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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인 환생했다-52화 (52/150)

#52. 1장 만남(2)

빛 한 점 들지 않던 금월보주의 집무실.

촤락.

휘장을 걷자 중천의 햇살이 방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창가로 바깥의 풍경을 내다보던 금월보주는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구근활력초는?”

그의 물음에 별안간 천장에서 인영 하나가 내려섰다.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백발의 노인이었는데 두 눈빛엔 묘한 감정이 깃들고 있었다.

항상 어둠으로 물들어 있던 방 안이 환해진 탓이었다. 심경에 변화라도 생긴 건가. 백발의 노인, 야왕은 그런 생각과 함께 나직이 대답했다.

“물건은 구해왔습니다.”

야왕이 탁자 위에 목함을 올려두었다.

금월보주는 힐끔, 목함을 쳐다봤고 이어서 야왕과 눈을 마주쳤다.

순간 야왕은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금월보주의 미소에 깃들어 있는 분노와 살기 때문이었다.

“재밌네. 모든 준비가 끝났었는데, 그릇이 사라져 버렸어.”

“그게 무슨……?”

“정체 모를 인물이 동악검선을 빼내 갔다고 하더군.”

“흑로와 호법당주가 동악검선의 처소를 지키고 있지 않았습니까?”

“흑로는 죽었고, 호법당주는… 모르지. 아마 흑로를 뒤따라가지 않았을까? 태산삼검의 첫째가 배신한 장로들을 배제한 채 태산파를 장악했다고 하던데.”

“…….”

야왕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구근활력초를 구하러 떠난 그 며칠 사이에 일이 틀어지다니. 틀어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태산에 심어둔 세작들도 전부 불러들였다. 인정해야지. 이번 계획은 실패다.”

흑로. 곽윤. 곽양개. 곽태려.

주력은 이미 모두 처리됐다고 여겨도 무방했고 남아 있는 자들이라곤 세작으로 심어둔 삼대제자 몇 명이 다였다. 그들만으로는 상황을 되돌릴 수도, 반전시킬 수도 없다.

금월보주는 순순히 실패를 받아들였다.

“그럼 앞으로는 어쩌시려고…….”

야왕이 조심스레 묻자 금월보주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창가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곳엔 백 명이 넘어가는 무인이 장원 중앙에 열을 맞춰 늘어서 있는 상태였다.

“동악검선은 대법의 실험 대상이었을 뿐이야.”

마천섭혼술을 개조한 대법.

계획은 실패였지만, 대법 자체는 충분히 완성에 가까운 경지에 이르렀다. 흑로가 틈틈이 대법의 과정과 전개를 정리해 보고를 올렸고 그 보고를 토대로 대법의 비급을 작성해 두었다.

금월미리역혼술(金月迷理役魂術).

일부러 금월보의 이름을 넣어 작명한 비급이었다. 이 또한 금월보의 입지를 다지기 위함이고 련주에게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기 위함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계획은 실패했지만, 어쨌든 태산파의 힘은 현재 크게 줄어들었어. 동악검선은 몸 상태가 온전치 않을 테고, 주축이었던 곽자배의 장로들도 사라졌다. 태산삼검의 첫째라고 해봤자 일대제자. 그런 놈이 이끄는 태산파 정도야…….”

중원을 떠돌아다니고 있는 태산검존이 돌아오거나 외부에서 활동 중인 장로들이 복귀하지 않는 이상, 현재 태산파는 풍전등화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태산검존이 돌아오기 전에 쓸어버리면 그만이다.”

금월보주의 결심에 야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봐도 작금의 태산파는 금월보의 저력을 막아내지 못할 게 분명했으니까.

문제는.

“동악검선을 데려갔다는 인물이 마음에 걸려. 행여나 동악검선이 몸을 회복하기라도 하면 그것도 문제고.”

“제가 나서서 조사해 보겠습니다.”

“아. 선우약가의 삼녀가 살아 있다는 소식도 아직 못 들었지?”

그 말에 야왕은 흠칫 놀랐다.

선우약가의 삼녀가 살아 있다는 말은 야막에게 맡긴 의뢰가 실패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권룡이나 태산삼검의 둘째로는 역부족이었을 텐데요.”

“맞아. 한 놈 더 있었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놈이.”

“그게 누굽니까?”

