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4장 입맹(1)
탁.
부모님에게 입맹 결심을 알린 이후 좀 더 대화를 나눈 뒤에 방에서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분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휘가 많이 변했어요.”
어머니의 그 말에 속으로 뜨끔했다. 확실히 진짜 유진휘와는 많이 달라졌겠지.
“변한 게 아니라 예전 모습을 되찾고 있는 거라 여기고 싶소. 밝고 당차며 불의를 참지 못하던 내 아들 말이오.”
“…그렇네요. 그게 우리 진휘였죠.”
“더불어 예전 모습을 되찾으면서도 그때보다 좀 더 성장한 것 같지 않소? 약관이 되었으니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긴 하지만 이제는 어엿한 소가주로서의 면모를 풍기고 있으니.”
“소룡단 시절 얻은 상처에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이 그렇게 안쓰러웠는데, 저 혼자 그걸 이겨내면서 저렇게 훌쩍 어른스러워지니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속상한 부분도 있는걸요.”
“무릇 부모라면 다 같은 마음이겠지. 좀 더 의지해줘도 되었을 것을.”
“그래도 속상하다는 건 아주 조금이고. 저 또한 제 아들이 자랑스러워요. 게다가 태산파의 장문인께서 진휘를 인정해 주셨잖아요.”
“하하. 어릴 적부터 무재가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무려 천하십대고수가 아니오?”
“그래서 더욱 안심돼요. 그런 분께서 추천해 주신 만큼 정말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들고요.”
엿들으려던 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두 분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 알게 됐고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진 두 분의 기대와 바람을 저버리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동악검선이 써준 서찰 또한 큰 도움이 됐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단순히 월영련에 대한 진실과 내가 정천맹에 입맹하려는 진짜 명분을 감추기 위해 꾸며낸 서찰이라고만 여겼다.
하나 그 안에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한 동악검선의 배려가 깃들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서찰 하나에 저렇게 안도하고 기뻐하실 줄은.
나는 미소와 함께 조용히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
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폐부로 스며드는 아침 공기가 차가운 걸 보면 어느덧 계절이 가을을 벗어났음을 깨달았다.
정천맹의 무사를 뽑는 입맹 시험은 매해 겨울에 치러진다. 해서 지금껏 수련에 매진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 달간의 수련은 가문 사람들 눈엔 시험을 대비하기 위한 수련으로 비쳤을 테지만, 실상은 다음 경지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과 기둥을 세우는 작업이었다.
이 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더없이 정순하게 다듬고 전생에 얻었던 깨달음을 처음부터 되돌아보며 그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는 단단한 그릇, 즉 신체를 만드는 것.
지극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선 정기신(精氣神)의 조화가 필요했다. 지금은 내공과 신체가 깨달음과는 동떨어진 부조화에 놓여 있는 상태.
그 과정을 최대한 앞당길 계획이다.
앞당기는 만큼 실패할 수도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나 어쩔 수 없는 일.
금월보의 위세를 미루어 볼 때 월영련. 그리고 그 산하에 또 다른 세력들 또한 만만치 않을 거란 판단이 섰으니까.
물론 앞당긴다고 해서 당장 지극의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었다.
좀 더 시간이 필요했고 지난 한 달 동안 기틀을 다져두었을 뿐이다.
나머지는 정천맹에서 놈들에 대한 조사와 수련을 병행할 생각이었다.
그런 상념에 잠긴 채 연무장에서 체력을 단련하고 있을 때였다.
“도련님!”
왕삼이 연무장 안으로 달려오며 소리쳤다.
나는 검지 하나로 물구나무를 선 채 단련을 이어가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야?”
“입맹 시험에 대한 소식이요. 도련님께서 기다리시던.”
“뭐라는데?”
“예상대로 내달 초에 시험이 있을 예정이래요. 정마대전 이후 새로운 맹주님이 취임하시고 나서 처음으로 치러지는 공식적인 시험이라 내외적으로 기대가 엄청 크대요. 그만큼 시험 수준도 높고 지원하는 무인들도 엄청 많고요.”
