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만남[1] -3권 시작-
1장 만남[1]
산동 태안의 동평(东平)현.
태산 입구에서부터 서쪽 지역을 훑으며 동악검선을 납치해 간 침입자를 추적해 온 곽양개가 침음을 흘렸다.
호법당의 제자 스무 명과 함께 이틀간 밤낮없는 수색을 이어갔으나 단서는커녕 흔적 하나조차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동악검선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고려해 주로 의방과 의원들을 들쑤시고 다녔는데.
“아무래도 서쪽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동평현의 모든 의방을 수색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허탈한 음성으로 보고했다.
곽양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바라봤다.
“의식도 없는 장문인을 데리고 동평현을 넘어 산동 밖으로 빠져나갔을 리는 없겠지.”
동악검선이 사라진 지 고작 이틀. 그 짧은 시간에 산동을 벗어나진 못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서쪽이 아니라면 각각 북쪽과 남쪽으로 향한 곽윤이나 곽태려가 소식을 가져오겠지.
“수색을 중단해라. 다들 지쳤을 테니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부턴 다시 태산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수색을 이어가야겠다.”
“예.”
곽양개의 명령에 제자들이 긴장을 풀었다. 이틀 동안 잠도 못 자고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해 피로감이 전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근처에 청려객잔이 있습니다.”
“청려객잔?”
태산파가 운영하는 동평현의 사업장 중 하나여서 곽양개는 눈을 빛냈다.
“오늘은 그곳에서 쉬어가면 되겠구나.”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제자 중 몇 명이 앞질러서 청려객잔으로 내달렸다. 양해를 구해 손님들을 내보내고 객잔을 통째로 빌릴 심산이었다.
곽양개가 청려객잔에 도착했을 때, 객잔 주인은 얼어붙은 얼굴로 문 앞에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아이고. 장로님께서 저희 객잔까진 어언 일로···.”
주인장으로선 태산파의 장로라는 신분이 주는 위압감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안절부절못했다. 태산파의 제자들을 손님으로 맞이한 적은 있어도 장로급 인사는 처음이었다.
곽양개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런 주인장을 다독였다.
“동평현에 볼 일이 있어서 왔다가 시간이 늦어 쉬어가려던 차에, 마침 청려객잔이 떠올라서 찾아왔네.”
“그러셨습니까? 정말 잘 오셨습니다.”
“장사에 방해가 되진 않겠는가?”
“방해라뇨?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주인장은 과장된 미소와 함께 곽양개와 제자들을 안내했다.
역시나 객잔은 텅 비어있었다.
곽양개가 머물러 갈 거라는 말을 듣고 부리나케 손님들을 내보냈으니까.
곧이어 일 층에 산해진미에 버금가는 요리상이 차려졌다. 스무 명의 제자들을 위한 요리였고, 곽양개의 식사는 이 층에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대우였으나 곽양개는 사양하지 않고 자리를 잡았다. 적당히 배를 채우고 술도 한잔 적시자 자연스레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동악검선의 목소리가 피어올랐다.
‘차기 장문인? 그야··· 곽명이밖에 더 있겠느냐? 장문인 자리에라도 앉혀놔야 그놈이 더 이상 밖으로 나돌아다니지 않을 테니. 밖에서는 녀석을 태산검존이 아니라 태산검귀라고 부른다더구나. 검귀가 뭐냐? 검귀가, 쯧쯧.’
태산을 위해, 동악검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한데 돌아온 대답이 그거였다. 곽양개는 씁쓸한 얼굴로 술잔을 들이켰다.
태산검존 곽명.
그의 그늘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모멸감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때 나타난 것이 금월보주였다. 그는 자신의 비틀린 마음을 파고들어 뿌리칠 수 없는 제안을 해왔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후회 따윈 없었다.
