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2장 합류(1)
천하십대고수.
현 강호의 최정상에 서 있는 무인들.
그중 하나인 동악검선이 이성을 잃은 채 살심(殺心)에 뒤덮여 날뛴다면, 가히 재앙에 가까운 상황을 초래할 수 있었다.
곽명은 심사숙고를 거듭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장문인의 왼팔은 내가 직접 잘라내겠다.”
간신히 입 밖으로 꺼낸 말인 듯 목소리가 떨렸다. 표정은 착잡했고 눈빛엔 통탄이 가득했다.
그건 담해상도 마찬가지였다.
태산파의 지주이자 모든 제자의 스승이며 아버지인 존재가 동악검선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손으로 장문인의 왼팔을 잘라내야 한다니.
곽명은 이를 악무는 담해상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모든 과오는 온전히 내가 짊어지겠다. 죽는 그 날까지 속죄하며 살 테니, 너를 비롯한 태산의 제자들은 자책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담해상은 대답과 함께 힘없이 방을 빼져 나갔다. 치료를 위해서라고는 해도, 차마 그 광경을 지켜볼 자신은 없는 것 같았다.
그 사이에 곽명은 선우유란을 쳐다봤다.
“네가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닙니다. 부족한 실력 탓에, 이런 방법밖에 제시하지 못한 소녀의 불찰도 있사오니, 대협께서도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어찌 너를 탓하겠느냐? 네게 입은 은혜를 어떻게 갚아주어야 할지 고민해야 할 처지인데. 태산검존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나와 태산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발 벗고 나서주마. 후에 내 직접 만야신의(萬野神醫)도 찾아뵈어야겠다.”
만야신의. 의원들 사이에선 검신 백도천보다도 더욱 추앙받는다는 선우약가주의 별호였다. 그런 그의 의술과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게 선우유란이었고.
두 사람은 말 몇 마디를 더 주고받으며 자책감과 긴장감을 어느 정도 덜어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봤다.
장문인 대리인 곽명이 돌아온 마당에 더는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이제부턴 온전히 태산파가 감당할 몫이었다.
안타깝긴 마찬가지이지만 어쩔 수 있나.
“그럼 저도 밖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덤덤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내 뒤로 스릉, 곽명이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우웅!
내 허리춤의 검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
마기를 머금어 검날이 잿빛으로 물들었기에 대충 묵마검(墨魔劍)이라고 이름 지은 검이었다. 명검을 넘어 보검으로 재탄생했으니 이름 정도는 지어줘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묵마검이 느닷없이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선우유란과 곽명이 나를 돌아봤다. 나 또한 내 허리춤으로 시선을 내렸다.
스르릉!
묵마검은 짙은 떨림과 함께 검집을 빠져나왔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뒤쪽에서 검을 잡아빼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쉭!
완전히 뽑혀 나온 검은 허공으로 떠올라 방 안을 가로질렀다. 이어 빨려 들어가듯이 누워 있던 동악검선의 오른손 위에 안착했다.
나는 그 일련의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긴장을 놓지 않았다.
“선우 소저.”
내가 부르자, 넋 놓고 있던 선우유란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네, 유 공자.”
“담 선배와 함께 은신처 밖으로 피해 계세요.”
“그, 그럴게요.”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방을 빼져 나갔다. 대체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으나 당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또한 깨달은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묵마검을 손에 쥔 동악검선이 누워 있던 자세 그대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으니까. 잘라내기로 했던 왼팔도 어느새 말끔해져 있는 상태였다.
왼팔에 몰아두었던 몸속의 마기가 사지백해를 내달리다가 묵마검을 쥔 오른손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곽명도 동악검선의 몸속을 활보하는 마기의 흐름을 읽어내고는 눈을 빛냈다.
“저건 대체 어떻게 되먹은 검이냐?”
그에게 묵마검이 탄생하게 된 경과를 간략히 알려주자 표정이 굳어졌다.
“마기를 머금은 검이라니.”
“동악검선 어르신의 몸을 침식한 마기와 동류의 마기입니다.”
같은 기운에 이끌려 이런 기사(奇事)가 벌어진 것 같긴 한데. 이게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일단 좀 더 지켜보자.”
“그러죠.”
묵마검을 손에 쥔 동악검선이 어느새 완전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몸속을 장악했던 마기는 이내 모조리 묵마검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침내.
감겨 있던 동악검선의 두 눈이 천천히 떠졌다. 곽명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사숙?”
장문인이긴 하지만 평소에는 동악검선을 사숙이라 부르는 모양이었다. 그런 곽명의 부름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희미하던 초점이 제자리를 잡는 게 보였다. 동시에 동악검선의 전신에서 짙은 살기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마자, 동악검선의 형체가 촛불 꺼지듯 훅 사라졌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는데도 순간 그의 기척을 놓쳤다.
동악검선이 다시 나타난 곳은 곽명의 코앞이었다.
쾅!
“컥!”
곽명이 황급히 검을 뽑아 동악검선의 일검을 막아내는 게 보였고 제대로 막아내지 못해 방문을 부수고도 모자라 밖으로 튕겨나가는 광경이 뒤를 따랐다.
나는 오감을 최대한 끌어올린 채 청로검을 뽑아 들었다.
내 기세를 읽었는지 일검에 곽명을 제압한 동악검선의 시선이 휙 꺾였다.
그 모습은 마치 주화입마에 빠져 폭주한 상태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분명 몸 안의 마기를 묵마검이 모조리 흡수한 상태인데.
‘주화입마가 아니라, 검 자체에 현혹된 건가?’
눈동자만 굴려 슬쩍 동악검선이 쥐고 있는 묵마검을 살폈다. 확실히, 이전보다 더욱 불길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런 거라면 해볼 만하지.
