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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인 환생했다-69화 (69/150)

#69. 6장 집형(3)

오십 구에 달하는 자객들의 시체는 촌락과 함께 불태웠다. 고문을 가해도 입을 열지 않는 놈들이었고 시체에서도 달리 건질 정보가 없었으니까.

대신 색혼수사는 일단 살려두기로 했다. 단전을 부수고 수혈을 짚어 잠재워둔 상태였다.

“이 모든 게 함정이었다니. 집형당주께서 대체 왜…….”

설표는 불타오르는 촌락을 지켜보며 씁쓸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월영련의 존재와 한천자의 배신을 깨달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한천자 밑에서 십수 년을 함께하며 복룡추호대를 이끌었으니 당연했다.

그건 손유수와 고주양을 비롯한 복룡추호대의 일조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을 함정에 빠뜨린 정황과 색혼수사라는 증인이 눈앞에 있으니 믿을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힘겨워 보였다.

나는 설표에게, 동시에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상황에선 한천자가 배신할 이유를 따질 겨를이 없지 않겠습니까? 놈이 대주님과 여기 있는 일조 대원들 모두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설표가 표정 속의 혼란을 털어버리고 결의를 다졌다.

“과거는 이곳에 묻어두겠다. 지금은 현재에만 집중하자. 집형당주 한천자 도경수. 그자는 더이상 정천맹의 장로가 아니다. 복룡추호대인 우리 손으로 직접 처단해야 할 악인일 뿐이지.”

“명심하겠습니다!”

설표와 일조 대원들이 신의를 저버린 한천자를 향한 분노를 일깨웠다.

***

단신으로 입맹한 내 처지에서 설표와 복룡추호대 일조 대원들이라는 믿을 수 있는 아군을 얻은 건 큰 힘이 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 이들과 함께 맹으로 돌아가 한천자를 때려죽일 수도 없는 일이다.

배신자라고는 해도 그는 여전히 정천맹의 장로이자 하나의 당주를 이끄는 인물.

원로원과 오당(五堂) 삼각(三閣) 체제로 구성된 정천맹에서 당주는 맹주와 총군사 다음가는 권력자였다.

내가 아는 바로 원로원은 속된 말로 뒷방 늙은이들인지라 특별한 일이 아닌 한 정천맹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니까.

즉 한천자와 정면으로 맞서는 건 우리로선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방법은 두 가지.

색혼수사라는 증인이 있으니 한천자의 배신과 월영련의 존재를 윗선에 직접 고발하거나 혹은 믿을 수 있는 다른 인물의 조력을 받는 것뿐이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진 못했다.

해서 우리는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고 부상자들도 치료할 겸 촌락에서 벗어나 숭양현의 저잣거리로 숨어들었다.

혹시나 또다시 습격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차라리 인파가 많은 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복룡추호대가 아닌 평범한 무인들로 위장한 채 우리는 작은 객잔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

그동안 식사와 잠자리가 온전하지 못했던 만큼 휴식도 취했고 의원을 불러 부상자들을 돌봤다.

조원들이 그러는 사이에 나와 설표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 내가 직접 겪고 알아낸 월영련에 대한 정보들을 전해주는 자리였다.

산서에서부터 놈들의 꼬리를 뒤쫓아 태산까지 도착한 걸 시작으로 금월보라는 세력의 계략을 막아내 동악검선 어르신을 구해낸 일.

놈들을 통해 월영련의 이름과 월영련이 정천맹에서 또 다른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내 입맹을 결심한 사실까지.

백의문주에 대한 얘기는 빼고 빠짐없이 전해주자 설표는 침음을 흘렸다.

“월영련. 정말 미친놈들이로구나.”

가감 없는 평가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지. 미친놈들. 하지만 그만큼 대단한 놈들이기도 했다.

차라리 마교 놈들처럼 정면으로 들고 일어섰다면 대항하기가 더 수월했을 것이다.

한데 놈들은 여기저기서 음모를 꾸미며 정천맹 내부까지 파고들어 안에서부터 모든 걸 무너트리고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그 덕에 설표와 나는 곧장 맹으로 복귀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당의 당주 중 하나인 한천자가 배신한 마당에 또 누굴 믿을 수 있겠는가.

“맹주님은 어떻습니까?”

내 질문에 설표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테니.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맹주님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시다.”

“그렇습니까?”

“그것만큼은 내 목숨을 걸고 장담할 수 있지. 하지만 사실, 지금의 정천맹은 맹주님보다는 오당과 삼각의 권력이 더욱 크다는 게 문제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눈을 빛내며 대답을 기다렸다.

검신 영감이 맹주로 있었던 전생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현재에도 입맹한 이후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었다.

물론 여태까진 복룡추호대에 녹아들기 위해 딱히 복룡각 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긴 하지만.

게다가 현 맹주인 독고태문은 천하오주인 독고세가의 가주가 아니던가.

맹주가 아니었더라도 그의 권위는 정천맹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텐데.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았겠지만 정마대전 이후에 정천맹의 인사들이 제법 교체됐네.”

“그렇겠죠.”

마교의 전력과 정면으로 충돌한 만큼 수많은 피해가 발생한 전쟁이었다. 그중에서도 정천맹의 인물들이 가장 많이 희생됐었다.

정확히는 천하오주의 인물들이었다.

그때 당시에 정천맹의 고위급 인사들은 대부분 천하오주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으니까.

“전권이 교체되면서 사실상 지금의 오당과 삼각엔 천하오주의 인물들이 둘밖에 남지 않았어. 의당주(醫堂主)와 호천각주(護天閣主). 맹주님까지 포함하면 셋. 그 세 분과 나머지 장로와 인사들이 대립하고 있는 형세네. 물론 중립을 표방하는 자들도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놓고 보자면 그렇다는 말이야.”