훗날 곽명이 장문인이 되면 호법당주인 자신은 곽명을 호위하는 신세에 놓이게 될 터였다. 그럴 바엔, 태산을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배신한 이유가 그뿐만은 아니었다.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난 금월보주와 마주한 순간, 생전 처음 느껴보는 압박감에 사로잡혔다. 수려한 외모의 젊은 사내였는데 그런 사내에게서 절대자의 면모를 엿봤다.
그 젊은 나이에 태산검존 곽명과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무위를 지녔다는 사실에 곽양개는 하릴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금월보주는 확실하게 태산검존을 뛰어넘어 동악검선에 버금가는 실력을 지니게 될 것 같았다.
더군다나 그런 금월보주가 고작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엔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태산은 교두보에 불과하다. 그들은 조만간 천하오주는 물론 정천맹. 나아가 강호 전체를···.’
곽양개가 상념에 빠져있던 와중이었다.
객잔 일 층에서 소란스러움이 들려왔다.
“오, 오늘은 더는 손님을 받지 않습니다. 안쪽에 태산파의 제자분들이··· 앗!”
주인장이 곤란하다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만류하고 있었다.
곽양개는 난간 밑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가 젊은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 보는 사내였는데, 그는 눈길을 피하지 않고 히죽 미소를 머금기까지 했다.
그 순간 곽양개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에 안색이 딱딱해졌다.
금월보주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그 압도감이 저 사내에게서도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은연중에 피어오르는 살기는 확실하게 자신을 옥죄어왔다.
곽양개는 창백한 안색으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
“객잔을 봉쇄해라-!”
곽양개의 일갈에 스무 명의 제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사정을 모르는 젊은 손님일 뿐인데, 느닷없이 객잔을 봉쇄하라니.
“뭣들 하느냐?”
이어지는 곽양개의 재촉에 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따랐다.
객잔의 모든 출구를 틀어막은 제자들은 침묵을 고수하며 상황을 지켜봤다.
그때, 곽양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놈이었구나.”
그는 여전히 이 층 난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곽양개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이층에 도착하니 곽양개 앞에 놓여있는 술상이 보였다. 나는 덤덤하게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고 곽양개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나를 주시하기에 바빴다.
“앉아. 먹고 죽은 놈이 때깔도 곱다잖아.”
내 말에 곽양개가 눈썹을 찌푸렸다.
“정체가 뭐지?”
“죽음을 앞둔 마당에 그게 궁금해?”
“...객기 부리지 말거라. 나 혼자라면 몰라도 이곳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라면 네놈 또한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객기는 방금 당신이 지껄인 말이 객기고.”
“...”
곽양개는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음식을 집어 먹고 술도 한잔 따라 마시면서 기세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으니까. 아니, 애초에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곽양개는 내 무위를 어느 정도 단번에 알아차린 상태였다.
호법당주인 만큼 나름의 실력은 있는 놈이었다.
“후우.”
곽양개가 한숨과 함께 착석했다. 여전히 나를 경계한 채로. 서로 눈빛을 교환하다가, 곽양개가 다시 물었다.
“네놈은 누구기에 태산파를 돕는 것이냐?”
절로 조소가 지어지는 순간이었다.
“그게 태산파의 장로라는 놈이 할 말인가?”
“나는···.”
“반대로 내가 묻지. 당신은 왜 태산파를 배신했지? 태산을 이끌어가야 할 장로가, 장문인을 지켜야 할 호법당주가 왜 동악검선 어르신을 배신했냐고.”
내공이 실린 목소리였다. 내 말은 곽양개를 너머 일 층에서 출구를 봉쇄하고 있는 제자들에게까지 울려 퍼졌을 터였다.
예상대로 스무 명의 제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나는 기감을 끌어올려 놈들의 기색을 읽어냈다.
스무 명의 호법당 제자들. 그중엔 곽양개와 함께 태산파를 배신한 인물과 그저 장문인이 납치됐다는 말에 따라나선 이들이 뒤엉켜 있는 상황이었다.
‘저놈까지 다섯 명.’
