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1장 만남(4)
미로 같은 진법 속을 지나쳐 은신처 밖으로 걸어 나갈수록, 몸이 저릿할 정도의 기세가 더욱 진해졌다. 날카롭게 벼려진 한 자루의 검 같은 기세였다.
무공의 경지만 놓고 본다면 지금의 나와 엇비슷한 수준에 놓여 있는 인물. 그런 인물이 은신처 밖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건 그 기세가 낯설지 않다는 거였다. 태산의 기운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 흐름이 담자명과 담해상의 그것과 비슷했다.
태산검존.
자연스럽게 떠오른 이름과 함께 나는 마침내 은신처 밖으로 빠져나왔다.
촤-악!
순간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이었나?’
나는 시야에 잡힌 중년인과 백발의 복면인을 유심히 살폈다.
중년인, 그러니까 태산검존이 한 자루의 검과 같다면 백발의 복면인은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처럼 보였다.
그런 두 사람이 허공에서 얽히고설키며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주로 태산검존이 공격하는 모양새였고 백발의 복면인은 유유하게 공격을 피해내며 어떻게든 달아나려고 눈치를 보는 낌새였다.
나는 태산검존보다 복면인에게 더 집중했다.
눈앞에 있다는 걸 뻔히 아는데도 그 기척이 희미하다. 덕분에 내가 은신처 안에 있을 때는 태산검존의 기세에 가려진 그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듯싶었다.
야왕.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피어오른 이름이었다.
느닷없는 두 인물의 출현에 당황스럽긴 했지만, 지금은 생각하기보다는 몸을 움직여야 할 때라는 판단이 섰다.
팍!
지면을 박차고 일직선으로 야왕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한데 거리를 좁혀가는 그 순간에.
슁!
한줄기 검기가 나를 향해 뻗어왔다.
나는 경로를 비틀어 검기를 피해낸 뒤 태산검존을 쳐다봤고 그 또한 나를 힐끔 흘겼다.
“네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끼어들지 말거라. 저 새끼 다음은 네놈 차례다.”
이 미친놈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말을 간신히 눌러 담았다. 이 짧은 순간에도 야왕은 도주할 틈을 노리면서 동시에 나까지 경계하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태산검존 곽명은 틈을 내주지 않았다.
쉭!
지금까진 간 보기에 불과했다는 듯 그의 몸놀림이 달라졌다.
전전대부터 명성을 떨친 오대살수 중 한 명. 그런 야왕이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다. 있는 듯 없는 듯한 한 줄기 바람처럼 공격을 피해내던 그가 양손에 단도를 꺼내 들어 곽명의 검을 쳐내기 시작했다.
더는 피하는 것만으론 버티기가 벅차다는 뜻이었다.
나는 적당히 거리를 벌려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봤다. 끼어들지 말라니 어쩔 수 없지. 곽명의 승리를 확신하기도 했고.
아무리 야왕이라 불리는 오대살수라고 해도, 정면으로 태산검존과 맞붙어서는 이길 수 없었다.
은밀하게 숨어들어 기습해도 죽일 수 있을까 말까일 텐데. 살수라는 존재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후-웅!
“컥!”
슬슬 야왕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곽명의 검은 태산의 기운을 담은 웅혼한 중검의 묘리를 기반으로 한다. 그 묘리가 야왕을 통째로 에워싸 살수 특유의 보법마저 제압하며 짓누르고 있었다.
“쥐새끼 같은 움직임을 보니 살수 같은데. 감히 살수 따위가 나를?”
곽명은 조소와 함께 제자리에 못을 박듯 야왕의 정수리를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쾅!
“크윽!”
쾅!
“컥!”
검이 내리꽂힐 때마다, 단검을 방패 삼은 야왕의 몸이 구부러졌다. 급기야 무릎을 꿇은 채로 점점 내려앉다가.
챙그랑!
양손에 쥐고 있던 단검마저 저만치로 튕겨 나갔다.
“그만 죽어라.”
곽명은 그 말과 함께 마지막 일격을 내리그었다. 그의 검이 야왕의 머리를 통째로 날려버리려는 그 순간이었다.
쉭! 터-엉!
두 사람 사이로 몸을 날린 내가 검을 쳐내자 곽명이 진한 살기를 뿜어대며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
“네놈 차례라 이거냐?”
