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2장 합류(2)
열흘.
쓰러진 지 열흘이나 지났다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사이에 왕삼과 백의문 인원들은 이미 산동에 도착해 눈에 띄지 않는 장원 하나를 빌려 자리를 잡은 상태.
왕삼은 내게 그 소식을 알리기 위해 홀로 은신처로 돌아왔다가,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동악검선과 마주쳤다고 했다.
“태산파의 장문인께선 도련님이 깨어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시다가 어쩔 수 없이 태산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곽명과 담해상을 통해 지금까지의 사정을 전해 들었을 테니까. 태산삼검의 첫째인 일대제자 담자명이 홀로 태산파를 지키고 있을 만큼 태산파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제는 태산검존도 돌아왔고, 동악검선도 어느 정도 몸을 회복했다고 하니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더군다나 사로잡았던 야왕도 동악검선이 직접 끌고 갔다고 들었다.
“태산파와 금월보의 일은 장문인께 맡기고 도련님은 몸을 회복하는 데 전념하라고도 하셨고요. 태산을 지켜줘서 고맙다는 말도 덧붙이셨어요.”
동악검선이 돌아가고 나서 왕삼은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백의문원들을 전부 이곳으로 데려왔다고 했다.
내 몸 상태가 워낙 좋지 않다 보니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걱정도 걱정이지만, 그들의 시선에선 왠지 모를 경외심 또한 느껴졌다.
왕삼이 그 이유를 말해줬다.
“이성을 잃고 날뛰시던 장문인을 도련님께서 직접 제압하셨다면서요?”
“제압?”
“네. 천하십대고수를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으셨다고 장문인께서 직접 얘기하셨어요. 몇 년만 지나도 당신은 도련님을 당해낼 수 없을 거라면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는 건 과장이다. 죽음이 눈앞을 스쳐 지나갈 정도로 간신히 버티고 버티다가 마지막 일격을 욱여넣은 게 다였으니까.
대신 몇 년만 지나면 동악검선을 뛰어넘을 거란 말은 현실이 될 수도 있겠지. 그때까지 전생의 무공을 모두 회복한다면.
나는 왕삼에게 미소로 대답을 대신해 주고는 백의문원들을 바라봤다.
백의검대원은 어느새 스무 명에서 사십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들을 이끄는 이자청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실력이 한층 성장했다는 게 느껴졌다.
그건 언사룡도 마찬가지.
언사룡은 검대주인 이자청을 도와 부대주의 자리를 맡기로 했고.
두 사람을 포함한 백의검대원들의 수련은 홍야가 직접 이끌었다고 했다.
“역시. 백의문의 일장로 답네.”
“소일거리 삼아서 칼 휘두르는 법이나 조금 알려준 게 전부네. 실력이 적당히 형편없어야지. 오죽 답답했으면 내가…….”
“그래. 영감 마음은 내가 잘 알지. 앞으로도 잘 가르쳐 보라고. 다들 실력이 일취월장했던데.”
“일없네.”
말은 그렇게 해도 홍야가 내심 뿌듯해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겉과 속이 참 다르단 말이지.
나는 피식 웃으면서 나머지 인원들과도 반가움의 회포를 풀었다.
괜찮다는데도 다들 하나같이 내 몸 상태를 걱정하는 말을 던져오기에 힐끗 선우유란을 가리켰다.
“선우약가의 의술을 의심하는 거야?”
반농담으로 내뱉은 말인데 백의검대원들이 입을 맞춰 고함을 내질렀다.
“아닙니다!”
“……?”
과하다 싶을 정도로 우렁찬 고함이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한 옆에 서 있던 공손량이 슬쩍 다가왔다.
“젊은 사내들 아닙니까? 사룡일화의 한 분이신 선우 소저는 뭇 사내들에겐 선망의 대상이고요.”
“아.”
하긴. 의술은 물론이고 미모로도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게 그녀였다.
그러고 보니 선우유란에게는 내가 백의문주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었는데. 대충 낌새를 보니 이미 그 사실을 공손량이나 왕삼에게 전해 들은 것 같았다.