나는 배신자라고 여겨지는 놈들을 대강 파악해 둔 뒤에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딸려 나온 건 투명한 병이었다. 병 안에도 역시나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었다. 그걸 발견한 곽양개가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바로 알아보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건 당신이 이 신선폐로 장문인을 중독시켰다는 사실이니까. 그뿐이야? 중독된 장문인을 처소에 감금시킨 뒤에 흑선을 불러들여 섭혼술을 강행하려고 했지. 왜일까? 장문인 자리가 탐이 나서? 아니면···.”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당신과 저 밑에서 도망칠 궁리를 하는 쥐새끼들이 금월보의 끄나풀이라서?”
순간 곽양개가 팔을 휘둘렀다.
번쩍!
어느새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내 목을 노리고 휘둘러온 것이다.
콱!
나는 식탁을 밟고 뛰어올라 공격을 피해낸 뒤에 포물선을 그리며 일 층 중앙에 내려섰다.
쉬쉬쉬쉬쉭!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을 다섯 방향으로 퉁겨냈다.
컥, 하는 신음이 연달아 울려 퍼지면서 배신자라고 점찍어뒀던 다섯 명의 제자들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각자 미간과 목이 젓가락에 꿰뚫려 절명한 것이다.
채채채챙!
별안간 벌어진 참상에 나머지 열다섯 명의 제자들이 검을 뽑았다.
나는 그들을 한차례 쭉 둘러봤다.
“지켜보고만 있어. 덤비는 놈은 같은 배신자라 여기고 죽여버릴 테니까.”
차가운 경고와 살기가 잔뜩 묻어나오는 내 기세에 제자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자리를 지켰다.
그 사이에.
“네놈-!”
곽양개가 이 층 난간에서 뛰어내리며 내게 짓쳐 들었다.
터-엉!
나는 정수리를 쪼갤 기세로 내리찍어오는 검을 쳐낸 뒤에 잠시 거리를 벌렸다.
“흑선은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뒈졌어. 곽윤. 곽태려도 곧 뒤따라갈 거야. 아니면 이미 저세상으로 건너갔을지도 모르지.”
내 말에 곽양개의 동공이 흔들렸다.
“흑선 어르신이···?”
“네놈들의 계획은 실패했다.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줄게. 어때?”
“항복하면 살려주겠다?”
내 제안을 뇌까리던 곽양개가 실소를 머금었다.
“이 계획이 전부라고 생각하느냐? 네놈과 장문인도 없는 태산파 따위가 금월보주와 금월보를 당해낼 성싶으···.”
말을 하던 곽양개가 아차 싶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열다섯의 호법당 제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곽양개를 노려보기 시작했으니까.
제 입으로 순순히 자백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의도한 부분이어서 나는 더욱 진해지는 조소를 숨길 수 없었다.
*
푸확!
“컥!”
검을 쥐고 있던 팔이 잘려나간 곽양개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콱.
나는 놈의 목줄을 움켜쥔 뒤에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손아귀에 힘을 주자 아등바등 발악하던 놈이 꺽꺽, 숨을 몰아쉬었다.
“마음 같아선 이 자리에서 그냥 죽여버리고 싶은데. 그건 내 몫이 아니라서.”
퍽!
검 손잡이로 복부를 후려쳐 단전을 깨부수자 놈은 물거품을 물고 정신을 잃었다.
나는 기절한 곽양개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경악한 채로 서 있는 호법당 제자들을 둘러봤다.
그중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장년인을 불러세웠다. 담자명과 같은 항렬의 일대제자였다.
“자세한 사정은 저놈을 데리고 태산으로 복귀해서 담자명을 찾아가면 들을 수 있을 거야.”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곽양개를 손쉽게 제압한 내 실력을 지켜본 탓인지 그는 내 하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나는 동악검선 어르신의 상태가 어떤지 살펴본 뒤에 돌아가겠다고 전해주고.”
그 말과 함께 객잔을 나서려는데 그가 나를 붙잡았다.
“누구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과 함께 몸을 날렸다.
“유씨세가의 소가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