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인 환생했다-67화 (67/150)

#67. 6장 집형(1)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 달라고 했는데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화월각주가 찻잔을 홀짝이고는 미소를 머금었다. 맞은편엔 집형당주인 한천자가 자리를 잡은 채로 코웃음을 쳤다.

“훌륭한 성적으로 맹시에 합격한 아이요. 내외적인 관심이 흐릿해지길 기다려야 했소.”

“그렇습니까?”

두 사람이 밀담을 나누고 있는 곳은 텅 빈 다루였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다루였으나 이곳은 화월각의 본체나 다름없는 장소였다.

위치 또한 정천맹 본단 근처의 저잣거리.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더없이 어울리는 은신처라 할 수 있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군요. 모든 계획엔 그에 맞는 때가 있는 법이니. 그래서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어떻죠? 유진휘, 그놈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신지?”

화월각주의 물음에 한천자가 눈을 빛냈다.

“이미 임무를 빌미로 놈들을 사지로 밀어 넣어두었소. 지금쯤 이미 덫에 빠졌을지도 모르지.”

“놈들이라면?”

“그렇소. 놈들.”

“유진휘와 더불어 눈엣가시 같았던 복룡추호대주까지 한꺼번에 처리할 계획이신가 봅니다.”

“집형당을 제대로 장악하려면 포기할 건 포기해야 하니까.”

“아쉽겠군요. 설표라는 그자를 많이 아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지금껏 망설였지. 하지만 슬슬 때가 다가오고 있지 않소?”

이번에는 화월각주의 눈이 번뜩였다. 한천자의 말대로 슬슬 집형당의 힘이 필요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 만큼 확실히 해두셔야 합니다. 이번 덫으로 유진휘와 복룡추호대주를 잡을 수 있는 게 맞습니까?”

“흥. 당연한 소릴. 련주께서 내어준 색혼수사가 덫의 중심이니까.”

한천자는 말을 하면서 과거에 마주했던 월영련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딱 한 번.

딱 한 번의 짧은 만남으로도 그에게 압도되었다. 그의 기세는 신비로웠고 그 누구보다도 거대했으며 감히 천하를 아우를 실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전대맹주였던 검신 백도천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한 건 아닐까 하는 경외심마저 들게 했다.

대체 그런 인물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 시기가 공교롭게도 정마대전의 종전 이후, 검신 백도천이 맹주직에서 물러나 은거를 결심한 시기와 맞물렸다.

‘모든 계획엔 때가 있는 법이지.’

앞서 화월각주가 말한 대로 그는 지금껏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싶었다.

그런 월영련주와의 만남을 통해 한천자는 깨달았다. 밀려오는 태풍을 피하지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그 태풍의 눈이 되어 살아남아야 한다고.

결국 검신 백도천이 버티고 있었다면 이러지 않았겠지, 라는 마음으로 자책감을 숨기며 배신을 결심했다.

그때 받은 대가 중 하나가 바로 색혼수사라는 사파의 절대고수.

인극의 경지에 다다른 고수이자 백대악인에 이름이 올라 있는 인물이 월영련주 밑에서 개 노릇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는 얘기에 깜짝 놀랐었다.

그 색혼수사가 월영련주의 말 한마디에 지금은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충실한 수하가 되었다.

“복룡추호대주도 만만한 실력은 아닐 텐데요.”

화월각주의 염려에 한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마시오. 색혼수사를 비롯해 실력 있는 자객들까지 대기하고 있을 테니. 놈들은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한천자의 대화를 모두 전해 들은 화월각주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 정도라면 확답대로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

“네놈. 정체가 뭐지?”

설표가 촌장의 목에 검을 겨눈 채로 물었다. 촌장은 칼날이 닿아 있는 목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음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정체보다는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궁리를 하는 게 먼저 아니겠나?”

촌장은 미소와 함께 단검을 휘둘러 검을 쳐낸 뒤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내가 보기에도 그는 꽤 실력 있는 고수에 속했다.

촌장이 물러남과 동시에 촌락 안에서 평범함을 연기하고 있던 이들이 일거에 우리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포위망이 견고합니다.”

