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검선[4] -2권 끝-
7장 검선[4]
재경각주 곽윤.
호법당주 곽양개.
추가로 무관주 곽태려(郭太勵)까지.
사라진 동악검선을 찾겠다고 태산파를 나선 세 장로이자, 배신자라는 게 확실시되는 인물들이기도 했다.
별다른 단서도 없이 무작정 뛰쳐나갔으니 모르긴 몰라도 한참을 헤매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 덕분에 담자명과 임평은 각각 일대제자들과 이대제자들을 이끌고 배신한 장로들의 건물을 쥐잡듯이 뒤지고 다닐 수 있었다.
증거는 금방 나왔다.
금월보를 통해서 해 처먹은 돈. 그에 관한 장부와 서류들. 더불어 태산파의 무공 몇 가지도 팔아먹었다는 게 확인됐으며 가장 중요한 증거라 할 수 있는 신선폐(神仙廢) 또한 발견됐다.
무색무취의 산공독.
한 방울의 가격이 천금에 달한다는 산공독이 바로 신선폐였다.
내공을 펼치기 전에는 전혀 중독된 기미를 알아차릴 수 없지만, 일단 내공을 펼치면 급속도로 독기가 발작해 단전으로 이어지는 혈맥을 차단하고 의식을 잃는다.
동악검선 같은 고수라도 일단 중독되고 난 뒤에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독이었다.
호위를 책임지는 곽양개가 신뢰를 덫 삼아 동악검선을 중독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을 터.
그렇게 동악검선을 제압하고 흑선을 의원으로 가장시켜 불러들이는 게 이번 계략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쾅!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내려친 주먹에 탁자가 반으로 쪼개졌다. 그러고도 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담자명은 연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임평은 한옆에서 수집한 증거들을 정리해나가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고, 나는 덤덤하게 담자명을 바라봤다.
그의 입에서 자조적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곽윤. 곽양개. 곽태려. 세 장로는 현 태산파의 주축이나 다름없소.”
수련을 떠나 행방을 모르는 태산검존. 은퇴한 곽자배의 인물들. 태산이 아닌 정천맹이나 외부에서 활동 중인 장로들을 제외하면 그의 말대로 현재 태산파를 이끌어가는 자들은 동악검선과 그 세 사람이 전부였다.
그런 놈들이 동악검선과 태산을 팔아먹었다는 사실에 담자명은 피가 터져 나올 때까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늙어서도 추악한 욕심을 버리지 못해 태산의 정신을 내던진 놈들일 뿐이야.”
내 말에 담자명은 이내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감히 태산을···.”
그에게서 터져 나오는 살기와 기세가 혜어각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나는 눈을 빛냈다.
전생에, 수백 명의 마인들 앞에서도 굳건히 버티고 선 채로 웅혼한 태산의 기개를 담아 검을 휘둘러가던 동악검선의 모습이 언뜻 겹쳐 보였다.
‘가지가 썩었다는 건 이미 그 뿌리에도 문제가 생겼다는 뜻일 테니까.’
일전에 나는 담자명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지금은 그 말을 정정해주고 싶었다. 가지는 썩었어도 뿌리는 여전히 굳건하다고.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속으로만 생각하며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흑선과 복면인을 바라봤다.
“증거. 증인. 둘 다 찾았네.”
*
텅 비어있던 장문인의 처소 앞.
그곳에 담자명과 임평을 필두로 태산파의 모든 제자가 모여들었다.
곽자배가 없는 지금, 자연스레 일대제자들의 대사형인 담자명에게 지휘권이 넘어온 상황이었다.
한데 모인 제자들의 숫자는 거의 백 명에 달했다. 배신한 세 명의 장로가 데려간 제자들을 제외하고 남은 숫자였음에도 무려 백 명.
나는 건물의 지붕에 걸터앉아 그들을 내려다봤다.
저 중에는 이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는 자들도 있을 테고,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고 있는 자들도 있을 터였다.
그런 그들을 향해 상단에 서 있던 담자명이 내공을 실어 말했다.
“두어 달 전. 곽현 장로님의 죽음을 다들 기억하느냐?”
