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7장 중심(1)
쾅!
집무실로 돌아온 한천자가 탁자를 내려쳤다. 한차례 진동과 함께 탁자 위의 서류들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설표와 복룡추호대 일조 대원들이 복귀했다는 소식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복룡각으로 뛰쳐나갔고 그곳엔 임무를 떠났던 모든 인원이 살아 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눈으로 직접 확인했는데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인극 고수인 색혼수사와 살수 집단 중에서도 최정예라 불린다는 흑림(黑林)의 자객들이 대거 투입된 함정이었다.
실력도 실력이고 의뢰자의 정보를 절대 발설하지 않는 자들이라 거액을 주고 고용했다.
설표와 유진휘라는 놈을 비롯한 복룡추호대 일조 대원들을 처리하기엔 충분한 전력이었다.
오히려 과한가 싶다가도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기 위해 그대로 진행했는데.
‘흑림의 자객들을 모두 처리하고 색혼수사까지 사로잡아? 반대로 제 놈들은 한 놈도 죽지 않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설표와 복룡추호대.
그들이 강하다는 건 인정한다. 지난 십수 년간 자신이 이끌어 온 수하들이다. 그들의 실력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걸 고려해서 계획한 함정이었는데…….
순간 한천자는 복룡각에서 걸어 나오기 직전에 마주친 유진휘의 눈빛을 떠올렸다.
건방지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저갱을 떠오르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놈이 변수였나.’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그것밖에는 말이 되지 않는다. 놈의 무위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면.
‘제길.’
한천자의 분노가 이번에는 화월각주에게로 향했다.
‘놈에 대해 일말의 조사도 하지 않은 것인가? 멍청한 새끼!’
유진휘라는 놈의 실력에 대해 주의라도 주었다면 좀 더 확실한 함정을 준비했을 테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설표와 일조 대원들이 아직 자신의 배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거였다.
분위기나 태도를 보면 그저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이들의 모습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흑림의 자객들을 고용한 게 신의 한 수였다.
색혼수사가 남아 있긴 하지만 놈도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는 대가리가 있다면 입을 털지 않았겠지. 인극 고수인 만큼 그 정도는 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놈을 살려둘 순 없다. 아직은 입을 열지 않았더라도 언제 놈이 자신이나 월영련에 대해 정보를 흘릴지 몰랐다.
계획의 실패는 이미 일어난 일.
지나간 일에 더는 얽매이기보다는 당장 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 게 옳았다.
색혼수사는 며칠 내로 수천뇌옥에 갇히게 될 테니 적당한 시기에 처리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수천뇌옥의 관리자가 자신인 만큼 그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다음은 역시나 유진휘와 설표를 없애고 집형당을 온전히 장악하는 건데.
복룡추호대의 이조부터 사조 대원까지는 모두 회유한 상태였다.
이번 계획이 성공했다면 그들 중 하나를 대주의 자리에 앉혀 집형당을 자신과 월영련의 수족으로 만들어 둘 심산이었었다.
한천자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함을 되찾았다.
계획이 실패해 상황은 여전히 제자리긴 하지만 배신자인 게 들통 나지 않았다면 기회는 있었다.
다만 유진휘라는 놈을 염두에 두고 좀 더 완벽하게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기 위해선 아무래도 화월각주를 다시 만나봐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놈의 건방진 훈수와 질타를 들어야 한다는 게 못마땅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맹 내부에서 일을 버리기엔 고려할 부분이 너무 많았으니까. 어떻게든 설표를 비롯한 그들을 다시 밖으로 내돌리고 외부인의 손을 빌려서 처리하는 게 최선이다.
‘화월각주를 만나기 전에 색혼수사는 확실히 처리해둬야겠군.’
색혼수사가 수천뇌옥에 구금되기만을 기다렸다가 놈을 처리하고 곧장 화월각주와 다음을 논의해야겠다고 생각하는 한천자였다.
***
“잘 속아 넘어간 것 같죠?”
손유수의 물음에 설표가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좀 전까지 한천자를 상대하면서 다들 속내를 감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놈의 배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장에라도 놈의 심장에 칼을 박아넣고 싶다는 충동을 참아내야 했을 테니까.
나는 그런 조원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다들 잘 참으셨습니다.”
내 말에 고주양은 혀를 내둘렀다.
“간신히 참아내긴 했지만.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우릴 대할 수 있지? 역겨워서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비도를 내던질 뻔했다.”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나머지 조원들도 저마다 쌍욕을 해대며 한천자가 서 있던 자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내 모두의 시선은 설표에게로 향했다.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무사히 맹으로 복귀하고 한천자도 속여넘겼으니 그다음이 궁금하다는 표정들이었다.