“유씨세가의 소가주.”

처음 들어보는 가문이었는지라 야왕이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금월보주의 말에 표정이 차가워졌다.

“산서에서는 나름 유명한 무가라던데.”

“산서라면…….”

“느낌이 오지?”

만금상단을 앞세워 산서의 상권을 장악하려던 것도 금월보의 계획 중 하나였다. 그 계획의 결과도 실패였다.

그리고 두 계획의 실패라는 결과 사이에서 하나의 공통분모가 발생했다. ‘산서’라는.

“하지만 소가주라면 고작 후기지수에 불과한 놈이 아닙니까?”

“고작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마. 고작이라는 말에 눈이 흐려졌다가는 영문도 모르고 죽을 수 있는 게 강호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내 직감이지만 동악검선을 데려갔다는 인물이 그놈이란 생각이 들어. 그놈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연관은 있을 거야.”

“그럼 그놈으로 물꼬를 트겠습니다.”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해. 놈을 쫓아 동악검선을 찾을 수 있다면, 동악검선도 그냥 죽여버릴 생각이니까. 몸 상태가 온전하지 않은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태산파는 그다음이다.”

금월보주의 명령에 야왕이 눈을 빛내며 연기처럼 사라졌다.

***

일산일수(一山一水)로 유명한 산동. 산이 태산이라면 수는 황하강이다.

‘황하강을 끼고 하류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석림(石林)을 발견할 수 있소. 스승님의 은신처는 그 석림의 가장 안쪽…….’

나는 곽양개를 잡으러 태산파를 나서기 전에, 담자명에게 은신처의 위치를 미리 전해 들어뒀었다. 태산검존이 이따금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드는 곳이라나.

정확히는 산동을 벗어나긴 귀찮으면서도 태산파를 벗어나고 싶을 때 사용하는 은신처였다. 그 덕에 태산검존의 제자인 태산삼검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위치를 모른다고 했다.

나는 나무처럼 우뚝 솟아 있는 바위들을 넘나들며 석림을 가로질렀다.

계속 안쪽으로 이동하자 끝이 보였고 그 앞에서 천천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이어 내공을 안력에 집중하니, 가시거리에 들어오는 풍경 중에 일렁거리는 공간이 정확히 보였다.

은신처라고 나름 진법을 이용해 눈속임으로 입구를 가려뒀다고 하더니.

나는 담자명이 일러준 대로 공간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고 침착하게 걸음을 옮겼다.

좌로 삼보. 우로 이보. 다시 앞으로…….

한참을 진법의 미로 속에서 헤매다가 마지막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화악!

환한 빛이 시야를 뒤덮었고, 그 뒤로 소박한 장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담을 훌쩍 넘어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멍청한 놈아! 활검이라고 수비만 하다가 칼 맞아 뒈질 일 있냐? 공격할 땐 공격을 해야 한다니까!”

“공격할 틈이 없는데 어떻게 공격을 합니까? 장 공자님의 주먹을 막아내기에도 벅찬데. 좀 봐주면서 할 거라면서요?”

“실력이 모자란 게 네 탓이지. 내 탓이야?”

“이익!”

왕삼과 장진악. 두 녀석이 연무장 쪽에서 옥신각신하며 비무를 벌이고 있었다.

성격이 괄괄한 탓에 장진악이 왕삼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내용 자체는 확실한 지도비무였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훌쩍 몸을 날려 발을 뻗었다.

퍽!

“억!”

기습적으로 날아온 발차기에 옆구리를 얻어맞은 장진악이 주륵 밀려났다.

“어떤 새끼… 앗, 형님?”

발작하듯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치켜들던 녀석은 나를 발견하곤 금세 차분해졌다.

“왜 애를 들볶고 난리야?”

“들볶은 게 아니라. 엄연히 지도 중이었습니다. 형님의 호위무사라는 놈이 저렇게 약해서야.”

“너도 약하잖아.”

“…….”

내 말에 장진악은 기가 죽어 고개를 숙였다. 옆에 서 있던 왕삼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나를 반겼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그래. 보다시피.”

“그럴 줄 알았어요. 도련님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니깐요. 도련님이 여기에 오셨다는 건, 태산파의 일도 잘 마무리됐다는 뜻이겠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왕삼은 연신 내 전신을 훑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표정이 대번에 드러났다.

