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1장 만남(3)
내가 은신처에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났다. 그때까지도 방문은 열리지 않았고 담해상도 여전히 방문 앞에 동상처럼 앉아만 있었다.
장진악은 초조한 얼굴로 주먹 몇 번 휘두르고 방문을 쳐다보고, 다시 주먹 몇 번 휘두르고 방문을 쳐다보는 기이한 수련을 이어갔다.
동악검선도 동악검선이지만 그를 치료하고 있는 선우유란 또한 걱정된다는 듯.
나는 덤덤하게 햇볕 아래에서 가부좌를 튼 채 일영청심공을 운용 중이었다. 착실히 내공을 쌓아가면서 한편으론 상념에 잠겨 있는 상태였다.
정확히는 흑선과 금월보의 연락책이었던 복면인을 심문하면서 캐낸 정보들을 되돌아보는 중이었다.
‘보주님이나 그 윗선에 대한 부분은 저희 같은 말단 놈들이 취급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닙니다. 다만, 누군가를 련주님이라고 칭하는 걸 몇 번 들은 적은 있고요.’
‘저희 금월보 또한 련주님 휘하의 세력 중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금월보 같은 세력이 더 있다고…….’
‘금월보주 밑에는 두 개의 무력집단이 있습니다. 천금단(天金團)과 지금단(地金團). 각 단주가 흑로 어르신 정도의 무위를 지녔다고 들었습니다.’
‘야왕은… 저희 업계에선 전설적인 존재입니다. 모종의 이유로 금월보주의 명령만을 받고 움직이고 있습니다만 왜인지는 잘. 약점이라도 잡혔나 하고 추측만 할 뿐입니다.’
‘그, 금월보의 위치요? 위치는 그러니까, 위치는… 컥, 커억!’
금월보의 위치가 어디냐고 물었을 때 복면인은 크게 당황했었다. 이어 치켜뜬 눈이 까뒤집히며 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를 쏟아내다가 죽어갔다.
심문하던 나와 담해상은 놈들의 지독함에 혀를 내둘렀었고.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악아.”
내가 부르자 녀석은 수련을 멈추고 가까이 다가왔다. 진중한 내 표정과 분위기를 살피더니 녀석 역시도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형님.”
“너는 이만 하남으로 복귀해라.”
“가문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왜요?”
장진악은 크게 반박했다. 적어도 선우유란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지켜볼 때까지는 떠날 수 없다는 투였다.
나는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 하남장가 역시도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을 수 있다고.”
“하지만 아버지가 버티고 계시는데 놈들이 감히…….”
“감히?”
나는 그 말과 함께 기세를 끌어올렸다. 지금껏 녀석 앞에선 내보이지 않았던 전력을 다해.
“끅!”
장진악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움켜쥐며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네 부모, 형제, 친척들을 포함한 하남장가의 혈연들. 하남장가를 위해 싸우고 일하는 수많은 무인과 식속들. 그들의 목숨이 걸린 일 앞에서 ‘감히’라고?”
“윽!”
“금월보가 만약 태산파가 아니라 하남장가를 노렸다면 저 안에 누워계시는 게 동악검선 어르신이 아니라 권왕 어르신일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일 뿐이지만, 틀림없는 진실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금월보 같은 세력이 더 있다면 만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는 일이기도 했다.
“더불어 하남장가의 현 가주는 권왕 어르신이지만, 훗날에는 네가 가주가 되겠지. 언젠가는 네가 이끌어가야 할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 사람들의 생사가 네 자만이나 아집 하나에 쓸려나갈 수도 있어. 개인적인 감정도 중요하지만, 당장 곁에 있는 사람들의 안위와 저울질하지 마.”
가르침 따위는 아니었다. 내가 뭐라고. 다만 장진악을 위한 경고이자 나아가 하남장가가 무사하길 바라는 충고였다.
내 진심이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녀석은 눈을 빛내며 내 압박을 이겨내고 끝끝내 자세를 바로잡았다.
“명… 심하겠습니다.”
권왕의 슬하엔 권룡 장진악을 제하고도 세 명의 아들이 더 있다고 들었다. 그 세 명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딱히 만나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권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는 장진악일 게 분명했다.