그러고 보니 정마대전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겨울이었다. 현 맹주인 독고세가주가 주관하는 공식적인 시험인 것도 맞고.
마교를 물리쳐 정파 연합체에서 무림 연합체로 발돋움한 만큼 세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그렇군.”
나로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반응이 그게 답니까?”
“뭐가?”
“도련님께선 긴장도 안 되세요?”
녀석의 말에 나는 훌쩍 뛰어올라 자세를 바로잡았다. 겨울임에도 온몸이 땀으로 범벅된 몸은 한 폭의 그림이라고 할 정도로 탄탄했다.
“와.”
녀석이 넋을 놓고 상의까지 탈의한 내 몸을 바라볼 정도였다.
“왕삼아.”
“예.”
“시선이 부담스럽다. 남색은 좀…….”
“앗, 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왕삼은 흠칫 놀라 고개를 휙 꺾었고 나는 대소를 터뜨렸다.
***
“다녀오겠습니다.”
정문 앞에서 나를 배웅하는 부모님과 가문의 어른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기대와 근심으로 가득했다.
소룡단의 일원으로서 정마대전에 참가해 선우약가를 지켜낸 소가주. 분명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그로 인해 몇 년간 폐인과도 같은 삶을 살던 가문의 후계자였다.
그런 후계자가 지난 몇 달간 정신을 차리고 과거의 기재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도 모자라 이제는 과거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정천맹에, 나아가 강호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는 중이었다.
“이번 맹시에 수많은 무인이 참여한다는 얘길 들었다. 주눅 들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들뜨지도 말고 항상 말과 행동에 신중을 가해야 한다.”
“그보다도 항상 몸조심하고. 알겠지?”
아버지와 어머니를 시작으로 가문의 인사들이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덤덤하게 귀를 기울였고 마지막으로 왕삼에게 눈짓을 보냈다.
녀석에게는 내가 입맹하려는 진짜 목적을 털어놓은 상태였다. 그 덕에 나를 따라나서고 싶어 했지만.
‘넌 나를 대신해 가문을 지켜줘야 한다. 혹시라도 백의문이 나설 때가 오게 된다면 네가 중간에서 연결점이 되어줘야 해. 믿고 맡길 사람이 너뿐이다.’
어젯밤 했던 말을 눈짓으로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자 왕삼은 결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유씨세가를 떠나 하남으로 향했다.
맹시까지는 열흘이 남았기에 서두르지 않았고 마차를 빌려 이동하는 와중에도 매일같이 일영청심공을 운용했다.
그러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천영검대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난번 정천맹에 들렀을 때, 그들은 자호단의 무인이 되어 맹의 입구를 지키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는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정말 자호단원으로서의 삶에 만족하며 지내고 있는 건지.
그리고 당시엔 보지 못했던 소이겸 또한 이번에는 직접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천맹 내부에 있을 적과 아군.
그중 한천자 도경수가 확실한 배신자라면, 녀석들은 확실한 조력자였다. 막말로 정천맹의 모두가 적이라고 해도 녀석들만큼은 그에 맞서 싸울 녀석들이다.
검신 백도천을 따르던 천영검대는 그만큼 서로 간에 신뢰가 확고했으니까.
회상과 함께 운기조식에만 집중하는 사이 정확히 시험이 시작되는 날에 맞춰 하남에 도착했다.
정천맹 본단이 있는 근처 객잔과 거리는 온통 지원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번 시험에 관심을 가지는 구경꾼들도 함께였다.
어딜 가든 빈 방이 없을 정도여서 한참을 헤매다가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낡은 객잔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남은 객실이 두 개.
가격도 평소와 다르게 몇 배나 비쌌지만 개의치 않았다.
“맹시가 끝날 때까지 방을 빌리겠습니다.”
