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3장 정리(1)
피-잉!
한줄기 지풍(指風)이 내 미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고개를 꺾어 피했는데 스쳐 지나가는 지풍의 여파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퍼석!
지풍은 내 뒤쪽에 있던 거목을 꿰뚫고 지나가 소멸했다. 이어 꿰뚫린 자리가 불에 타들어 가듯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빛살처럼 빠르면서 극양(極陽)의 기운을 내포한 지법.
촤아악!
어느새 지풍의 궤적을 따라 짓쳐들어온 금월보주가 이번엔 내 심장을 노리고 손을 뻗었다.
터-엉!
날카로운 기세를 검으로 쳐내자 묵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검과 손이 부딪쳤음에도 이런 소리라니.
“대양용조수(大陽龍爪手)?”
과거의 기억이 저절로 떠올라 혹시나 하고 물었는데 금월보주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걸 알아보다니.”
못 알아볼 리가.
대양용조수는 전생의 내가 죽인 마교의 장로 중 하나가 익히고 있던 성명절기였다. 놈의 손에 죽어 나간 정천맹의 무인이 수두룩했고 놈이 부러트린 무기가 수백에 달했다.
지풍에 담긴 열기는 피부를 스치기만 해도 기운이 달라붙어 상처를 불태웠고 양손 위로 검강에 버금가는 기운을 에워싼 금나수는 그 어떤 명검도 버텨내지 못했으니까.
한데 그런 마교의 무공을 금월보주가 익히고 있다니?
내가 알기론…….
“대양용조수를 어디서 배웠어?”
“싸우는 와중에도 그게 궁금한가?”
“궁금하지. 대양용조수의 비급은 정천맹의 천상비고.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어야 하니까.”
“…….”
비급을 통해 익힌 게 아니라 누군가가 놈에게 전수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놈의 반응을 보니 내 예측이 어느 정도 들어맞은 것 같았다.
“마천섭혼술의 특징을 떠오르게 하는 사술도 그렇고. 정천맹에 있어야 할 마교의 무공을 이것저것 가져다 쓰는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무슨 말이냐면… 됐어. 곧 죽을 놈한테 무슨 말을 더할까.”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네놈만큼은…….”
금월보주는 결연한 다짐을 지껄이다가 내가 휘두른 검을 손으로 퉁겨냈다.
텅! 텅!
쉬지 않고 연이어 검을 뻗어 몰아붙였고 금월보주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혼신을 다해 내 공격을 막아내기에도 벅차다는 듯.
“큭!”
공방이 이어질수록 놈의 양손에 맺힌 기운이 점차 바스러져 갔다. 전생에 상대했던 마교의 장로와 비교하자면 그 기세가 천지 차이였다.
대양용조수가 대단한 무공인 건 맞지만, 금월보주의 성취는 기껏해야 칠성을 넘어 보이지 않는다.
자신보다 하수에겐 두려운 위력을 보여줄 수 있어도 나를 상대로는 아니지.
차라리 본래 익히고 있는 무공 중 가장 성취가 높은 무공을 사용했다면 이 정도로 일방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금월보주 또한 그제야 그걸 깨달았는지 허리춤의 검을 뽑기 위한 틈을 노리고 있었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진작 뽑았어야지, 어리석은 새끼야.”
나는 조소와 함께 더욱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기세를 잡았는데 검을 뽑게 놔둘 수는 없었으니까.
터터텅!
상중하. 머리부터 하체까지의 급소를 검으로 찌르자 놈이 양손을 휘둘러 전신을 수비했다.
이번엔 좌우의 급소를 더해 다섯 군데를. 다시 대각의 네 군데까지.
무차별적으로 베고 찌르며 휘어들어 가는 내 공세에 금월보주는 점차 피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쉬지 않고 계속 내공을 끌어올렸다. 천일백야검법은 기본적으로 극쾌가 바탕이 되는 검법.
촤자자작!
마침내 내 검이 멈췄을 때, 놈의 전신에는 길고 깊은 검상 수십 가닥이 거미줄처럼 엉켜 있었다. 상처에서 새어 나온 핏물은 바닥을 적실 정도.
