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3장 정리(3)
“그러니까. 월영련이라는 이름 말고는 딱히 제대로 된 정보는 없다는 거네요?”
내 물음에 곽명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금제에 대해서 미리 언질을 받았음에도 조치는커녕 다소 마음이 급해져 일을 그르쳤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악검선과 나는 그를 탓하지 않는다. 우리라고 딱히 방도가 있었겠는가.
그만큼 놈들의 금제가 지독했을 뿐이었다.
다행히 우리라도 놈들의 정체를 인지하고 있다는 점과 정천맹을 비롯한 중원 각지에서 또 다른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 위안이 됐다.
나는 동악검선을 바라봤다.
“어르신께선 다른 천하오주의 주인들과 연이 있으시죠?”
“물론이지. 정마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진 해마다 정기적으로 회합도 했었고.”
“그럼 어르신께선 태산파를 제대로 수습하신 후에 나머지 천하오주를 살펴봐 주세요.”
“놈들이 본문 말고도 다른 천하오주를 노리고 있다?”
“그럴 가능성이 크죠. 아, 일단 독고세가는 제외하고요.”
“독고세가라…….”
현 정천맹의 맹주가 바로 독고세가의 가주였다.
“맹주를… 의심하는 게야?”
“아뇨. 의심은 아니고. 제가 직접 살펴보려고요.”
“직접 살펴봐? 어디를?”
동악검선은 의중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나라고 딱히 묘수가 있는 건 아니다. 말 그대로 직접 살펴볼 생각이다. 캐낸 정보가 한정적이니 몸으로 때울 수밖에.
“정천맹이요.”
“맹에 들어가겠다는 거냐?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도 모를 곳으로 혼자?”
태산을 배신한 곽자배의 장로들처럼 정천맹에도 그와 같은 배신자가 있을 것이다. 천상비고에 잠들어 있어야 할 마교의 무공이 드러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또한, 그런 배신자들의 숫자나 위세가 곽자배의 장로들과는 수준이 다를 게 분명했다.
더욱이 월영련은 유씨세가의 소가주와 백의문주의 존재를 주시하고 있을 터였다. 금월보의 계획을 송두리째 뒤엎은 게 나였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내가 직접 정천맹으로 가게 된다면 목숨을 위협받는 순간이 올 것이다.
내가 노리는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놈들에게는 금월보의 계획을 방해한 저를 처리할 기회가 되겠죠. 찾을 수 없다면 차라리 모습을 드러내게 할 겁니다.”
“너 자신을 유인책으로 쓰겠다고? 너무 위험하다. 좀 더 확실하게 조사를 하고 난 뒤에, 월영련에게 가담한 자와 아닌 자를 구별해 조력을 구하는 게…….”
“그건 어르신이 해주세요. 놈들의 이목이 제게 쏠린다면 어르신이나 태산파도 움직이기가 편할 겁니다.”
“허.”
“어차피 놈들은 저와 저희 가문. 그리고 백의문을 벼르고 있을 겁니다. 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저 혼자 놈들의 표적이 되는 게 맞아요.”
월영련의 칼날이 산서가 아닌 나를 향하게 만드는 게 내가 정천맹으로 향하는 주된 이유였다.
게다가 나는 이미 정천맹 내부에 있을 적과 아군을 하나씩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배신자가 확실시되는 인물 하나는 바로.
“한천자(寒天子) 도경수.”
“한천자라면…….”
나는 어르신에게 홍야의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수천뇌옥에 갇혀 있다가 월영련의 인물로 추정되는 사내와 한천자 도경수로 인해 풀려났다는 말에 어르신은 깜짝 놀랐다.
수천뇌옥의 관리자를 겸하는 장로가 한천자였고, 그런 한천자는 전대 맹주인 검신의 추종자 중 하나였다.
검신의 말이라면 맨땅을 파서 금이라도 캐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는데.
그의 배신이 믿기지 않았던지 동악검선은 충격받은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앉아 있던 곽명은 이를 갈며 분노를 표출했다.
“도경수 그 새끼가? 놈이 배신자인 게 확실하다는 거지? 그렇다면 내가 직접 가서 놈을 끌고 오겠다.”
곽명은 당장에라도 검 한 자루를 쥐고 정천맹으로 달려갈 기세였다.
