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검선[1]
7장 검선[1]
혜어각의 지붕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자 태산파의 장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담자명에게 장원의 구조에 관해 설명을 들었던 터라 머릿속으로 지도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외원과 내원은 삼대제자부터 일대제자까지 배분에 따라 구역이 나뉘었고 장로급 이상의 인사들이 머무는 곳은 가장 안쪽이었다.
거기서 더 안으로 들어가면 장문인의 거처가 나온다. 장원의 구조상 가장 안전한 위치였다.
태산검존과 태산삼검의 거처인 혜어각이 장원과 동떨어져 있는 이유는 그저 태산검존의 별난 성격 때문이라고 들었다.
수련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밥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검을 휘두르고 명상에 빠져드는 게 전부인 인물이었으니 한 마디로 자기를 건들지 말라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덕분에 나로서는 움직이기가 편했다.
혜어각이 아니라 객청 같은 곳에 머물게 됐다면 감시나 견제를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혜어각의 지붕에 앉아 한나절 동안 태산파의 동태를 살폈다. 예상대로 특이한 움직임이나 수상한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장문인의 처소와 흑선이라는 의원이 머물고 있다는 건물 주변은 빈틈없는 경계를 보였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분위기였다.
당장 내가 이곳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재경각주 곽윤을 잡아 족치는 것. 배후조직에 가담한 인물이니 놈에게서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태산파의 장로인 만큼 그는 실력이 만만치 않았다. 물론 질 자신은 없지만 그건 일대일 대결에 국한해서였다. 놈은 이미 여러 호위와 제자들에게 보호받고 있었다.
재경각에 잠입해 놈을 일격에 제압하지 못하면 소란이 벌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태산파 제자들과 칼을 섞는 상황까지 감당해야 했다.
즉 곽윤을 잡는 건 놈을 유인하거나 혼자 있을 때를 노리는 게 맞았다. 혹은 놈이 배신한 증거를 찾아 본색을 밝혀내거나.
둘 다 적잖은 시간이 소요될 일이어서 첫 번째 방법은 기각.
일의 우선순위를 생각해도···.
나는 삼엄한 분위기가 공기마저 짓누르고 있는 장문인의 처소를 응시했다.
‘배후조직에 관한 정보도 중요하지만, 당장은 동악검선이 먼저다.’
담자명의 말대로라면 병세가 좋아졌다느니 하는 얘기들은 전부 장로들의 입에서 들은 얘기라고 했다.
재경각주 같은 배신자가 또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장로들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흑선이라는 의원도 의심스러웠고.
나는 지붕에 앉아 하늘이 완전한 어둠에 잠길 때를 기다렸다. 의문을 해소하려면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는 없었으니까.
*
드르륵. 탁.
장문인 처소의 문이 열렸다 닫혔다. 동악검선이 잠들어 있는 건물을 들락날락할 수 있는 인물은 흑선이 유일했다.
그런 그가 건물에서 빠져나와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고 있는 와중이었다.
“어르신.”
재경각주 곽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지?”
“그게···.”
곽윤은 마치 윗사람에게 보고를 올리듯 말을 이어갔다.
“오전에 선우약가의 삼녀가 본문을 방문했습니다.”
“선우약가?”
“예. 간신히 돌려보내긴 했습니다만, 제자들의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장문인을 치료하러 온 선우약가의 인물을 왜 그냥 돌려보냈는지 의아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가?”
흑선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술만큼은 천하제일이라고 여겨지는 게 선우약가였으니까.
“돌려보냈으면 됐네. 준비는 거의 다 끝났으니.”
“그 말씀은?”
“남은 건 구근활력초를 구하러 간 야왕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일이야. 의아해하는 태산파의 제자들에게는 장문인이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날 거라고 얘기해두게.”
흑선은 히죽 웃었고 곽윤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이곳의 경비도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하고.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말이야.”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곽윤은 그 말과 함께 조용히 물러났다.
흑선은 서 있던 자리에서 그가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넌지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인 동악검선.
