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4장 입맹(2)
“…유씨세가의 유진휘까지. 이상 서른 명은 육(六) 연무장입니다.”
맹 내부에 존재하는 수십 개의 연무장. 나는 시험 관리관의 호명에 따라 육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면서 같은 조에 속한 나머지 스물아홉 명의 무인들을 슬쩍 살폈다. 다들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고 있었는데 동시에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어도 일 년에 단 한 번밖에 치러지지 않는, 그러면서도 이번 해는 유달리 경쟁률이 높은 맹시를 앞둔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덤덤하게 가장 뒷자리에서 계속 걸었고 연무장에 도착하자 시험 감독관으로 보이는 중년인 두 명이 연무장 중앙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독관 모두 절정급 고수여서 나는 자연스럽게 기도를 숨겼다. 딱 시험에 통과할 정도의 실력만 내보일 생각으로.
그러는 사이 두 감독관은 우리를 내려다보며 일차시험의 시작을 알렸다.
“일차시험은 아주 간단하오!”
그중 하나가 내공 실린 목소리로 일차시험의 과제를 간략히 설명해 줬는데, 간략한 설명만큼이나 그 내용 또한 아주 간단했다.
연무장 중앙에 세워져 있는 사람만 한 크기의 바위에 어떤 무공을 사용해도 좋으니 세 치 이상의 흠집을 내보라는 시험.
세 치면 대략 손바닥 길이 정도였다.
“내용은 간단하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오. 이 바위는 청강석(淸强石)으로…….”
청강석이란 이름이 흘러나오자 지원자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해남의 특산품 중 하나인 청강석은 그 강도가 매우 뛰어나기로 유명했으니까.
검기마저 버텨낼 수 있는 강도여서 각종 무기의 재료로 사용되는 귀한 광석인데, 맹시를 위해 저만한 크기를 통째로 내놓다니.
당장 저것만 가져다가 내다 팔아도 은자 수천 냥은 훌쩍 넘어갈 것이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시험은 한 명씩. 호명하는 대로 앞으로 나와 실력을 보여주시오. 기회는 한 번뿐이고 합격 여부도 그 자리에서 곧장 판단할 것이오.”
감독관의 호명을 시작으로 시험은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일차시험의 내용은 간단한 만큼 직관적으로 초식의 운용과 위력을 중점으로 살피면서 어중이떠중이들을 걸러내는 시험이었다.
카-앙!
“탈락!”
첫 주자로 호명된 지원자가 호기롭게 검을 휘둘렀다가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연무장에서 걸어 내려왔다.
그의 힘없는 발걸음 뒤로 곳곳에서 옅은 조소가 터져 나왔다. 탈락자의 고배를 위안 삼아 긴장감이라도 풀어보려는 심보인 듯싶었다. 다소 무례해 보여도 내 알 바는 아닌지라 조용히 내 차례를 기다렸다.
콰-앙!
“오오-!”
두 번째 지원자는 둔중해 보이는 창을 사용하는 무인이었는데 찌르기 한방으로 청강석 중앙에 주먹만 한 크기의 흠집을 만들어냈다.
“으음. 애매해 보이긴 하지만, 합격.”
“감사합니다!”
“와-!”
합격이란 말에 이번엔 지원자들 사이에서 부러움과 감탄이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연이어 세 번째 지원자까지 합격. 다음은 탈락. 그다음도 탈락. 지원자들의 무위를 가늠하고 구경하며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와중이었다.
“어? 너는?”
지원자들 사이에서 나를 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 차례는 서른 명의 지원자 중 가장 마지막.
해서 뒤쪽에 자리 잡은 채 시험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구경하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알아본 누군가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설마 했는데. 진짜 너로구나.”
아는 체를 해오는 사내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 나로서는 당연히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결국 과거의 유진휘와 인연이 있는 놈이란 뜻이었다.
“누구지?”
내가 묻자 사내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인연은 있지만 친근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나를 모른다고?”