그런데도 놈은 비틀거릴지언정 쓰러지지 않고 버텨냈다. 그 상태로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한차례 훑더니 한숨을 토해내는 게 보였다.
금월보주와 함께했던 스무 명의 무인들이 대부분 백의검대원들의 발 아래에 쓰러져 있는 상태였으니까.
“마지막까지 패착만 두다 가는구나.”
체념이라도 한 듯 놈은 남아 있는 한 줌의 힘까지 끌어 모아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검지 위로 뜨거운 열기가 모여들었다. 동귀어진도 각오한 마지막 한 수.
나는 방심하지 않고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며 놈을 응시했다.
***
번쩍!
하는 섬광이 터졌다. 이어 금월보주의 목 위로 가느다란 혈선이 그어졌고 그 선을 따라 분리된 놈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나는 긴장을 풀며 놈의 뒤에 서 있는 인영을 쳐다보았다.
“어르신.”
전신을 피로 붉게 칠한 동악검선. 그는 바닥으로 허물어지는 금월보주의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몸을 돌보면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건만, 참으로 말을 들어 먹지 않는 녀석이로구나.”
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의 표정에서는 안도감과 고마움이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하마터면 밑에 놈들을 상대하다가 금월보주를 놓칠 뻔했다는 듯.
물론 동악검선이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끝끝내 도주한 금월보주의 뒤를 밟아 마무리를 지었을 것이다. 내가 나선 덕분에 그 번거로운 과정과 시간 낭비를 미리 방지할 수 있었고.
그에겐 금월보를 처리하는 일 말고도 배신자들로 인해 세가 기운 태산파를 보살필 책무도 남아 있는 상황이었으니.
“무리하지는 않았느냐?”
동악검선이 인자한 미소와 함께 물어왔다. 백의문주임을 증명하는 백색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았다. 담자명에게 이미 백의문에 대해서도 전해 들었겠지.
태산파와 나의 인연은 거기부터가 시작이었으니까.
나는 가면을 벗어 품속에 챙겨 넣은 뒤 금월보주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네. 딱히요.”
“다행이구나. 그건 그렇고 저들이 백의문의 무인들인가? 널 닮아 다들 기세가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데.”
“아직 부족한 녀석들입니다. 어르신께 소개하기엔 부끄러울 정도로.”
“겸손이 지나치구나. 더군다나 만검노수가 네 밑에 있다니.”
동악검선의 등장에, 금월보의 무인들을 모조리 처리하고 숨을 돌리고 있던 백의문원들은 후다닥 검을 집어넣고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천하십대고수의 일인.
태산파의 장문인.
무림의 지난 수십 년 역사를 관통하는 절대고수.
동악검선은 그 존재만으로도 모든 강호인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니까.
다만, 홍야는 동악검선의 시선을 피하며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이오, 만검노수?”
어라?
나는 헛기침을 하는 홍야와 어르신을 번갈아 쳐다봤다. 내가 모르는 과거에 둘이 만난 적이 있던 건가?
“과거에 어르신께 두들겨 맞은 적이라도 있는 거야? 시장 바닥에서 당과를 훔쳐 먹다 걸린 애새끼처럼 왜 기가 죽어 있…….”
“조, 조용히 해라!”
버럭 소리치는 반응에 나는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추측이 정확히는 아니어도 얼추 들어맞은 모양새였다.
동악검선이 내게 말을 이었다.
“한참 오래전의 일이다. 내가 태산의 장문인이 되기도 전에 일이지. 이십여 년은 지났으니. 그때…….”
와중에 홍야가 끼어들어 대화는 다시 두 사람이 주체가 되었다.
“하. 정확히 이십사 년이오.”
“그걸 기억하고 있었군? 언젠가 내게 복수하겠다며 이를 가시긴 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복수는 무슨? 그때 제대로 승부를 내지 못했으니 미래에 제대로 싸워보자고 했을 뿐인데.”
“꽁지 빠지게 도망치셨으니 승부를 낼 겨를도 없지 않았소?”
“아니, 내가 언제!”