그런 고수가 며칠만 지나면 자신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될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말했던 대로 태산파의 장문인은 병상을 털고 일어날 것이다. 내공은 물론 무공까지 보존한 채로.
다만 대법의 영향을 받아 영혼과 정신력이 지배당해 자신과 금월보주의 명령만을 따르는, 이지를 상실한 존재로 깨어날 뿐이었다.
‘몇 달간 개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대법을 펼치기 위한 사전작업을 혼자서 준비하려다 보니 고역도 그런 고역이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냈다. 혼자인 만큼, 공로 또한 독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
뿌듯해하던 흑선이 갑자기 고개를 휙 꺾었다.
“누구냐?”
대답은 없었다.
흑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둠 속을 응시했다. 희미한 기척이 느껴진 것 같았는데.
‘착각인가? 하긴. 야왕 정도의 잠행술이 아니고서야 여기까지 잠입해올 인물이 있을 리가.’
마지막 사전 준비를 위해 건물 안에서 한나절을 소모했다. 피로의 여파라고 여긴 흑선은 유유히 걸음을 옮겨 처소를 빠져나갔다.
*
‘평범한 의원이 아니야.’
나는 어둠 속에 은신해 있는 상태로 멀어져가는 흑선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전생에 내가 익혔던 잠행술은 정천맹의 경계도 뚫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지금은 물론 그때만큼은 아니겠지만, 부족한 부분을 괘월선보의 묘리로 보완해 꽤 수준 높은 잠행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야막의 막주였던 조여랑마저 등 뒤를 내줬을 정도니까.
한데 방금은 자칫하면 기척을 들킬뻔했다.
의원이라던 흑선이 무공을 익히고 있을 줄은 몰랐고 그 경지가 내 잠행술을 잠시나마 간파할 정도일 줄은 몰랐다. 끝까지 방심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어찌 됐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동악검선의 상태를 눈으로 살펴보기 위해 잠입했는데 기대도 하지 않았던 정보를 듣게 됐으니까.
흑선 또한 배후조직의 인물이라는 점. 그 말은 그를 데려온 호법당주도 재경각주와 같은 배신자라는 말이기도 했다.
거기다 야왕이 구근활력초라는 영약을 구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영약을 어디에다 쓰려는 건지는 몰라도 흑선을 포함한 놈들의 목적이 동악검선의 치료가 아니라는 낌새는 충분히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동악검선을 죽이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진즉에 처리했겠지.
나는 흑선이 확실하게 사라진 걸 확인한 뒤 은밀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에는 경계를 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역한 기운이 전신을 끈적하게 휘어 감았기 때문이다. 익숙한 기운이기도 했다.
전생에 수없이 마주했던 마기(魔氣).
마교의 마인들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그 마기가 건물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태산파 장문인의 처소에서 이 정도의 마기라니.
나는 내공을 끌어올려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마기를 몰아내며 서너 개의 미닫이문을 넘어 계속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끝에서 침상을 발견했고 침상 위에 누워있는 동악검선을 발견했다. 과거의 기억 속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였다.
‘오랜만입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귓가로 그의 대답이 들려오는 착각이 일 정도로 반가운 마음이 컸다.
그래서인지, 그만큼 분노가 치밀었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마기가 침상 주위를 집중적으로 에워싸고 있었으니까.
마기의 근원지는 바닥에 그려진 진법이었다. 괴기한 문양으로 가득한 진법은 검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누가 봐도 선혈로 그려졌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불길했고 문양 위로 정체 모를 갖가지 물건들이 침상을 에워싸듯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물건들은 각각 붉은 실로 이어져 있었는데 그 실들이 침상까지 늘어져 거미줄처럼 엉켜있는 상태였다.
동악검선은 침상에 누운 채 붉은 실들의 경계망에 갇혀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실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동악검선의 신체를 파고들어 침식하고 있었고.
천천히 다가가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동악검선의 전신에는 가느다란 침 수십 개가 촘촘히 틀어박혀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동악검선의 단전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어 내공을 끌어올려 그의 몸 상태를 관조했다.