“정천맹의 장로를 어떻게 잡아 오시게요? 단신으로 맹과 전쟁이라도 벌이려고요?”
아무리 태산검존이라도 그건 불가능했다.
내 말에 곽명은 눈을 부라렸다.
“그러는 너는 어찌할 생각인데?”
어찌할 거냐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 안으로 들어가야지.
“일단은 정천맹의 무사가 되겠습니다.”
***
입맹.
수많은 정파의 강호인 중에는 정천맹의 무사가 되는 걸 일생의 목표로 삼는 이들이 많았다.
하다못해 정천맹의 하급 무사만 되어도 강호에서 위상이 달라지니까. 위상뿐인가. 안정적인 급여. 대우. 명성 등.
정천맹에서나 하급 무사지, 강호에서는 일류고수로 평가받는 이들이 시험을 치르고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해야 간신히 맹의 하급 무사가 될 수 있었다.
그전에 실력은 물론 확실한 신분까지 있어야 시험이라도 볼 기회가 생겼고.
그런 면에서 전생의 내가 천영검대에 들어가게 된 건 검신 영감과 정마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연을 얻어 실력은 부족할 게 없었으나 신분이 불확실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유씨세가의 소가주이자 과거 소룡단의 일원이었다는 신분이 존재했다. 그리고 실력도…….
“네 실력이면 천군지사대(天君指使隊)에도 지원할 수 있지 않겠느냐?”
천군지사대.
천영검대가 맹주의 기밀 검대였다면 천군지사대는 공식적인 맹주의 친위대였다. 지사대주 휘하 여섯 개의 조로 구성된 최정예 무력 집단.
“거긴 너무 눈에 띄어서요.”
맹주의 친위대인 만큼 천금지사대는 정천맹을 상징하는 무력 집단이라고 평가받고 있었다. 내부에서는 물론 외부에서도 관심이 가득한 자리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과거의 나와 천금지사대주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정확히는 놈이 천영검대를 못마땅해했지.
‘여전히 그놈이 대주로 있으려나.’
정마대전의 종전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으니 당장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럼 어디로 지원하려고?”
동악검선은 어디든 내가 지원만 하면 합격할 거라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든 내가 가고자 한다면 갈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중 크게 눈에 띄지 않으면서 맹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곳.
“집형당의 복룡추호대(伏龍追呼隊)요.”
“집형당이면 한천자 그놈이 당주로 있는…….”
“예. 정체가 드러난 적은 가까이에 두는 게 낫겠죠.”
수천뇌옥의 관리를 겸하는 집형당주 한천자.
복룡추호대는 그런 집형당 산하의 무력 단체로서 내외적으로 죄를 지은 강호인들을 잡아들이고 벌하는, 형을 담당하는 세력이었다.
덕분인지 맹 내에서는 집형당과 복룡추호대의 무인들과 웬만하면 척을 지거나 마찰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더불어 항상 중립을 표방해야 함으로써 다른 세력과 교류도 하지 않는 삭막한 집단. 지금의 내게 딱 어울리는 자리였다.
“복룡추호대라…….”
동악검선은 턱을 쓰다듬으며 내 의견을 읊조리다가 눈을 빛냈다.
***
입맹을 결심한 이후, 나는 일단 빠르게 가문으로 복귀했다. 적어도 부모님 두 분에게는 그 결심을 알려야 했으니까.
그런 내 품엔 서찰 두 장이 쥐어져 있었다.
두 장 모두 동악검선이 작성한 서찰로, 한 장은 내 부모님께 전하는 서찰이고 나머지는 복룡추호대주에게 전하는 추천서였다.
‘한천자 그놈이 배신자라고 해도 집형당 모두가 배신자는 아닐 게야. 그중에서도 복룡추호대주는 나와도 안면이 있는 믿을 만한 녀석이지. 공식적인 입맹 시험을 통과하는 게 먼저겠지만 그건 네게 어렵지 않은 일일 테니 차치하고.’
‘시험을 통과하면 각자 충원이 필요한 세력들이 통과자들을 선출해 뽑아간다. 내 미리 북룡추호대주에게 소식을 전해놓으마. 녀석이 먼저 너를 찾을 테니, 그 서찰을 보여주면 될 게다.’