홍야는 악을 쓰다가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느끼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흥분하는 꼴이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게 되어버렸다는 듯. 그는 인상을 구기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홍야를 멀뚱히 쳐다봤다.
내게도 복수. 어르신에게도 복수. 하필 복수의 대상이 그 두 사람이라니. 애석하지만 홍야에게는 이룰 수 없는 목표라는 생각이 들었다.
***
금월보의 건물이 전부 잿더미가 된 상황인지라 별다른 정보를 건질 수 없었다.
대신 동악검선은 금월보의 무인 중 지위가 높아 보이는 몇몇을 사로잡았고 나는 금월보주와 놈과 함께했던 스무 명의 시체에서 몇 가지를 건져냈다.
이후 주변을 정리하고 태산파로 돌아왔을 때 나는 곧장 동악검선과 집무실에 마주 앉았다.
“사로잡은 놈 중에 금월보의 무력 집단을 이끌던 단주급 무인이 있다. 지금단의 단주라고 하더구나. 놈을 심문하면 그럭저럭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게야.”
“다행입니다. 아, 놈을 심문할 땐…….”
어르신에게 과거 흑선과 함께 사로잡았던 복면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참상을 이야기해 주었다.
특별한 금제가 걸려 있다는 말에 그는 경각심을 일깨웠다.
“곽명이에게 얘기해 놓겠다.”
“예.”
다음은.
나는 탁자 위에 비급 세 권과 목함을 차례대로 펼쳐 보였다.
“이건?”
“금월보주와 놈들의 시체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비급은 각각 마천섭혼술, 대양용조수. 마지막으로 금월미리역혼술.
두 가지는 마교의 무공이었고 마지막은 금월보가 동악검선에게 펼치려던 사술의 비급인 듯 보였다.
문제는 비급의 종류가 아니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천상비고에 잠들어 있어야 할 비급이 아니더냐?”
천상비고는 맹주와 비고를 관리하는 지위의 인물, 그리고 두 사람이 허락한 자들에게만 출입이 허용되는 장소였다.
동악검선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차갑게 얼어붙었다.
정천맹에도 배후 세력의 입김이 닿아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천상비고까지 들락거릴 정도라면.
어르신은 나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침음을 흘렸다.
“현 맹주는 아니겠지.”
“그렇겠죠.”
확신이 아니라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이번에 겪은 모든 상황을 조만간 맹에 보고한 뒤에 맹주와 맹의 장로들과 의논할 계획이었는데.”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닌 듯싶습니다.”
“후우.”
동악검선이 깊은 한숨과 함께 정천맹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에서 검신 백도천을 향한 그리움이 가득 묻어나왔다.
검신이 정천맹을 아니, 적어도 강호를 떠나지만 않았더라도.
그 심정은 내 가슴속에 박혀 있는 심정이기도 했다. 그래. 검신 영감이 맹주직에서 물러나지만 않았더라도.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나서, 나는 말을 이었다.
“일단 이 비급들은 어르신께서 보관해 주세요.”
“그렇게 하마. 절대 세상 밖으로 드러나서는 안 되는 무공들이니까.”
그의 다짐에 나는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동악검선의 곁보다 안전한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비급은 그렇게 처리하기로 하고 나서 동악검선은 이번엔 목함을 쳐다봤다. 내가 조심히 목함을 열었고 그 안에서부터 풍겨져 나오는 영기에 우리는 나직이 감탄했다.
“상질의 영약이로구나.”
“구근활력초라고 합니다. 금월미리역혼술. 저 사술을 펼칠 때 쓸 재료로 놈들이 공수한 거라고 하더군요.”
“구근활력초? 들어본 적이 있지. 그 정도로 뛰어난 영약을 재료로 쓰는 사술이라니.”
동악검선은 차라리 비급들을 불태울까 하는 생각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술의 대상자로서 직접 그 지독함을 겪어보았으니까.
그런 그가 씩 웃으면서 목함을 내 앞으로 밀어냈다.
“영약은 주운 놈이 임자지. 네가 복용하거라.”
“그럴까요?”
내가 마주 웃자 동악검선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한 번쯤은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이런 영약을 눈앞에 두고 그럴 리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