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인 환생했다-44화 (44/150)

6장 태산[3]

6장 태산[3]

촤악!

내가 마지막 살수의 목을 베었다. 툭, 하고 굴러떨어지는 목을 일별한 뒤 고개를 들자 일행들이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담해상과 왕삼은 안도의 한숨을. 임평과 선우유란 그리고 선우약가의 호위무사들은 경악을. 장진악은···.

“역시. 내가 아무나 형님으로 모시는 게 아니지.”

일행들을 향해 뭔지 모를 뿌듯함을 내보였다. 나를 형님으로 모시기로 한 선택이 정당화됐다는 듯이.

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일행들을 한차례 훑었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지만, 크게 다친 호위무사 몇 명이 눈에 들어왔다.

“선우 소저.”

내가 부르자 그녀는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뒤 반사적으로 부상자들을 살폈다. 왕삼과 임평, 나머지 호위무사들이 그녀를 도왔고 그사이에 담해상과 권룡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설마 그놈들이?”

사정을 알고 있는 담해상이었기에 흉수가 누구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예. 놈들이겠죠.”

“평범한 살수들이 아니었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여기 있는 모두가 이렇게 무사할 수 없었을 정도로.”

“야막입니다.”

“야막?”

정체를 알려주자 담해상과 권룡이 매우 놀랐다. 두 사람도 야막이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테니.

“야막이라면 정마대전 이후 모습을 감춘 놈들이 아닌가? 그런 놈들을 끌어들일 정도라니. 대체 어떤 조직이기에···.”

태산파를 노리는 배후조직에 대해선 인지하고 있었으나 놈들의 위세가 이 정도일 줄은 예상도 못 했다는 듯 담해상이 치를 떨었다.

그때, 대화를 듣고 있던 장진악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조직? 야막? 선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지금까진 단순히 선우유란의 호위를 핑계로 뒤따르던 장진악이었다. 이번 살수들의 습격을 통해 그 또한 심각성을 깨달은 것 같았다.

나는 담해상과 눈빛을 한차례 교환했다.

여기까지 함께한 이상 장진악에게도 사정을 이야기해주는 게 맞았다. 내게 두들겨 맞아 잠시 위상을 잃긴 했어도 그는 하남장가의 후계자 중 한 명이자, 장차 강호를 이끌어갈 인재라고 평가받는 권룡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담해상은 핵심만 짚어 장진악에게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동악검선이 병상에 누워있으며 선우유란을 태산파로 데려가는 게 그를 치료하기 위함이라는 이야길 들었을 때, 장진악은 경악했다. 태산파를 노리는 배후조직이 있다는 말에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격분했다.

“미친 새끼들이 감히 천하오주를···.”

천하오주. 정마대전 이전에는 정파를 지탱하는 다섯 기둥이라 불리던 정파오주였다.

태산파. 하남장가. 선우약가. 독고세가. 진천문. 지난 수백 년간 다섯 세력은 교류를 이어왔으며 정마대전 당시에는 하나로 뭉쳐 마교를 물리쳤다.

서로 경쟁하거나 관계가 틀어진 적은 있었어도 밑바탕엔 같은 정파라는 신뢰와 존중이 깔려 있어 선을 넘지 않았다.

전생에도 권왕과 동악검선이 꽤 사이가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 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졌다면 태산파와 하남장가도 마찬가지일 거라 여겼다.

“이 정도의 사안이라면 정천맹에 알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장진악이 합리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다만 나와 담해상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놈들이 정천맹에도 영향력을 뻗치고 있다. 그게 아니었다면 담자명 대협이 애초에 정천맹과 선우약가의 가주께 도움을 청했겠지. 선우 소저가 아니라.”

내가 말하자 장진악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정천맹까지요?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으셨는데···.”

“아직 모르고 계시거나. 놈들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시는 걸 수도 있지. 혹은 놈들이 이미 하남장가에도···.”

“그럴 리 없습니다. 본가는!”

“장담할 수 있어?”