즉 천하오주의 인물들과 나머지가 대립 구도를 펼치고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맹주는 항상 당주와 각주의 투표로 선발되지 않습니까? 대립 구도를 펼치기 이전에 애초에 왜 현 맹주님을 추대한 거죠?”

맹주로 취임하기 위해선 여덟 명의 장로 중 과반수가 찬성을 해야 했다.

전생엔 그랬고, 검신 영감도 그런 과정을 거쳐 맹주로 추대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건 모르겠네. 전대 맹주님께서 현 맹주님을 후보로 추천하셨을 당시엔 다들 찬성했으니까. 적임자라며 다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들었네. 한데 전대 맹주님께서 은거를 결정하신 이후부터 태도가 돌변했지.”

검신 영감의 눈치를 보다가 그가 사라지자 본색을 드러낸 건가? 혹은 그 시기에 맞춰 월영련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지도 몰랐다.

“한천자도 마찬가지입니까?”

“집형당주도 마찬가지였지. 아니, 그 중심이 집형당주였다고 하는 게 옳다.”

“그 말은 월영련이 뒤에서 지금의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는 말이 되겠네요.”

“지금 와서 보면 그렇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지.”

“놈들이 노리는 건 결국 현 맹주님을 밀어내고 자신들에게 가담한 인물을 맹주로 추대하는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쉽겠는가? 아니면 설마 놈들이 천하오주의 인물들을 제외한 장로와 인사들을 모두 포섭했다고?”

설표가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 치를 떨며 부정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그 정도까지 일이 진행됐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맹주는 벌써 교체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다만 그 목표를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 서 있는 듯 보였고 그걸 위해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는 듯싶었다.

그 중심에 있는 게 한천자와 집형당.

놈들은 한천자가 있는 집형당의 권력을 이용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나뿐만 아니라 설표까지 처리하려고 했을까.

설표가 버티고 있는 이상 집형당의 권력과 복룡추호대의 무력을 구린 일에 사용할 수 없을 테니 손을 쓴 거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맹주님과 의당주와 호천각주. 적어도 세 사람은 적이 아닌 상황이니까요.”

“맹주님을 제외한 두 사람은… 확실한 건 아니지만 굴러가는 상황을 놓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구나.”

당장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믿을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적이 아니라는 건 우리에게는 아군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니까.

내 미소에 설표가 눈을 빛냈다.

“앞으로 어쩔 작정이지?”

“일단은… 당당히 복귀하시죠. 임무를 제대로 끝마쳤으니까요.”

***

나흘간 휴식과 부상자들을 치료한 우리는 사로잡은 색혼수사를 이끌고 곧장 맹으로 복귀했다.

여전히 평범한 무인들로 위장해 눈에 띄지 않게 빠르게 이동하다가 하남에 접어들어선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상태로 정천맹에 도착하자 많은 이들이 우리의 복귀를 환영했다.

백대악인 중에서도 악명과 실력이 자자했던 색혼수사를 사로잡은 공로는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부상자는 있어도 사망자는 없다는 소식에 우리를 향한 찬사가 한 번 더 이어졌다.

복룡추호대주인 설표와 정예인 일조 대원들의 위세가 드높아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순간인데도 손유수와 고주양을 비롯한 일조 대원들은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월영련에 가담한 한천자와 그런 놈이 자신들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서인지 잔뜩 굳어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하시죠. 맹 내부에선 놈도 어쩌지 못할 테니까요.”

밖이라면 자객들이나 실력 있는 고수들을 동원해서 우리를 습격할 수 있어도 안에서는 아니었다.

놈들의 계략이 뭔진 몰라도 아직은 암중 속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할 테니까.

내 말에 일조 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표정을 풀었다.

그중 고주양이 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조장은 그렇고. 네가 차라리 부조장을 맡는 게 어떠냐?”

“싫습니다. 전 막내가 좋은데요.”

“아. 나도 막내 때가 좋았는데.”

내가 피식 웃자 그도 웃었다. 그의 너스레에 나머지 조원들도 따라 웃었다. 항상 긴장된 분위기를 풀어주는 역할을 떠맡는 그였다. 그런 그가 아니면 누가 부조장 역할에 또 어울리겠나.

그렇게 우리는 외원을 지나쳐 복룡각으로 복귀했다.

그러자마자 누군가가 헐레벌떡 복룡각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고 그 시선의 끝에는 집형당주 한천자가 당혹스러워하는 안색을 숨기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무사히 복귀했구나.”

애써 침착함을 되찾은 그가 말했고 설표는 덤덤히 고개를 숙였다.

“저를 비롯한 복룡추호대 일조, 사망자 없이 무사히 임무를 완료하고 복귀했습니다. 제가 직접 보고를 올리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아니다. 너희가 세운 공로를 치하해 주고자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달려왔다. 다들 고생 많았구나.”

한천자는 말을 하면서도 중간중간 우리와 전신을 쇠사슬로 속박한 색혼수사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느냐?”

“정체 모를 자객들이 색혼수사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만 모두 처리했습니다. 색혼수사가 혼자일 거라는 정보와 달라서 다들 고생이 많았을 겁니다.”

“이런.”

한천자가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의 고생이 안타까운 건지 우리가 살아남은 게 안타까운 건지. 아마도 후자일 텐데 놈은 우리만큼이나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 우리가 속사정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자세한 보고는 나중에 다시 받도록 하지. 다녀오느라 고생이 많았을 텐데 다들 푹 쉬고 있도록. 이번 임무에 대한 논공행상은 며칠 뒤에 열도록 하마.”

“예. 색혼수사는 수천뇌옥에 구금하겠습니다.”

설표의 대답을 끝으로 한천자가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조소와 함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제 어쩔 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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