그의 질문에 제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속가제자의 복수를 위해 산서로 향했다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 곽현. 반대로 멀쩡히 살아 돌아온 담자명과 몇몇 이대제자들.
당시에 담자명은 그때의 일을 자세히 해명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저 곽현의 죽음을 방패 삼아 살아 돌아왔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고.
그로 인해 태산삼검의 첫째라는 명성이 다소 실추되고 제자들에게 질타를 받았음에도 그는 입을 다물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담자명은 그 진실을 제자들 앞에서 털어놓기 시작했다.
만금상단을 앞세워 산서의 상권을 집어삼키려던 배후조직의 존재. 산서로 향했던 곽현의 목적이 속가제자의 복수가 아니라 배후조직과 만금상단을 돕기 위함이었다는 사실.
곽현뿐만 아니라 곽윤과 곽양개 및 곽태려까지 태산을 배신하고 배후조직에 가담했으며 장문인이 쓰러진 원인과 배후조직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까지.
“증거를 원하느냐?”
담자명이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서 있던 임평이 갖가지 서류와 장부들을 쏟아내듯 보여주었다. 이어 신선폐가 담긴 병을 들이밀자 제자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증인도 필요하더냐?”
이번엔 임평이 고개가 축 늘어진 채 포박되어있는 흑선을 끌고 왔다.
담자명이 그런 흑선의 혈도를 몇 군데 짚어주자, 흑선이 힘없이 깨어났다. 그는 떨리는 눈꺼풀 사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더니 낄낄, 스산한 웃음을 뱉어냈다.
“어리석은 놈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로구나. 엿 같으면서도 후련해. 크하하!”
체념한 듯 대소를 터뜨리는 흑선을 바라보던 제자들은 치를 떨며 이를 갈았다.
지난 몇 달간 흑선은 태산의 희망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장문인의 병세를 치료할 의원이어서 극진한 대접과 공경으로 모셨을 텐데, 그런 흑선이 흑막의 주범 중 하나였다는 사실에 다들 분노하고 있었다.
그때 흑선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번 계획을 막아냈다고 해서 네놈들이 무사할 줄 아느냐? 아니, 오히려 이번 계획이 성공하는 게 더 많은 태산파의 제자들을 살리는 길이었다. 멍청한 놈들아. 네놈들은···.”
그가 한참 말을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번쩍하는 섬광이 그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촤-악!
담자명이 휘두른 일검이었다.
잘려나간 흑선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뒤이어 핏물이 터져 나오는 몸뚱이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담자명은 흑선의 시체를 무심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태산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그 한마디에, 백여 명의 제자들이 결의를 다지기 시작했다.
*
그날 밤에 나와 담자명 그리고 임평은 혜어각에 다시 모였다.
배신자들이 제 발로 태산파를 벗어나 준 덕에 기회가 생겼으니 망설일 틈이 없었다.
“세 장로 중에서는 재경각주 곽윤이 그나마 가장 하수요.”
태산파의 재정을 담당하는 인물인 만큼 무공보다는 머리가 뛰어난 인물이 바로 곽윤이었다.
그다음이 무관주 곽태려.
이대와 삼대제자들의 무학을 총괄하는 무관의 책임자. 그런 놈이 태산파의 무학을 팔아넘겨 이득을 취했다는 사실에 모든 제자가 크게 분노했다.
하지만 곽양개를 향한 분노만큼은 아니었다. 장문인의 호위를 책임지는 호법당주가 도리어 신선폐를 이용해 동악검선을 중독시키고, 제자들의 눈을 가린 채로 흑선을 데려왔다.
다들 곽양개만큼은 반드시 사지를 찢어 죽여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심정은 그랬지만, 실상 곽양개의 무위는 담자명보다도 한 수 위였다.
그래서인지 담자명은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탁드려도 되겠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내 대답에 담자명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흡사 은인을 대하듯 공손한 자세였다.
그렇게 각자의 목표가 정해졌다.
재경각주 곽윤은 임평을 비롯한 서른 명의 이대제자들이. 무관주 곽태려는 담자명이 스무 명의 일대제자들을 이끌고 추격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곽양개는 내가.