공손량이 내 의중을 알아차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한동안 함께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저희가 누군지 알려드려야 했고, 문주님께서 어떤 일을 벌였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사정을 듣기 위해서라도 정체를 밝히는 게 도리라고 판단했습니다. 선우 소저도 절대 이 사실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고요.”
“그랬군.”
그녀가 알든 모르든 딱히 상관없는 일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다만 내가 백의문의 문주라는 걸 깨달은 그녀의 태도가 사뭇 조심스러워진 건 사실이었다. 크든 작든, 한 문파의 문주였으니까.
“백의문의 문주이기 이전에, 저는 유씨세가의 소가주입니다. 평소처럼 대하시죠.”
“그, 그래도 될까요? 사실 호칭도 유 문주님이라고 해야 할지, 평소대로 유 공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호칭은 뭐. 편한 대로 하시고요.”
“그럼 그냥 원래처럼 유 공자라고 부를게요. 그리고…….”
선우유란이 내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아직 이렇게 돌아다니시면 안 돼요. 상처가 덜 아물었다고요.”
***
톡. 톡.
금월보주가 앉은 자리에서 탁자를 두들겼다. 그의 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은 상태였고, 탁자의 맞은편에는 듬직한 체구의 장년인 하나가 팔짱을 낀 채 침묵이 깨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금월보주가 입을 열었다.
“야왕이 당할 줄이야.”
연락이 끊긴 지 열흘이 훌쩍 넘었다.
특별히 멀리 떠나야 하는 일이 아니면 최소 삼 일에 한 번은 보고를 해왔었는데.
그뿐인가.
“태산검존이 복귀했다고? 거기다 동악검선마저 멀쩡히 운신할 정도로 몸을 회복했다?”
금월보주의 질문에 장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월보의 무력 집단 중 하나인 지금단(地金團)의 단주.
야왕이 복귀하기 전까지 태산파의 동태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인물이기도 했다.
“예. 똑똑히 봤습니다. 동악검선과 태산검존이 옥황봉으로 올라가는 그 모습을.”
감시가 들킬세라 최대한 먼 거리에서 지켜보긴 했으나, 그 기세와 존재감은 분명 동악검선이 분명했다.
불과 며칠 전에 일이었고, 그 뒤로 곧장 금월보로 복귀해 보고를 올리는 와중이었다.
“유씨세가의 소가주와 선우약가의 삼녀. 두 연놈이…….”
금월보주는 골치가 아파져 온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크게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두 사람 때문에 금월보의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
태산검존과 동악검선이 복귀했으니 더는 태산파를 노릴 수도 없게 됐다. 태산검존은 몰라도 동악검선은 현재 자신의 실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절대고수였으니까.
“어쩌시겠습니까? 차라리 지금 당장 쳐들어가시죠? 동악검선이 의식을 차렸다고 해도, 몸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겁니다. 저와 제 수하 놈들이 직접 그 노인네를…….”
“아가리 다물어. 주제도 모르는 새끼야.”
금월보주가 분노와 살기를 토해내자 지금단주가 바짝 얼어붙었다.
웬만한 일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여유롭게 대처하던 그였는데. 지금단주로서는 금월보주가 이렇게 분노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여기까지인가.”
금월보주가 탁자 밑에서 금월미리역혼술의 비급을 꺼내 들었다.
수많은 돈과 시간을 쏟아부었는데, 남은 거라곤 이 비급 한 권뿐이었다.
“련주께서 용서해 주실지 모르겠구나.”
“이대로 물러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야왕이 당했다. 만약 내가 동악검선이었다면, 야왕을 죽이지 않았을 거야. 야왕을 통해 금월보의 위치와 정보를 캐냈겠지. 조만간 이곳으로 태산파의 제자들이 밀고 들어오겠군. 야왕에겐 혈옥고도 먹이지 않았으니까.”
“…….”
혈옥고.
금월보의 인물들이 정보를 발설케 하지 않기 위한 통제 수단. 그중에서도 금월보의 위치만큼은 절대 불지 않도록 만들어두었다.