나는 그런 왕삼과 장진악을 지나쳐 마룻바닥에 앉아 운기조식에 집중하고 있는 담해상을 바라봤다.

그의 뒤편 너머로 방문이 하나 보였다.

동악검선과 선우유란이 저 안에 있을 터.

방 안으로 들어가 볼까 하던 차에, 담해상이 천천히 눈을 떴다.

“오셨소.”

내가 백의문주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동시에 나를 대하는 담자명의 태도를 보면서 담해상 또한 나를 존중해줬다. 더는 강호의 젊은 후배가 아니라는 듯.

해서 나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남들 앞에선 전처럼 대해주시죠. 선배.”

담해상은 장진악을 슬쩍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백의문주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뜻을 깨달았다는 듯.

“…그렇게 함세.”

“동악검선 어르신의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우리도 아직 모르네. 여기에 도착한 이후 유란이가 장문인을 모시고 방으로 들어가 지금껏 나오지 않고 있어서. 특별한 일이 아니면 자기가 나올 때까지 출입하지 말아달라기에 이렇게 방 앞을 지키고만 있을 뿐이네.”

선우유란이 그렇게 말했다면 최대한 집중해서 치료에 전념하겠다는 뜻이겠지.

전신은 물론 하단전을 넘어 중단전에까지 마기가 침식한 상태였다.

어르신을 치료하려면 그 마기를 몸에서 빼내는 게 가장 효과적일 텐데, 그게 가능할지가 의문이었으나 그녀라면 잘 해낼 거라 믿었다. 선우약가의 이름은 그만한 신뢰를 받을 가치가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담해상이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본문은 어떻게 됐나? 사형은? 곽윤을 비롯한 배신자들은?”

그의 물음에 왕삼과 장진악도 곁으로 다가와 내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나는 그들에게 모든 사정과 경과를 상세히 설명해줬다.

흑선과 곽양개를 내가 직접 때려잡아 제압했다는 말에 장진악과 왕삼은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흑선은 몰라도 곽양개는 강호에서 꽤 위세를 떨치는 고수였다. 호법당주라는 지위 때문에 항상 장문인 곁을 지키고 있지만, 그 실력은 강호인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했으니까.

담해상도 그 두 사람을 상대하면서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내 몸 상태를 보며 적잖이 감탄하고 있었다.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세 사람이 금월보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땐 안색이 딱딱해졌다.

“흑선은 만만찮은 고수였습니다. 곽양개보다, 그놈이 더 강했을 정도니까요. 금월보주는 분명 그 이상일 겁니다. 게다가 금월보엔 야왕을 비롯해…….”

흑선과 함께 사로잡았었던 복면인. 연락책이었던 놈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대략적이나마 금월보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애석하게도 금월보의 위치를 캐내려고 할 때는 놈이 느닷없이 발작하면서 숨을 거뒀다. 특별한 금제라도 걸어둔 것인지, 손쓸 틈이 없을 만큼 지독하고 빨랐다.

설명이 끝나자 담해상이 착잡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놈들의 세력이 만만찮군. 장문인과 장로들이 없는 지금의 태산파로는…….”

“상대할 수 없겠죠. 그걸 놈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알고 있다면 놈들이 택할 방법은 두 가지였다. 계획이 실패했으니 물러나서 숨어들거나. 혹은 더는 숨지 않고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거나.

정황상 후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후자라면, 놈들의 목표는 태산일 것이다. 더불어 태산을 치기 전에 먼저 동악검선을 찾아 확실하게 처리하려고 할 테고.

당연하게도 내가 있으니 놈들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대비는 확실히 해두어야 했기에 나는 왕삼을 가까이 불러세웠다. 그에게 품속에서 백색 가면을 꺼내 건네줬고 왕삼은 황급히 가면을 받아 제 품속에 챙겨 넣으며 나를 쳐다봤다.

“말 안 해도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심부름 좀 다녀오란 뜻이죠?”

“공손량이나 이자청을 찾아가면 된다. 가서 전부를 산동으로 데려와. 올 때는 최대한 빠르게. 와서는 적당한 장소에서 이목이 쏠리지 않게 숨어 지내고 있으라고 전해두고.”

“알겠습니다.”

왕삼은 진중한 얼굴로 나와 일행들에게 한차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빠르게 은신처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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