내가 기세를 거둬들이자 장진악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안정을 찾아갔다.
“태산의 사정과 금월보. 금월보 너머의 배후까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얘기를 전하고 미리 대비해놔. 말했듯이 하남장가 또한 이미 위험에 빠졌을 수도 있어. 그때는.”
나는 슬쩍 담해상과 동악검선이 누워 있는 방안을 가리켰다.
“머지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어르신과 태산. 아니면 내가 있을 유씨세가에 도움을 요청하고.”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하는 장진악에게서 결의에 가까운 기세가 묻어나왔다. 놈의 별호를 가지고 자주 토룡이라고 놀려댔었는데.
다시 보게 되는 날엔 더는 놀리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진심으로 장문인의 쾌차를 염원하겠습니다, 담 선배.”
“고맙네.”
장진악은 담해상에게 포권지례를 취해 보인 뒤 내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주고는 은신처 밖으로 떠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담해상은 나직이 읊조렸다.
“하남장가는 무사할 거네.”
“그러길 바라야죠.”
***
야왕이 턱을 매만지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선우약가의 삼녀. 태산삼검의 둘째와 권룡. 그 외에 나머지. 그 일행들이 하남에서부터 태산까지 거쳐온 여정의 경로를 추적하는 와중이었다.
지금은 그들이 산동에 접어드는 부근의 야산에서 야영한 흔적을 발견했고, 누군가와 혈전을 벌인 흔적을 발견했다.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의뢰를 맡겼던 야막과의 혈전이었다.
살수들의 시체는 직접 정리한 것인지 들짐승의 먹이가 된 것인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주변 곳곳에 핏자국과 전투의 자취가 남아 있었다.
태산삼검의 둘째가 다섯을 처리했고 권룡이 네 명의 살수를 죽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유씨세가의 소가주라.’
막주인 조여랑을 비롯한 나머지 스물한 명의 살수들. 그 모두가 한 명의 인물에게 당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게다가 정면으로 맞부딪친 건 혈전이 중반쯤으로 접어들었을 때부터. 그전까진 살수라는 놈들이 도리어 암습을 당해 죽은 모양새였다.
‘무위도 무위지만 잠행술마저도 능한 놈이다. 손속에도 거리낌이 없어. 나이가 어리다고 들었는데,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이기에…….’
야왕은 확신했다.
금월보주의 짐작이 들어맞았다는 걸.
동악검선을 데려간 인물은 틀림없이 유가의 소가주일 게 분명했다.
쉭!
야왕은 빠르게 산동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이제는 경로대로 추적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가 아니라 산동에서부터 놈의 뒤를 밟아 가면 되니까.
전력으로 내달려 이틀 만에 다시 도착한 곳은 태산 옥황봉 초입에 형성된 마을. 평범한 여객 행색으로 변장하여 마을을 누비다가 한 객잔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주인장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얻어냈다.
“예. 맞습니다. 권룡이라 불린다는 젊은 무인과 여인 한 명. 거기다 태산삼검의 담해상 대협과 그 일행들까지 전부 저희 객잔에서 식사했습죠.”
“그러곤 곧바로 태산을 올랐나?”
“예. 그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들이 다시 돌아와서 며칠간 머물다가 떠나갔습니다. 그땐 담자명 대협과 몇몇 일행은 보이지 않았고요.”
“그렇구먼.”
“한데 노인장께선 누구시기에… 어?”
주인장이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코앞에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으니 그럴 수밖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때 이미 야왕은 객잔에서 빠져나와 다시 추적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행색 또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이때부터 유진휘라는 놈은 계속 태산파에, 나머지는 따로 어딘가로 이동했다. 이후 그놈이 동악검선을 빼내 일행들에게 보냈거나 합류했다면.’
야왕은 정황과 정보를 토대로 늘어진 실마리를 끈질기게 뒤쫓았다.
그들도 나름 은밀하게 이동하려고 노력한 티가 역력했지만, 자신의 추적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찾았다.’