현재의 내 실력으로는 동악검선을 감당할 수 없다. 하지만 단지 검을 손에서 떨어뜨려 놓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
카카캉!
‘생각보다…….’
텅!
‘쉽지 않은데.’
나는 맹수처럼 달려드는 동악검선의 검을 피하고 쳐내면서 이를 악물었다. 방 안에서 시작된 전투는 어느새 마당을 벗어나 연무장까지 이어진 상태.
이성을 잃은 탓인지 동악검선의 검로는 투박하기 짝이 없었다.
대신 공격 하나하나에 온 힘을 쏟듯 맹렬하고 빨랐으며 내공의 조절 따윈 없다는 듯 초장부터 검강을 뽑아내 내 급소만을 집요하게 노리고 있었다.
촤-악!
간신히 상체를 비틀자 검이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갈라진 상처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격했다.
빈틈을 노리고 내지른 검이었다. 정확히는 그의 왼쪽 허벅지를 베어 움직임이라도 제한시켜 두려고 했다.
스악!
확실히 베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는 허공으로 튀어 올라 공격을 피해냈고, 공중에서 몸을 휘돌리며 그대로 검을 내리찍어왔다.
쾅!
내가 서 있던 자리 위로 검이 내리꽂히자 땅이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태산의 정수와 묘리가 가득 담긴 일검이다. 변을 배제해 정직하지만 무겁고 강을 중시해 검 하나하나가 위력적이면서도 느리지 않다.
‘어르신. 이게 태산의 검입니까?’
전생에, 언젠가 서로 실력을 겨뤄보자고 약조했던 게 떠올랐다.
이성을 잃어 투박하고, 살심에 물들어 본능적이고 충동적이지만, 나는 그의 검에서 분명 태산을 엿보고 있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태산의 검을 받아냈고 막아냈으며 피해냈다.
쾅! 쾅!
어느새 장원 전체가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무너져 내렸다.
아무리 동악검선이라도 내공의 한계는 있는 법이다. 조절도 없이 무작정 쏟아내기만 했으니, 점차 그가 휘두르는 검의 위력과 속도가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물론 이때까지 버텨낸다고 내 몸 또한 멀쩡하지 못했다.
몸 곳곳이 갈라지고, 피를 잔뜩 흘려 정신이 몽롱했다.
검을 쥔 손아귀마저 덜덜 떨려왔다.
‘조금만 더.’
나는 완벽한 기회를 잡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쾅! 쾅!
몇 번을 더 검을 쳐내고, 밀려나고, 바닥을 구르기를 한참. 때가 됐다 싶어 내공을 남김없이 끌어올렸다.
제육초식 천신참망(天神慘亡).
검강을 다루는 중반부 초식의 마지막.
인극의 경지를 넘어 지극의 경지에 도달한 동악검선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초식일 것이다. 더군다나 제정신도 아닌 상태라면.
촤라라락!
내 검 끝에서 피어난 검강의 소용돌이가 태산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
챙그랑.
묵마검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비틀거리며 숨을 몰아쉬다가, 묵마검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에 맞춰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내력도, 체력도 바닥 난 상태라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없었다. 간신히 멀어져 가는 의식을 부여잡고 있는 상태였다.
그 상태로 고개만 들자 흐릿한 시야 너머로 자욱하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서서히 걷히는 게 보였다. 그 뒤편에 서 있는 동악검선도.
나만큼은 아니지만, 강기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던 그의 전신에도 거미줄 같은 상처들이 새겨져 있었다.
순백에 가까웠던 무복이 갈가리 찢겨나간 채 붉게 물들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는 오악의 하나라는 태산처럼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내가 희미하게 웃자 동악검선도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약조를 지키러 왔는가? 천영검대주.”
내가 누구인지 알아본 걸까. 아니면 아직 온전하게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가. 뭐가 됐든 간에.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이 말을 전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의식을 놓았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진한 약향이 코를 찔렀다. 익숙한 냄새였다.
전생에 몸에 달고 살았던 금창약과 더불어 내상을 가라앉히는 약재와 기운을 북돋아 주는 약초까지.
주변을 살피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동악검선이 누워 있던 은신처의 방 내부였다. 그 자리에 지금은 내가 누워 있는 것이다.
“윽.”
상체를 일으키다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고통에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시선을 내리자 만신창이에 가까운 몸 상태가 보였다.
참 지독하게 당하긴 했나 싶었다.
상처를 에워싼 천 위로 핏자국이 진득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새삼 지금의 내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이 났다. 이성도 없는 동악검선을 상대로 간신히 버텨내는 수준.
환생하고 나서 반년도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하게 여겨도 되겠다 싶다가도, 하루빨리 전생의 무공을 회복하고 싶다는 일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때는 제대로…….
그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방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안으로 들어오던 선우유란이 의식을 되찾은 나를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유 공자!”
“머리가 울려서 그러는데 목소리 좀…….”
말을 전부 내뱉기도 전이었다.
“유 공자가 깨어났어요!”
선우유란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문밖에서부터 소란스러움이 들려왔다.
“도련님-!”
왕삼의 목소리가 제일 먼저 울려 퍼졌고.
“문주님!”
이자청과 공손량에.
“쯧쯧. 꼴이 말이 아니로군.”
혀를 차는 홍야에 이어 언사룡과 백의검대원들까지.
누구는 방 안으로, 누구는 문밖에서 얼굴만 들이민 채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백의문 전원을 데려오라고 하긴 했는데.
“이목이 쏠리지 않게 적당한 곳에 숨어 지내고 있으라니까 왜 여기까지 와 있어? 태산파 사람들은?”
내가 묻자 왕삼이 자초지종을 털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