위치를 발설하려는 마음을 먹는 순간, 내장 기관 속에 잠들어 있던 혈옥고는 잠에서 깨어나 장기들을 먹어 치운다.
하나, 야왕에게는 혈옥고를 심어두지 않았다. 그를 믿었고, 그의 실력을 믿었으니까.
그런 야왕이라도 태산검존이나 동악검선을 당해낼 순 없었겠지.
“본단으로 복귀해야겠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하릴없이 결정을 내렸다.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정리해라. 챙길 것만 챙기고 나머진 건물과 함께 싹 태워버려야 한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예.”
지금단주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곧장 방을 빠져나갔다.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모양새였으나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
***
“이제 막 깨어나셨는데, 태산으로 가시겠다고요?”
왕삼이 깜짝 놀라 나를 바라봤고, 나는 입에다 검지를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해라. 선우 소저가 들으면 길길이 날뛸라.”
“당연히 날뛰시겠죠! 상처가 아직 제대로 아물지… 읍!”
난 황급히 녀석의 주둥이를 틀어막았다.
“잠깐 다녀오는 거야. 이대로 있다간 놈들을 놓칠지도 모른다.”
“놈들이라면…….”
그래. 금월보.
동악검선과 태산검존의 부재를 틈타 태산을 치려던 놈들이다. 한데 만약 두 사람이 복귀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놈들은 계획을 변경해 다시 흑막 속으로 모습을 감출지도 몰랐다.
동악검선의 존재감은 놈들로서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니까.
사로잡았던 야왕을 끌고 갔다고 하니 지금쯤 금월보에 대한 정보를 얼추 캐냈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동악검선이 제자들을 이끌고 직접 나섰을지도 모를 상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마음 편히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다녀오마.”
“알겠습니다.”
“홍 영감이랑 이자청에게도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대비하고 있으라고 전해주고.”
“예, 도련님.”
나는 왕삼의 대답을 뒤로하고 은밀하게 은신처를 빠져나갔다. 선우유란에게 들켰다간 또다시 뒷덜미가 붙들려 방 안으로 끌려들어 갈 수도 있었으니까.
이후엔 옥황봉을 향해 전력을 다해 내달렸다. 외상은 회복되지 않았어도 내상은 이미 모두 치료된 상태였다.
텅 비어 있던 단전도 반나절의 운기로 내공을 가득 채워두었다.
파-앙!
칠성에 다다른 괘월선보는 시야에 들어오는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게 해주었다.
주홍빛이었던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질 때쯤에 나는 태산파에 도착했다. 속도를 유지한 채 담을 뛰어넘었고 전각의 지붕을 밝으며 계속 안쪽으로 날듯이 이동하다가 잠깐 멈추어 섰다.
그러고 보니 장문인의 처소를 내 손으로 무너트렸었는데.
나는 동악검선의 기감을 쫓다가 눈을 빛냈다. 곽명의 거처인 혜어각에서 동악검선의 기세 또한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시 지붕을 밟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가 혜어각의 마당에 내려앉았을 때였다.
“아무리 태산의 은인이라지만 저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담을 뛰어넘는 건 좀 아니지 않느냐?”
“그러게 말입니다, 사숙.”
이미 내 기척을 알아차리고 있던 건지 곽명과 동악검선이 마중을 나온 듯 마당 중앙에 서 있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어르신?”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묻자 동악검선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해야 했을 말을 가로채는구나. 몸을 회복하는 데 전념하라고 했는데. 성치도 않은 몸으로 왜 그리 급하게 뛰어온 게야?”
나는 곧장 말을 이었다.
“금월보의 위치는 알아내셨습니까?”
“야왕이라고 했던가. 쉽진 않았지만, 알아냈네. 며칠 뒤엔 은퇴한 곽자배의 장로들 몇몇이 복귀하기로 했고. 이후에 곧장…….”
곽윤을 비롯한 배신자들 덕에 빈자리를 메꿔야 했을 터였다. 그게 우선이고, 금월보는 그다음이다. 장문인으로서는 당연한 처신이었다.
하지만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더는 시간을 주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