내가 차가운 어조로 묻자 장진악은 입을 다물었다. 같은 천하오주인 태산파가 이 지경인데, 하남장가라고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장담은··· 못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권왕께서는 건재하시다는 거잖아?”

“예. 아버지는 정정하십니다. 최근에는 폐관수련을 다녀오신 뒤 더 강해지셨고요.”

몰랐던 사실에 나는 눈을 빛냈다. 이미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인 권왕이 더 강해졌다?

“그럼 하남장가는 당분간 걱정할 필요가 없겠네.”

“물론입니다.”

“그럼 지금은 태산파와 놈들의 꼬리를 밟는 데 집중하자고.”

나는 그 말과 함께 기절시켜두었던 조여랑을 일행 곁으로 끌고 왔다.

*

조여랑이 눈을 떴다.

나는 담해상과 함께 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머지 일행들은 살수들과의 혈전을 겪은 탓에 기절하듯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우린 그런 일행들 곁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에 자리를 잡았고 조여랑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혈도가 짚여 내공은 물론 몸도 굳은 상태에 말까지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놈이 할 수 있는 건 눈동자만 굴려 애원하듯 나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살고 싶나?”

내가 묻자 조여랑이 미친 듯이 눈을 깜빡였다. 나는 조소와 함께 놈의 품속을 뒤졌다.

여러 가지 암기. 비도 몇 자루. 독기가 느껴지는 액체가 담긴 병. 해독제 등.

나는 바닥에 늘어진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병을 집어 들었다. 이어 놈의 복면을 찢듯이 벗겨낸 다음 놈의 아가리에 병을 쑤셔 박았다.

꿀떡거리며 적당한 양이 흘러 들어갔을 때 병을 빼냈고 놈의 두 눈이 뒤집히는 걸 확인한 뒤에야 아혈(啞穴)을 풀어주었다.

“끄아아악-!”

그러자마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숲을 뒤흔드는 비명은 한참이나 이어졌고 뒤따라 놈의 눈과 코, 입에서 진득한 선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제, 제발··· 살려, 커흑!”

나는 무심히 놈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번엔 해독제로 보이는 환약 몇 알을 놈에게 먹였다.

“쿨럭.”

놈이 핏물을 게워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탁해진 안색이 조금 밝아진 걸 확인한 뒤에야 나는 씩 웃었다.

“다행히 극독은 아니었나 봐?”

“사, 살려주시오.”

“살려주는 대가는?”

“뭘 원하시오?”

나는 놈의 떨리는 눈동자를 잠시 바라봤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두려움도 함께였다. 동시에 희미하지만 나를 향한 원망과 분노도 언뜻 비쳤다.

“눈빛이 마음에 안 드는데.”

“예? 그게 무슨··· 웁!”

나는 말을 하기 위해 벌어진 놈의 아가리에 다시금 병을 꽂아 넣었다.

“끄아아아!”

놈이 괴로움에 울부짖다가 내 손바닥에 올려진 해독제를 발견하곤 핥듯이 집어삼켰다. 놈이 안도하며 호흡을 가다듬을 땐 다시 병을 때려 박았다.

그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하자 독이 금방 바닥났다. 한 번 더 먹이면 끝날 양이었다. 해독제도 이미 모두 소모했고.

기진맥진한 표정의 조여랑이 붉어진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원하시는 건 뭐, 뭐든 말해드리겠소. 그러니 제발···.”

놈의 기세가 꺾인 걸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그랬어야지.”

“...”

“의뢰내용은?”

“선우약가의 삼녀. 그녀의 암살이 최우선이었소. 권룡과 태산삼검의 둘째.”

조여랑이 슬쩍 담해상을 바라봤다가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은 차선이었고.”

“의뢰자가 누구였는데?”

“그게···.”

놈이 잠시 뜸을 들였다. 내가 손에 쥔 병을 살짝 흔들자 놈은 기겁하더니 황급히 대답했다.

“대답을 피하려고 한 게 아니오! 절대 그런 게 아니라, 의뢰자는 야막의 전전대 막주였소.”

“전전대 막주?”