일조장인 손유수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포위망은 촘촘했고 몇 겹인지 모를 만큼 두터웠다.

당장 시야에 들어오는 적의 숫자만 서른 명. 건물 안쪽이나 근처 사각지대에 숨어 있는 숫자까지 합치면 거의 오십 명에 육박했다.

수적으로도 우세한데 실력 또한 만만치 않아 보였다. 전날 밤에 야영하던 우리를 습격한 이들보다 훨씬 더 윗줄.

그런 이들을 이끄는 촌장 또한 만만치 않은 실력자.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죽을 설표가 아니었고 복룡추호대의 일조 대원들이 아니었다.

“포위망을 뚫기보단 최대한 수비에 집중한다. 적의 숫자를 줄이기보다는 우리가 살아남는 게 더욱 중요해. 그러다 보면 기회가 올 거고, 그 기회는 내가 잡겠다.”

설표의 명령에 손유수가 조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삼산수수진(三山守數陣)을 펼쳐라!”

그녀의 외침에 나를 비롯한 조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위치를 잡았다.

인술진의 최상위 진법 중 하나인 수비진.

전방위를 포위당한 상태에선 세 명이 품(品)자 대형을 펼쳐 사각까지 방비할 수 있는 삼삼수수진이 제격이었다.

나는 모용진과 고주양 두 사람과 함께 한데 모여들었다. 부조장인 고주양이 막내 조원 두 명과 함께하는 것이다.

“긴장하지 말고 침착하게 대응해라. 서로를 믿고 등을 맡겨라. 앞만 보고 검을 휘둘러.”

고주양의 독려에 모용진이 침을 꿀꺽 삼키는 게 보였다. 나 또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촌장은 킬킬거리며 수하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놈들이 살아남고자 발악하는구나. 쓸어버려라!”

촌장의 고함에 맞춰 포위망 곳곳에서 적들이 쏘아지기 시작했다.

“온다!”

“위치에서 벗어나지 말고 수비에 집중해라! 적을 벨 때는 확실한 기회라고 여겨질 때만 나서야 한다!”

적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시작된 전투는 마치 견고한 성을 사방에서 두들기는 모양새였다.

채채채채챙!

수십 개의 검과 무기들이 부딪치는 쇳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고 사방에서 고함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행히 비명의 주인은 적들이었다.

무턱대고 몰아붙이다가 설표와 손유수를 비롯한 실력 있는 조원들에게 반격당한 것이다.

그런데도 적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밀 듯이 밀려왔다.

터-엉!

“윽!”

내 옆에서 모용진이 힘겹게 적의 공격을 퉁겨냈다. 그와 등을 맞댄 나와 고주양도 연신 적의 공격을 튕기고 막아내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러다가 기회가 생길 때면 하나둘씩 놈들의 목과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내 손에 죽어 나간 적의 숫자도 벌써 넷.

모용진은 내 무위에 경악하면서도 크게 안도하고 있었고 고주양은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나를 향해 소리쳤다.

“역시. 넌 난놈이다!”

감탄과 칭찬이 뒤섞인 목소리여서 나는 피식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를 가질 만큼 우리는 큰 고비 없이 적들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그만큼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오십에 육박했던 적들의 숫자는 어느새 서른 정도로 줄어들었고 우리는 부상자는 있어도 사망자는 없었다.

설표의 판단이 그만큼 제대로 먹혀들었으니까. 수비가 아니라 포위망을 뚫기 위해 진격을 명령했다면 죽는 사람이 여럿 나왔을 것이다.

그때, 전황을 지켜보던 촌장이 누군가를 향해 소리쳤다.

“슬슬 나서주셔야겠소!”

그의 부름에 인영 하나가 건물 지붕에서 솟아올랐다.

***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촌장 옆으로 내려앉은 노인.

“색혼수사!”

누군가가 노인을 알아보곤 소리쳤다.

색혼수사의 등장에 순간 분위기가 급변했다. 인극 고수라면 충분히 전황을 뒤집을 만했으니까.

“당황하지 마라! 놈은 내가 맡겠다! 너희들은 계속해서 자리를 지켜라!”

