나. 그래서 더 궁금해지더군. 사형께서 자네에게 무슨 도움을 청했는지 말이야.”

“담자명 대협께선···.”

무슨 말로 둘러댈까 싶다가 나는 그냥 적당히 솔직해지기로 했다.

“아무 도움도 요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말 그대로입니다. 태산파로 향하는 건 순전히 제 의지였습니다.”

속내를 털어놓자 담해상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동시에 내 의중이 더욱 궁금해졌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자네는 분명···.”

“예. 동악검선이 병상에 누워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럼 사형과는 어떤 관계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그전에 제가 먼저 한 가지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내가 반문했고 담해상은 그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께서는 어디까지 알고 계시죠?”

“어디까지?”

담해상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내 질문의 의미를 곱씹는 중이었다.

“자네는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뜻인가?”

“제대로인진 모르지만, 어느 정도 파악은 하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속내를 털어놔야 했었군. 어디까지냐고 물었나? 나는 사형께 모든 경위를 전해 들었네. 정체도 모를 조직이 장문인을, 나아가 태산파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까지. 곽 장로님, 아니 그 추악한 노인네가 죽은 이유도 그 조직과 결탁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네.”

“재경각주에 대해서도요?”

“그 사실까지 알고 있었나?”

당연했다. 담자명에게 그 사실을 제공해준 게 백의문주였을 때의 나니까.

“예.”

이쯤 되자 담해상이 나를 바라보는 눈길은 마치 망망대해 속에서 동지를 만난 심정과도 비슷했다.

사문의 장로들까지 배신한 마당에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나마 같은 스승을 둔 태산삼검이 똘똘 뭉쳐 흉계에 대항하고 있는 것 같았다.

“태산파를 노리는 그 배후조직이 산서에서도 일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산서에서도?”

“예. 산서는 다행히 무사했지만, 놈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태산파의 사정을 들었고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태산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작은 힘이라니? 자네의 실력이면 나와 사형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네. 자네를 만난 건 우연이 아니라 아직 하늘이 태산을 버리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 같구먼.”

담해상이 순순히 기뻐했다.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담자명을 비롯한 태산삼검이 건재하다는 사실에. 태산삼검의 셋째는 그들의 스승인 태산검존을 찾기 위해 중원 전역을 뒤지고 있다고 했다.

동악검선을 치료하고 태산검존이 태산으로 돌아온다면 충분히 배후조직의 손길을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장문인의 병세는 어떻습니까?”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들었네. 선우약가의 사람들만큼은 아니지만, 꽤 저명한 의원이 장문인을 돌보고 있지.”

“저명한 의원이요?”

“그렇다네. 그 의원 덕에 장문인이 지금껏 버티지 않았을까 싶네. 이제 선우약가의 셋째인 저 아이가 치료 방법을 찾아주길 바랄 뿐이고.”

담해상은 선우유란이 마지막 희망이라는 간절한 얼굴로 일행들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녀라면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선우약가의 의술은 전생의 내가 겪어본바,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나이의 고하는 중요하지 않았다. 의술만으로 천하오주의 자리에 오른 가문이 바로 선우약가였다.

“태산파에 무사히 데려가기만 한다면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며칠만 더 나아가면 태산의 초입이네. 얼마 남지 않았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문제겠죠?”

“문제?”

나는 대답 대신 내공을 끌어올리며 주변을 한 바퀴 훑었다. 희미한 살기가 밤하늘의 어둠이 깔린 야산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담해상의 안색도 차가워졌다. 나보다 한발 늦긴 했지만, 그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일단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야겠네.”

“그쪽은 선배에게 맡기겠습니다. 섣불리 나서지 마시고 삼인 일조로 서로 등을 맞대 사각을 대비하세요. 조끼리 한데 뭉쳐 수비망을 형성하시고요. 선우 소저가 그 중심입니다. 각 조의 위치는···.”

“인술진(人術陳)의 삼산수수진(三山守數陣)을 이야기하는 건가?”

“알고 계시다니 다행입니다.”

“나야 당연히··· 아니 그보다 자네가 어떻게?”

전생에 천영검대원을 이끌고 숱한 전투를 겪은 나다. 인술진은 최상위 진법까지 꿰차고 있었다. 삼산수수진도 그중 하나였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습니까?”

“그, 그렇지. 일단 알겠네. 그럼 자네는?”

“저는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나는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살기가 점차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으니까.

*

‘태산으로 향하는 선우약가의 삼녀. 의뢰비 은자 오만 냥. 그녀의 일행인 권룡과 태산삼검의 둘째는 각각 이만 냥. 삼녀의 암살을 최우선으로.’

도합 구만 냥.

야막의 막주 조여랑(曹如浪)이 스산한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들어온 특(特)급 의뢰였다.

정마대전이 끝나고 강호에 평화가 찾아오면서 의뢰가 뚝 끊겼었고 삼만 냥 이하의 의뢰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야막의 기준을 뜯어고쳐야 하나 고심하던 찰나, 먹음직스러운 의뢰가 들어왔다.

더군다나 이번 의뢰는 야막의 전전대 막주가 직접 물어다 준 의뢰인만큼 돈 떼먹힐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야막을 상대로 돈을 떼먹을 깜냥이 있는 의뢰자가 있겠냐마는.

단지 야막의 역대 막주 중에서 최고라고 여겨지는 전전대 막주가 누군가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늙은 게지. 역대 최고? 권룡과 태산삼검의 일인이면 그 자리에 오르는 데 큰 도움이 될 테니···.’

돈과 명성을 한꺼번에 손에 쥘 기회가 찾아왔다는 생각에 조여랑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일호(一號)부터 삼십호(三十號)까지 전부 불러들여라.”

“예.”

야막에 존재하는 서른 명의 살수들은 그 하나하나가 이미 최정예 살수들이었다. 열 명만 보내도 충분할 테지만 어차피 할 일 없이 밥만 축내는 상황.

그럴 바엔 전력을 다해 의뢰를 끝마치는 게 나았다.

“가자. 태산에 진입하기 전에 잡는다.”

조여랑의 명령에 서른 명의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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