야왕은 눈을 빛내며 황하강 하류 부근으로 향하는 길목을 쳐다봤다. 정확히 네 명이 그 길을 따라 이동한 발자취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미처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나 야왕의 눈에는 정확히 보였다.
게다가 한 사람의 발자국이 다른 이들보다 미세하게 깊었다.
‘의식이 없는 동악검선을 둘러업어야 했겠지.’
야왕은 고민했다.
이대로 금월보로 돌아가 보고를 올려도 되겠지만 좀 더 뒤를 밟아 확실하게 위치를 확인해 둬야겠다는 판단도 들었다.
그는 계속해서 흔적을 따라가다가 이내 석림을 발견했고, 그곳을 가로질러 끝에 도달하자 우뚝 멈춰 섰다.
한참을 그곳에 서 있던 야왕은 마침내 은신처의 입구로 보이는 듯한 공간까지 찾아냈다.
풍경과 어우러져, 안력을 끌어올려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은밀한 위치였다.
‘여기까지.’
야왕은 만족한 눈빛을 머금었다.
확실한 위치는 찾았으니 보고가 우선이었다. 이후 다시 금월보주의 명령에 따라 직접 손을 쓸지, 조력자를 받아 함께 움직일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너. 뭐 하는 새끼냐?”
걸걸한 중년인의 목소리에 야왕이 흠칫 놀라 돌아섰다.
***
벌컥.
은신처에 머무른 지 나흘째가 되던 날.
방문이 열리고 안에서부터 선우유란이 걸어 나왔다. 안색은 초췌했고 발걸음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이런!”
담해상이 깜짝 놀라 그녀를 부축했고 나 또한 연무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가 날듯이 몸을 날려 그녀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잠시 실례 좀.”
나는 그 말과 함께 대답도 듣지 않고 선우유란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내력을 불어넣어 지친 기색을 달래주자 그녀의 안색이 조금이나마 회복되는 게 보였다.
“고마워요, 유 공자.”
“그 말은 우리가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내가 옅은 미소를 짓자, 담해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적당한 자리에 앉혔다. 잠시 볕을 쬐며 숨을 돌리던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담해상과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한데 그녀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일단 위급한 순간은 넘겼어요. 장문인의 몸과 단전에 들러붙은 마기를 한곳으로 몰아 간신히 제압해둔 상태예요. 그런데…….”
담해상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말을 이었다.
“마기에 침식당한 시간이 너무 오래된 탓인지 그걸 배출시킬 방도가 없어요. 마기를 배출시키려고 할 때마다, 오히려 반발력이 심해져 진득하게 장문인의 몸에 들러붙는 상태예요. 이제 방법은 두 가지밖에 남지 않았어요.”
“두 가지라면?”
“첫 번째는 마기를 몰아둔 신체 부위를 잘라내는 것. 지금은… 장문인의 왼팔을 거의 통째로…….”
빠득.
순간 담해상은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분노와 통탄을 간신히 억누르는 모양새였다.
선우유란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가 두 번째 방법을 털어놨다.
“다른 하나는 마기를 단전으로 밀어 넣은 후에, 마기 자체를 내공 삼아 장문인께서 직접 소모하는 방법이에요.”
“고의로 주화입마에 빠트리는 겁니까?”
“주화입마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긴 하지만, 그렇게 여기셔도 무방해요. 단지 제가 미리 손을 써서 주화입마의 후유증을 사전에 차단할 텐데. 문제는…….”
문제는 어르신의 폭주를 대비해야 한다는 거였다. 즉, 이성이 사라진 채 살심(殺心)에 뒤덮인 그가 날뛰는 걸 누군가가 직접 막아서서 제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인 동악검선을.
“시간이 많지 않아요. 어떤 방법이든 내일까지는 결정하셔야 해요.”
선우유란의 경고에 담해상과 내가 고심에 빠져들 때였다.
뭐지?
은신처 밖에서부터 몸이 저릿할 정도의 기파가 느껴졌다. 담해상과 선우유란은 느끼지 못했는지 여전히 침묵에 빠져 있었다.
“두 분 다 밖으로는 나오지 마세요.”
내 엄포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천천히 은신처 밖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