동악검선은 나를 도와주겠다고 입맹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조언까지 해줬다. 나로서는 이미 모두 알고 있는 과정이나, 모른 척 감사를 표하며 태산을 떠났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 강호행에서 돌아온 나를 맞이하겠다고 집안이 시끌벅적해졌다.
왕삼에게 내가 태산의 장문인을 우연히 만나 견식을 쌓을 기회를 얻게 됐다는 식으로 둘러대라고 해뒀는데.
“네가 정말 동악검선이라 불리시는 태산파의 장문인을 뵙고 왔다고?”
아버지는 그 사실에 크게 기뻐하며 내 인연을 축하해 주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녔지?”
어머니는 그저 내 안위가 전부라는 듯 나를 끌어안으며 몸 곳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예. 별 탈 없이 잘 다녀왔습니다.”
그런 두 분에게 미소로 화답한 뒤 집에 돌아왔다는 안락함을 느끼며 나흘간 평온한 휴식을 취했다.
가문의 식구들과도 많은 얘기를 나눴고 금검대주인 위사평과 더불어 대원들의 무공 상태도 점검해줬다.
그들은 공통으로 하나같이 내 강호행에 대해 궁금해했다.
강호에 출도했으니 응당 이런저런 소문들이 들려올 법도 한데, 유씨세가 소가주의 관한 얘기가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며.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남에서 시작해 태산파에서 끝난 여정은 모두 은밀하게 이루어진 일이었고 태산파의 사람들에겐 나에 대해 함구해 달라고 부탁해 둔 상태였다.
평범한 소가주의 강호행이라고 하기엔 벌인 일이 너무 지나쳤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태산파의 장문인을 만나 여러 가지 조언과 무(武)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태산항마장을 배웠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고.
“와. 천하십대고수께서 직접 가르침을…….”
“어떤 가르침이셨죠? 네?”
“소가주님이 직접 검도 섞어보셨어요?”
“일격도 버티지 못한 채 쓰러지고 그러신 건 아니시죠?”
금검대원들은 눈을 반짝이며 어미 새를 바라보는 양 내 뒤를 쫓아다녔다. 내가 말을 안 해주니 왕삼을 들볶기 시작했는데 그에게서도 별다른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도련님께서 태산파의 장문인과 대등하게 싸웠다는 얘기를 들으면 난리가 날 텐데…….”
녀석은 입이 근질거려 죽겠다는 듯 그 자랑스러운 일을 속에 눌러 담으며 도망을 다니기에 바빴다.
그렇게 다시 며칠이 지났을 때.
나는 부모님 두 분을 앞에 모신 채로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입맹을 하려고 합니다.”
결심을 내보이자 두 분의 표정에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소룡단의 일로 폐인처럼 살았던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한 불안감이 첫째였고 놀람과 당혹이 그 뒤를 이었다.
방 안에 꽤 오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 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강호행을 다녀오는 동안 이미 결정을 내린 모양이구나.”
“그렇습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느냐?”
이유?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해서 만일 유진휘가 이런 결정을 내렸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하는 가정을 떠올렸다.
“소룡단이 전멸했을 때, 제 강호는 거기서 끝인 줄 알았습니다. 지금 와서 보니 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함께했던 단원들을 위해서라도 끝을 내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만일이라는 가정이었을 뿐인데, 어쩌면 그게 유진휘가 바라고 내가 그에게 바라며 부모님이 자식에게 바라는 이유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어지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어머니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랬군. 그랬어.”
“그리고 동악검선 어르신께서 추천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태산파의 장문인께서?”
어르신의 서찰을 건네주자 두 분의 시선이 한데로 모였다.
살펴본 바로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내 무위가 뛰어남에 감탄했고 마침 정천맹에 입맹할 수 있는 좋은 기회와 자리가 생겨 고려해봄 직하다는 서찰.
월영련에 대한 진실을 숨기기 위해 꾸며낸 서찰이지만, 두 분으로서는 자기 자식이 태산의 장문인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가 될 서찰이기도 했다.
다행히 그 서찰 덕분에 부모님의 표정이 밝아지는 게 보였다.
“진휘야.”
“예, 아버지.”
“네 뜻을 존중하마. 그리고 응원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