‘마기가 하단전을 넘어 중단전까지 파고들었다.’
이 정도로 마기에 침식당했다면 도가 계열의 내공과 맞부딪쳐 주화입마에 빠지는 게 정상이었다.
내공의 폭주를 제어하지 못해 이지를 상실하고 날뛰어도 모자랄 판인데 그는 잠을 자듯 평온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전신에 박혀있는 수십 개의 침이 폭주를 제어하는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지?
나는 손을 떼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배후조직 놈들이 무슨 짓을 벌이려는 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대로 놔뒀다간 동악검선은 무사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일단은 여기서 빼내야 한다.’
마기의 침식을 끊어놔야 했기에 나는 먼저 검을 뽑았다.
번쩍!
침상 주변을 에워싼 실들을 일검에 가르자 동악검선의 몸으로 흘러 들어가던 마기가 폭사하듯 사방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콰악!
나는 재빨리 휘둘렀던 검을 바닥에 그려진 진법의 중앙에 꽂아 넣었다.
화아-악!
이내 사방으로 몰아치던 마기가 중앙에 꽂힌 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침식 대상이 동악검선에서 검으로 뒤바뀐 것이다.
다행히 청로검 말고 한 자루의 검을 더 들고 있었기에 내 정체가 탄로 날 일은 없었다.
이후에 나는 동악검선을 양팔로 조심히 들어 올렸다. 그의 몸에 박혀있는 침들이 하나라도 빠졌다간 무슨 사달이 벌어질지 몰랐다.
나는 그 상태로 건물의 기둥과 벽을 박차고 날아올라 꼭대기 층의 창문으로 빠져나왔다.
최대한 경계가 허술한 쪽을 노리고 내공을 잔뜩 끌어올려 잠행술을 펼쳤다. 은밀함과 동시에 괘월선보의 묘리로 신속함이 더해진 움직임이어서 발각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어둠을 가르고 이동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혜어각.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담자명과 담해상이 나를 발견하곤 입을 쩍 벌렸다. 정확히는 내 품에 안겨있는 동악검선 때문이었다.
“자, 장문인!”
“아니. 이게 대체···.”
두 사람으로선 장문인의 상태가 어떤지 살펴보고 오겠다던 놈이 아예 장문인을 납치해온 상황이나 다름없어서 경악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사형?”
“그게 그러니까···.”
두 사람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당황스러워했다. 나는 심각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봤다.
“정신 차려. 심각한 상황이니까.”
“알겠소.”
“설명은 나중에. 일단 어르신을 태산파 밖으로 빼내야 해. 들키지 않고 밖으로 빠져나갈 방법은 있어?”
내가 묻자 담자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소. 스승님이 산에서 내려갈 때 주로 사용하는 길이.”
그 말에 나는 담해상을 바라봤다. 그에게도 내가 백의문주라는 사실을 밝힌 상태여서 말투엔 거리낌이 없었다.
“그 길로 어르신을 옥황봉 초입에 있는 객잔으로 데려가. 선우 소저와 일행들이 거기에 머물고 있을 거야.”
“초입에 있는 객잔이라면 그때 다 같이 식사를 했던?”
“맞아. 선우 소저라면 어르신의 상태를 알아보고 어떻게든 치료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대신에 객잔이 아니라 다른 잠적할 장소를 찾아.”
“잠적할 장소라면···. 스승님의 은신처를 한군데 알고 있으니 거기로 데려가겠소. 스승님과 우리 사형제들만 알고 있는 곳이라 안전할 거요.”
“그렇게 해.”
나는 비장한 표정을 짓는 담해상에게 동악검선을 넘겨주었다. 그의 몸에 박혀있는 침이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침이 하나라도 빠지면 어르신의 생명은 장담 못 해.”
“조, 조심하겠소.”
담해상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빠르고 조심스럽게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담자명이 다시 나에게 집중했다.
“이제 설명을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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