“모르니까 묻지. 누군데?”
“하. 고작 몇 년이 지났다고 나를 까먹어? 아. 그럴 만도 하지. 네게는 소룡단 시절의 일이 지워버리고 싶은 만큼 괴로운 기억일 테니까.”
소룡단 시절을 들먹이는 점과 말본새를 보니.
“소호단(小虎團)의 단원이었던 놈이냐?”
“이제야 알아보는군.”
“알아본 것까지는 아니고. 그래서 용건은?”
“…….”
덤덤한 내 말투에 사내는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마치 자기가 원하던 반응은 이게 아니라는 듯이.
“못 본 사이에 성격이 건방져졌네?”
“너만 할까.”
“이 자식이.”
사내는 나직이 이를 갈다가 순간 눈을 빛냈다. 썩 불길한 눈빛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야. 여기서 과거 숭고한 희생으로 선우약가를 지켜낸 소룡단의 유일한 생존자를 보게 될 줄이야!”
사내의 의도적인 외침으로 인해 순간 지원자들과 감독관들마저 이목을 집중했다.
“같은 뜻으로 함께 모였던 소호단의 일원으로서 정말 반갑기 그지없군. 한데, 소룡단의 유일한 생존자가 실은 동료들의 죽음을 뒤로한 채 전장에서 도망쳤다는 소문이 나돈 적이 있었는데. 그게 정말이냐?”
사내가 이번에도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키웠다. 나는 사내의 빈정거림 속에 숨겨진 의중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마대전 당시 중원 각지의 후기지수들을 선발해 만들어진 소룡단과 소호단.
강호의 미래를 이끌어 갈 인재들의 궐기는 정파 세력에게 큰 인상을 심어주었고 마교를 물리치는 데 있어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만큼 두 집단은 정마대전에서 큰 공로를 세웠지만 당시 선우약가를 지켜낸 소룡단의 희생으로 인해 소호단의 명성은 다소 빛이 바랬다.
어린 나이의 치기 탓인지 사내는 그 아쉬움을 우연히 만나게 된 나를 통해 해소할 심산인 듯싶었다.
쯧.
나는 혀를 차면서 사내의 질문을 무시했다. 사내도 내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미 지원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새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과거의 소룡단원과 소호단원이 한 자리에서 맹시의 시험을 치른다는 사실에 다들 흥미로워하는 분위기였다.
“그러고 보니 저 소협은 소호단의 부단주였던 양가장의 둘째가 아닌가.”
그중 하나가 사내를 알아봤다.
양가장의 둘째 양이소(楊李素).
양가장이면 사천 땅에서 나름 명성을 떨치는 가문 중 하나라고 들었다.
양이소라는 이름은 처음이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실력은 제법 있는 놈이긴 했다.
그런 놈과 나는 말없이 눈빛을 주고받았고 그럴수록 지원자들의 소란은 더욱 커져만 갔다.
결국 지켜보던 감독관이 일갈을 내질렀다.
“그만! 더 이상 소란을 피운다면 지원 자격을 박탈하겠소.”
***
감독관 덕에 소란은 금방 가라앉았다. 다만 분위기 속에 여전히 나와 양이소의 경쟁이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하다는 기색이 만연했다.
그때.
“다음. 양가장의 양이소.”
감독관의 호명에 놈은 나를 향해 비릿한 조소를 날려주고는 연무장으로 걸어 올라갔다.
서른 명의 지원자 중 양이소는 스물아홉 번째. 그다음이 나.
공교롭게도 순번이 엮여 서로 실력을 겨루는 모양새가 되었다.
“소호단의 부단주였다지?”
감독관의 물음에 양이소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습니다. 종전 이후 소호단이 해체되면서 가문으로 돌아가 더욱 수련에 매진했고 다시금 정천맹의 무인으로서 활약하길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하하. 훌륭하군. 그럼 시작하게.”