곽명이 코웃음을 쳤다. 나를 야왕과 같은 편이라 여기고 있는 듯싶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바닥으로 허물어진 채 축 늘어져 있는 야왕의 혈을 짚어 제압했다. 이어 발길질을 통해 저만치로 날려 보낸 뒤에 다시 곽명과 눈을 맞췄다.
“한 놈은 내 은신처 앞에서 깔짝거리며 기웃거리고 있고. 한 놈은 아예 은신처 안까지 숨어들었었구나. 보아하니 살수 같진 않은데.”
그는 나와 야왕을 비교하듯 번갈아 바라보더니 씩 웃어 보였다.
“네놈이 더 베는 맛이 있겠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호승심이라니.
나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유씨세…….”
정중히 소개를 올리고 사정을 설명하려는 순간이었다.
번쩍!
곽명이 다짜고짜 검을 휘둘러왔다. 슬쩍 피해낸 뒤 노려보자 그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사롭지 않은 놈이로군.”
“그게 아니라…….”
슁!
이번에는 검기가 깃든 검이었다. 제대로 살기가 실린 검이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틀어 눈앞으로 스쳐 지나가는 검날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귓등으로 들어 처먹을 태도였다.
나는 고개를 돌린 방향으로 몸까지 회전시키면서 내공을 끌어올렸고 그대로 곽명의 허리춤을 노렸다.
쾅!
검을 비스듬히 세워 일격을 막아낸 그가 두어 걸음 밀려났다.
“하하. 좋구…….”
안광을 번뜩이며 대소를 터뜨리기에 나는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화살처럼 퉁겨냈다. 깜짝 놀란 곽명이 황급히 검을 쳐내는 게 보였다.
그사이에 나는 허리춤에 있는 나머지 한 자루의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동악검선의 처소에 박혀 있다가 검날이 잿빛으로 물든 채 보검으로 다시 태어난 그 검이었다.
그 검으로 극쾌의 발검술인 일섬단세의 초식을 펼치자, 잿빛 섬광이 곽명을 반으로 갈랐다.
촤-악!
뒤이어 터져 나온 검기가 한 번 더 곽명을 쪼갤 기세로 짓쳐들어갔다. 하지만 어느샌가 자리를 벗어났는지 곽명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뒤통수가 따가워지는 걸 느꼈다.
재빨리 허리를 숙여 공격을 피해낸 뒤 그대로 다시 몸을 휘돌렸다.
뒤따르는 내 검과 다시금 날아드는 곽명의 검이 중간에서 맞부딪쳤고.
카캉!
검과 검이 바싹 달라붙어 불씨가 튀어 올랐다.
나와 곽명은 서로의 얼굴을 코앞에 둔 채 검을 맞대고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여기서 밀려나면 단번에 몸이 두 동강 날 기세여서 내공을 잔뜩 끌어올렸다.
그건 곽명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이마 위로 핏줄이 불거져 나오는 게 눈에 띄었다.
카카캉!
한참 서로의 검을 밀고 당기는 와중에, 곽명이 힘겹게 물어왔다.
“네놈. 정체가 뭐냐?”
“그걸 이제야 묻는 겁니까?”
내가 픽 웃자 곽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치 자신은 이를 악물고 있는 데에 반해, 너는 미소를 지을 정도로 여유가 흘러 넘치냐는 듯 묻는 표정이었다.
물론 여유 따윈 없다. 겉으로 여유 있는 척해 그의 심기를 건드려 흥분하기를 유도한 것뿐.
그리고.
쾅!
검을 퉁겨내며 뒤로 훌쩍 물러난 곽명이 제 검에 검강을 피워 올렸다. 이어 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는 자세에서 마치 태산을 올려다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태산파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태산만허검결. 그중에서도 자신이 가장 자랑하는 절기를 내보이려는지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장기전으로 이어졌으면 불리했을 텐데.’
의도한 대로 곽명은 이번 한 초식에 모든 걸 걸겠다는 심산을 내보였다.
단 한 번의 초식 싸움이라면 나는 승리를 장담할 수 있었다.
해서 천일백야검법의 제육초식을 준비했다. 일 갑자의 내공이 소모되는 만큼 지금의 내가 펼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초식이었다.
내 내공이 백 년을 넘어 이 갑자에 도달했다면 후반부 초식의 시작인 제칠초식을 펼치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우-웅!
태산검존 정도는 육초식으로도 충분했다.