조원들의 기세가 꺾이지 않도록 설표가 내공을 실어 일갈했다. 그 말에 조원들은 다시금 힘을 냈다.

하지만.

“그렇겐 안 되지, 큭큭.”

여태껏 지켜만 보고 있던 촌장이 설표에게 짓쳐들어갔다.

콰-앙!

서로의 검에 검기가 피어오른 채로 두 사람이 맞부딪치며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콰쾅!

이어지는 격돌에서 촌장과 설표는 거의 호각을 이뤘다.

촌장이 설표의 발을 묶어두는 사이에 색혼수사로 하여금 조원들의 삼삼수수진을 깨트리려는 심산이었다.

“젠장!”

손유수가 그 의중을 알아차리곤 이를 악무는 게 보였다.

그리고.

“후후. 먹잇감들이 한둘이 아니로구나.”

마침내 색혼수사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조원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걸음걸이에 맞춰 우리를 공격하고 있던 서른 명의 적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색혼수사 한 명이면 충분하다는 듯이, 적들은 우리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포위망을 굳건히 하는 데만 집중하려는 모양.

“주양아!”

손유수의 부름에 내 옆에 서 있던 고주양이 그녀 곁으로 달려갔다.

일조 대원 중에서 가장 실력이 높은 두 사람이 전방에서 색혼수사를 막아내려는 것이다.

나머지 조원들은 여전히 수비에 집중한 채로 두 사람을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호오. 복룡추호대주 말고도 실력 있는 자들이 제법 보이는구먼.”

짐짓 감탄한 색혼수사의 중얼거림에 손유수는 흠칫 놀랐다.

“어떻게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지? 게다가 우리가 이곳에 올 거라는 걸 어떻게 예상하고 이런 함정을?”

“궁금하더냐?”

“…떠보지 말고 대답이나 하시지, 노망난 늙은이야.”

“클클. 계집년이 주둥이가 다소 거칠구나. 그런 년일수록 맛은 더 좋지.”

색혼수사는 조소와 함께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죽인 인간의 혼을 삼켜 무공의 성취를 늘려가는 사공을 배운 자였다.

그만큼 사특한 기운을 전신에 둘러 감은 그의 공격은 범상치 않았다.

콰-득!

“컥!”

자줏빛 기운이 실린 맨손을 휘둘렀고 고주양이 앞서서 그의 공격을 쳐냈다. 그 충돌 한 번에 고주양이 침음과 함께 뒤로 주룩 밀려났다.

쾅-!

“큿!”

이번엔 손유수가 색혼수사와 격돌하며 거친 숨소리를 토해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튕겨 나갔다가 다시 돌진하길 여러 번.

전투는 나머지 조원들이 끼어들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괜히 끼어들었다간 손유수와 고주양을 방해하는 꼴이 될 만큼 수준 차이가 심했다.

그건 맞은편에서 여전히 호각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촌장과 설표도 마찬가지.

조원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세 사람의 응전을 지켜보며 수비에 집중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실력이 제법이지만.”

쾅!

“아직 죽여야 할 놈들이 많으니 이만 끝내자꾸나.”

쾅!

색혼수사가 여유롭게 손유수와 고주양의 합공을 받아넘기다가 살기가 깃든 안광을 번뜩였다.

이어 고주양이 몇 걸음 뒤로 밀려난 틈에 맞춰 비틀거리고 있는 손유수의 심장을 향해 날 세운 오른손을 찔러넣었다.

“아, 안 돼-!”

고주양이 비명과 함께 황급히 몸을 내던졌고.

“조장님!”

지켜보던 조원 중 몇 사람도 손유수를 구하기 위해 신형을 쏘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보다 한발 먼저 움직였다.

파-앙!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색혼수사가 쭉 물러났다. 내가 휘두른 검을 쳐낸 충격에 썩 놀란 얼굴이었다.

나는 놈보다 손유수와 고주양을 먼저 살폈다.

“잠시 숨 좀 돌리세요.”

내 말에 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색혼수사를 밀어낸 내 일검이 범상치 않았음을 깨달았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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