연무장의 모든 이들은 양이소의 합격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무위가 어느 정도려나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런 시선을 의식한 듯 양이소는 호흡을 가다듬고 다소 과장되게 자세를 잡으며 검을 뽑아갔다.
스릉!
청아한 소리와 함께 뽑혀 나온 놈의 검 위로 검기가 피어올랐고.
번쩍!
깔끔한 일검이 청강석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서걱!
청강석이 갈라지는 소리가 마치 옷자락이 베이는 소리처럼 들려올 정도로 날카로운 일검이어서 감독관을 비롯한 지원자들 사이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역시! 소호단의 명성은 절대 과장된 게 아니었군!”
“훌륭한 일검이었소!”
그 말마따나 청강석의 옆구리엔 거의 한 자에 가까운 검상이 새겨져 있었다. 시험의 통과 기준보다 세 배는 더 깊은 상처였다.
“합격. 이 정도 실력이면 이다음 시험도 어렵지 않게 통과하겠군.”
감독관의 장담에 양이소가 다소 격앙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인사와 함께 연무장에서 내려오는 놈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제 실력이 어떤지 잘 보았냐고 으스대는 표정.
솔직한 심정으론 놈의 실력이 어떻든 나를 향해 뭐라 지껄이든 관심조차 없었다. 둘만 있는 자리였다면 적당히 두들겨 패서 버릇을 고쳐줬겠지만.
당장은 하는 수 없이 놈의 의도대로 움직여 줄 수밖에 없었다.
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는 만큼 유씨세가와 유진휘, 그리고 소룡단의 명성을 지켜줘야 할 의무도 있었고.
“마지막이로군. 유씨세가의 유진휘.”
감독관의 호명에 지원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향했다.
선우약가를 지키기 위해 전멸한 소룡단의 유일한 생존자.
정확한 정체가 이제야 밝혀지는구나. 지원자들의 눈빛엔 그런 심중이 담겨 있었다.
그들의 이목 사이를 지나쳐 연무장으로 올라가자 감독관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고생이 많았겠구나.”
감독관이기 이전에 정천맹의 무인으로서 전하는 말이었다. 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맹시에 지원한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그의 물음에 나는 잠깐 고심에 빠졌다가 말을 이었다.
“강호를 위해서. 다들 같은 이유 아니겠습니까?”
지금 대답은 천우혁인 나와 유진휘인 내가 함께 내놓은 대답이라 할 수 있었다.
감독관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한 발 뒤로 물러나서 시험을 시작하겠다는 눈짓을 보내왔다.
나는 천천히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원래는 적당히 내력을 실어 시험을 통과할 정도의 수준만 내보일 계획이었으나, 그보다 조금 더 힘을 실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내공을 끌어올렸다.
이어.
슁- 철컥.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착검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내가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자 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다.
감독관도. 지원자들도. 하나같이 뭐지? 하는 표정으로 나와 청강석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끄, 끝난 건가?”
감독관이 당황스럽다는 어투로 물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청강석엔 내가 새겼을 만한 흠집이 보이지 않았겠지.
“풉!”
곧이어 양이소가 입을 틀어막는 시늉과 함께 대소를 터뜨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고 그로 인해 지원자들도 입맛을 다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검을 뽑긴 한 건가?”
“소리는 들렸는데. 쾌에 치중한 나머지 청강석에 흠집을 낼 만한 위력을 담지 못했나 보군. 그래도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긴 했어.”
“아쉽네, 아쉬워.”
다소 김빠지는 결과에 지원자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탄식했다.
내 옆으로 다가온 감독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기회가 오늘뿐이겠는가? 포기하지 말고 내년에 다시 한번 지원해 보게. 아쉽지만 이번엔 불합…….”
그가 내 탈락을 결정지으려고 할 때였다.
쩍!
순간 청강석 중앙에 실금이 그어졌고.
쩌저적! 콰쾅!
반으로 갈라진 청강석은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며 연무장을 뒤흔들었다.
“허억!”
“저, 저게 무슨!”
동시에 지원자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