어느새 내 검 위로도 검강이 솟아오른 상태.
마침 곽명이 한 걸음을 내딛는 게 보였고, 나도 그를 향해 마주 몸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고 할 때였다.
“스승님!”
은신처 입구에서부터 담해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와 곽명은 서로에게 검을 겨눈 채로 고개를 돌렸다.
***
“그럼 그렇다고 사정을 이야기할 것이지, 쯧쯧.”
적절한 순간에 등장한 담해상 덕에 얼추 정황을 깨달은 곽명이 혀를 찼다.
멈추지 말고 그냥 초식을 펼칠 걸 그랬나. 속으로 울컥한 마음이 치밀었으나 나는 내색하지 않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럴 틈을 주셨어야죠.”
내색은 안 해도, 잘못은 제대로 짚어야지.
내 말에 곽명은 헛기침하며 기절해 있는 야왕을 슬쩍 쳐다봤다.
“은신처 앞에서 저런 쥐새끼 같은 살수를 마주한 덕에 조금 흥분하긴 했지.”
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 덕분에 야왕을 사로잡았으니까.
곽명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와 담해상 둘이서 야왕이 되돌아갔다가 이끌고 왔을 금월보의 세력들을 상대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보다. 유씨세가의 유진휘라고?”
“그렇습니다.”
“허어.”
곽명이 감탄과 함께 나를 위아래로 흘겼다.
“생긴 건 기생오라비같이 생겼는데.”
“…….”
“그 나이에 벌써 인극의 경지라니. 나보다 한 수 뒤떨어지긴 하지만, 실로 놀라운 수준이야.”
은근슬쩍 우위를 선점하는 말에 내가 작게 웃었다.
“승부는 아직 안 봤는데요.”
“허. 거기다 감히 나를 상대로 호승심까지. 훌륭해.”
“…….”
태산검존이 어떤 인물일지 궁금했었는데 이런 벽창호 같은 성격일 줄은. 내가 입을 다물자 오히려 담해상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장문인의 상태가 어떤지는 선우약가의 삼녀가 설명해드릴 겁니다.”
내가 야왕을 어깨 위로 둘러메며 말했다. 장문인이라는 말에 곽명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야지.”
곽명은 대답과 함께 앞장서서 은신처로 먼저 들어갔고 나와 담해상이 그를 뒤따랐다.
이어 곽명은 정중히 인사를 전해오는 선우유란에게 살짝 고개만 끄덕여주고는 곧장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 또한 의식이 없는 야왕을 구석에 처박아 둔 다음 방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선우유란에게 전해 들었던 대로였다.
평온하게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동악검선. 그의 왼팔 전체가 타들어 가기라도 한 것처럼 시꺼멓게 물들어 있었다.
“지병 때문에 쓰러지신 게 아니라, 마기에 침식당한 거라 했더냐?”
“예. 금월보라는 세력의 계략이었습니다. 재경각주와 호법당주를 비롯해…….”
담해상이 모든 사정을 상세하게 설명해줬다. 곽명의 표정은 시시각각 다양하게 변했다. 중간엔 나를 향해 고맙다는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나조차도 속았던 거로군.”
설명이 끝났을 때 곽명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담해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품속에서 목함을 꺼내 들었다.
“이게 뭡니까, 스승님?”
“재경각주. 그 새끼가 장문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이게 필요하다고 하기에 중원 전역을 뒤지고 다녔지.”
목함 안에는 영험해 보이는 약초 한 뿌리가 들어 있었다.
“설란귀초.”
선우유란이 약초를 알아보곤 쓴웃음을 지었다.
“구하기도 힘들고, 그만큼 귀중한 약초인 건 맞아요.”
재경각주 곽윤이 그걸 미끼로 태산검존을 밖으로 내돌린 거였나.
“그럼 스승님께선 수련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무리 막돼먹은 놈이라도 사리 분별은 할 줄 안다. 다만 은밀하게 움직여 달라기에 요구에 따라주었을 뿐. 곽윤 그 새끼가 배신자였을 줄은.”
곽명이 분노를 씹어 삼키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배신한 장로들이 전부 죽은 지금, 그의 분노가 향하는 대상은 금월보일 것이다.
나와 태산파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나는 곽명을 바라봤다.
“결정하시죠. 장문인 대리로서.”
곽명은 대답 대신 동악검선의 시꺼먼 왼팔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의 의중을 단번에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