“그렇소.”

“그게 누군데?”

“그를 모른단 말이오? 그는···.”

조여랑이 말을 하려던 와중이었다. 담해상의 입에서 그 이름이 먼저 새어 나왔다.

“야···왕?”

야왕(夜王)?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별호여서 담해상을 바라봤다.

“야왕은 저놈 말대로 전전대에 명성을 날리던 살수였네. 강호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오대살수 중 한 명이었던.”

“전전대면 적어도 몇십 년 전이 아닙니까?”

“그럴 거네.”

몇십 년 전의 인물이라면 모를 만도 했기에 내 시선은 다시 조여랑을 향했다.

“야왕이라는 놈이 아직 살아있다고?”

“그렇소. 그리고··· 그가 의뢰를 맡길 당시에 이번 의뢰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모시는 인물의 명령이니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었소.”

놈의 말에 담해상이 기겁하는 게 보였다. 저렇게 놀랄 정도면 야왕의 명성이 대단하긴 했나보다 싶었다. 그런 야왕을 수하로 부리는 자라.

나는 눈을 빛냈다.

“일단 꼬리는 잡았습니다.”

내가 말하자 담해상이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네만. 야왕이라니. 게다가 그 야왕이 고개를 숙여?”

믿기 힘들다는 목소리였다. 아니, 믿기 싫다고 보는 게 더 옳았다. 나로서는 조금 더 냉정해지는 순간이었다. 뒤를 쫓던 괴물의 몸집이 얼마나 큰지 조금은 체감하게 됐으니까.

그때, 조여랑이 슬며시 물어왔다.

“아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혹시 이 정도면···.”

나는 대답하는 대신 놈의 입에 병을 꽂아 넣어주었다. 더는 해독제가 없는, 마지막 양의 독이 놈의 목을 타고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

태산파 장문인의 처소.

현재 장로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출입이 제한되어있는 그곳에 노인 한 명이 유유히 모습을 드러냈다.

흑색 의복을 두른 노인의 손에는 온갖 약병과 흑침 등 의료 기구들이 담긴 목함이 들려 있었다.

처소의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태산파의 중년 제자 하나가 노인을 발견하곤 정중히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경비를 선다고 고생이 많네.”

“마땅히 해야 할 일일 뿐입니다. 흑선(黑仙) 어르신이야말로 매일같이 고생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흑선이라 불린 노인을 바라보는 제자의 눈빛엔 깊은 감사와 존경이 담겨 있었다.

노인이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는가? 실력이 부족해 장문인을 제대로 보살피지도 못하고 있으니.”

“어르신 덕분에 장문인이 지금까지 버티고 계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말이라도 고맙네. 내 어떻게든 장문인을 치료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시게.”

“예.”

제자가 다시금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처소의 입구를 열어주었다.

노인은 유유히 안으로 들어섰고 걸음을 옮겨 건물 앞에 도착했다. 동악검선이 이 건물 안에 잠들어 있었다. 노인이 건물의 문고리를 잡아가다가 멈칫했다.

“이젠 아예 대놓고 태산파를 들락날락하는구나.”

노인은 시선을 고정한 채 혀를 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둥 밑의 그늘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놓고 태산파에 머무는 인물도 있는 마당에 무슨 문제라도?”

“클클, 그렇지.”

노인이 미소를 흘렸다. 직전에 태산파 제자에게 보여주었던 미소와는 전혀 다른 음산한 미소였다.

기둥 밑에서 다시금 질문이 던져졌다.

“경과는?”

“며칠 정도 시간이 더 필요하네.”

“보주께선 정확한 걸 좋아하시지.”

“흠. 일곱 밤만 참고 기다리라고 전해주게나.”

“그러지. 그 외에 필요한 건?”

“아. 마지막 날에 사용할 구근활력초(球根活力草)를 구해오게.”

“...상(上)품의 영약을 싸구려 금창약 대하듯이 말하는군.”

“그럴 리가. 천하의 야왕에게 그쯤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

노인이 히죽 웃었고, 더 이상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