“정말 혼자서 괜찮으시겠소?”
담자명이 일대제자 몇 명을 내게 붙여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혼자가 편했다. 환생한 이후 남들 앞에서는 웬만하면 천일백야검법을 펼쳐 보이지 않았으니까.
“태산파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호법당주 정도야···.”
내가 슬쩍 웃자 담자명과 임평은 수긍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내 무공실력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이들 중 하나였다. 담자명은 은연중에 나와 태산검존을 비교하는 기색을 풍기기도했다.
전생에 동악검선과는 자주 마주쳤지만, 태산검존과는 조우했던 기억이 없다.
정마대전 당시에도 그는 홀로 전장에 나서는 걸 선호했다고 들었다.
궁금하긴 하네.
태산파가 이 지경인 상황에서도 중원을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태산검존은 대체 어떤 놈일지.
나는 상념에서 깨어나 담자명에게 물었다.
“출발은 내일?”
“그렇소. 세 장로가 각각 태산을 중심으로 북, 서, 남쪽으로 흩어졌다고 하오. 내일은 돼야 놈들의 정확한 위치가 파악될 것 같아서.”
“선우 소저나 일행들에게서 연락은 없었고?”
“장문인을 모시고 무사히 잠적했다는 연락을 받았소.”
동악검선을 데려간 담해상이 제 역할을 잘 해냈다는 뜻이어서 나는 다소 안심했다.
“어르신의 몸 상태는?”
“거기에 대해선 아직···.”
선우유란이 있으니 잘못될 일은 없겠지만, 배신한 장로들을 처리하고 나면 직접 가봐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금월보와 금월보주도 물론 중요하지만 태산파와 동악검선이 우선이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게 하나 있어서 나는 담자명만 데리고 장문인의 처소로 향했다. 지독한 마기로 뒤덮여있는 건물이어서 임시로 폐쇄해둔 상태.
을씨년스러운 밤공기 아래에서 그 건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절로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나는 천천히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담자명은 인상을 찌푸리며 뒤따랐다.
“여기는 왜?”
“놓고 간 게 있어서.”
방안에 도착한 나는 여전히 진법 중앙에 꽂혀 있는 검을 발견했다. 동악검선을 대신해 마기를 잔뜩 머금은 그 검은 검날마저 시꺼멓게 물들어있는 상태였다.
건물을 뒤덮고 있는 마기의 흐름을 살펴본 바로 진법은 이미 망가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해서 검을 회수할 생각으로 손을 뻗었다.
담자명이 깜짝 놀라 만류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콱.
검 손잡이를 붙들자 순간적으로 지독한 마기가 내 팔을 휘어 감았다.
내공을 잔뜩 끌어올려 뱀처럼 팔을 타고 기어오르는 마기를 밀어내자, 팽팽하게 맞서는 두 기운의 여파로 인해 건물마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 일단 밖으로···.”
나는 이를 악물고 마기를 제어하면서 담자명을 따라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때까지도 마기는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검을 쥐고 있는 팔 위로 핏줄이 터질 듯 툭툭 불거져 나올 정도였다.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고 있던 담자명이 소리쳤다.
“그냥 버리시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청로검에 버금가는 명검을 버릴 순 없지.
한참의 사투 끝에 나는 밀고 들어오는 마기를 제어해 검 안에 가두어두는 데 성공했다.
우-웅!
그러자 이제는 아예 잿빛으로 변해버린 검날이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그 예기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평범한 검이었다면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을 텐데.
“기운이 예사롭지 않소. 불길해 보이기는 하지만, 다룰 수만 있다면 가히 보검(寶劍)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담자명이 침을 삼키며 혀를 내둘렀다. 나는 만족한 얼굴로 검을 들어 올렸다.
“이 건물은 어차피 못 쓰게 될 테지?”
장문인의 처소를 가리키며 묻자 담자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기로 뒤덮여 버린 건물이니 당연했다. 처소쯤이야 다른 곳에 새로 지으면 될 테니.
슁!
나는 적당한 힘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그 가벼운 일검에.
쿠구구구궁!
건물이 반으로 쪼개져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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