내 말에 주인장은 눈을 빛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혹시 맹시의 지원자십니까?”
“그렇습니다.”
“당장 오늘부터 시작이 아닙니까? 무운을 빌겠습니다.”
나는 돈을 치르고 방에다 짐만 적당히 풀어둔 다음 주인장의 응원과 함께 본단으로 향했다.
맹의 정문에 도착하니 지원자들로 보이는 줄이 길게 늘어선 채였다.
앞쪽에선 자호단원들이 지원자들의 지원서와 신분패를 확인하고 대조하며 출입을 관리하고 있었다.
줄이 짧아지고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점점 기분이 묘해졌다.
내가 입맹 시험을 치르는 날이 올 줄이야.
과거엔 검신 영감 덕에 시험 따윈 치르지 않고 곧장 천영검대로 발탁되었었는데.
이윽고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또 한 번 묘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맹시 지원서와 신분패를 보여주시오.”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자 자호단원의 무복을 입고 있는, 과거 천영검대의 막내였던 노호산(盧湖山)이 내 앞에 서 있었다.
***
“산서 유씨세가의 유진휘.”
노호산이 내 신분패와 지원서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그의 두 눈이 점점 커지는 게 보였다.
“소룡단……?”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정말 소룡단원이셨소?”
“예. 사실입니다.”
“설마 그 소룡단의 생존자가…….”
노호산의 목소리가 짙게 떨렸다. 그 또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선우약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소룡단. 당시에 전생의 나와 천영검대가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소룡단의 피해는 크게 줄었을지도 몰랐다.
그 때문에 노호산은 소룡단의 전멸에 대해 알게 모르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녀석이었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면서 반문했다.
“저를 알고 계십니까?”
“생존자가 한 명 있다고만 들었지, 그게 소협인 줄은 모르고 있었소.”
“그렇습니까?”
“정말 잘 오셨소. 이번 시험에 합격해 맹 내에서 꼭 다시 봅시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이걸로 녀석이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덜어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당시에 천영검대는 소룡단을 지원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선우약가가 무사했고 저 또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때 일은 감사했습니다.”
“……!”
노호산은 흠칫 놀라며 나와 눈빛을 교환했다. 자신이 천영검대원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이었다.
어떻게 알긴.
나도 모르게 녀석의 이름을 입에 담을 뻔했다. 나는 천우혁이 아닌 유진휘로서 계속 말했다.
“그때는 천영검대원이셨는데. 지금은 왜 자호단에 계시는지 묻는 건 실례겠죠?”
“사정을 밝히기가 곤란한 건 맞소.”
“그럼 다른 질문을 하나만 더 해도 되겠습니까?”
“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면 해주겠소.”
“천영검대원이 아닌 자호단원의 삶에 만족하고 계십니까?”
내 질문에 노호산은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천영검대든 자호단이든 정천맹과 강호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건 매한가지. 지위나 신분은 뭐가 됐든 상관없소.”
그러더냐.
나는 노호산의 어조에서 진심을 읽어냈다.
“다만.”
순간 노호산의 눈빛에 씁쓸함이 어렸다.
“대주님과 함께했던 시절이 그리운 건 사실이오.”
“돌아가신 천영검대주 말씀입니까?”
“그렇소. 대주님께서 살아계신 채 소협을 만나게 됐다면 정말 기뻐하셨을 텐데. 아, 물론 다른 대원들도…….”
노호산이 한창 말을 이어가던 와중이었다.
“아직 멀었습니까!”
내 뒤로 쭉 늘어져 있는 지원자들의 줄 사이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내 차례에서 시간이 꽤 소비된 탓이었다.
노호산은 멋쩍게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과거의 인연을 만나 반가운 마음이 컸나 보군.”
“저도 반가웠습니다. 그럼.”
“꼭 다시 봅시다. 시험 잘 치르시오.”
노호산의 미소를 따라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걱정 마라, 호산아. 곧 다시 보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