설표는 나와 눈빛을 주고받은 뒤에 입을 열었다.
“집형당주는 또다시 우리를 노릴 게 분명하다. 다만 우리가 맹 안에 있는 동안은 손을 쓰기가 쉽지 않을 터. 한동안은 시간을 벌었다는 뜻이지. 그사이에 우리는 놈의 배신을 증명할 수 있는 색혼수사를 데리고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인물을 만나야 한다.”
“저희를 도와줄 인물이라면…….”
현 맹주와 의당주. 그리고 호천각주까지. 한천자를 비롯한 여러 당주 및 인사들과 대립 구도를 펼치고 있는 천하오주의 인물들.
그중에서도 지금 당장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맹주인 독고태문이었다.
“맹주님을 뵈어야겠다.”
***
나와 설표는 조원들에게 색혼수사를 감시하게 놔두고 복룡각의 집무실로 이동했다.
색혼수사는 한천자의 배신을 증명할 중요한 증인이었으므로 최대한 지켜내야 했다. 한천자에겐 수천뇌옥에 구금시키겠다고 말해두긴 했지만 그건 그를 속여넘기기 위한 거짓이었을 뿐이다.
“그래도 색혼수사를 오래 붙잡아두고 있을 순 없을 것 같구나. 우리가 무사히 복귀한 이상 집형당주가 어떻게든 우리를 감시하고 있을 테니.”
“그렇겠죠. 맹주님을 뵙는 것도 정상적인 방법으론 힘들 수도 있겠고요.”
설표에게 복룡추호대의 대주라는 지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맹주를 알현하기 위해선 절차가 필요한 법이었다.
그 절차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한천자가 어떻게든 방해해 온다면 시간이 소요되거나 아예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사이에 한천자는 색혼수사를 비롯해 우리를 처리하기 위해서 다시금 어떻게든 손을 써올 테지.
“차라리 의당주나 호천각주를 먼저 만나보는 건 어떻겠나?”
설표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의당주는 내가 천영검대주였던 시절과 변함없이 여전히 선우약가의 인물 중 하나인 선우벽(鮮于碧)이었다.
선우약가주의 형제인 직계로서 가주 못지않은 명성과 위세를 지닌 의원이자 장로였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그는 분명 정천맹을 배신할 인물은 아니었다. 무공도 의가의 인물치고는 제법 뛰어났고.
하지만 의당주라는 자리의 특성상 다른 당주나 각주보다는 권세가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호천각은 맹주의 호위를 담당하는 집단인 만큼, 무력만큼은 여느 당이나 각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
다만 호천각 또한 호위 부대라는 특성상 맹의 정치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었다.
즉 의당과 호천각. 두 집단은 각각 떨어뜨려 놓고 봤을 땐 나머지 당과 각보다 그 힘이 좀 부족할 수밖에 없다.
“두 분 모두 만나 뵙긴 해야죠. 다만 맹주님이 먼저입니다. 사실 그분들을 만나는 건 저희가 도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도움을 받는 게 아니다?”
“예. 저희가 그분들께 힘을 실어드리고 그분들을 도와 한천자를 비롯한 장로들을 견제하고 밀어내기 위함입니다. 그 끝엔 월영련이 있겠죠.”
내 말에 설표가 눈을 빛냈다.
“당장은 우리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지만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맹주님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뜻인가?”
“월영련의 일차적인 목적이 맹주님을 밀어내는 거라면, 그렇습니다. 한천자의 배신을 알리고 놈을 처단하는 건 저희가 아니라 맹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맹주님의 입지가 지금보다 훨씬 커지겠지.”
설표가 감탄과 함께 말을 이었다.
“네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맹주님을 향한 대주님의 신뢰가 굳건하시니, 저도 맹주님을 믿어볼 생각입니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월영련주를 비롯해 월영련의 몸집을 생각해 봤을 때, 아무리 나라도 혼자서 그들을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전생의 무공을 온전히 회복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의 정황을 미루어 보자면 놈들은 마교에 필적하는 힘을 지녔다고밖에 여길 수 없었다.
더군다나 놈들은 단순히 힘으로 강호를 집어삼키려는 게 아니라 온갖 계략과 음모를 꾸며내는 지략과 대범함까지 겸비한 채였다.
그런 놈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선 우리도 그에 걸맞은 아군과 세력이 필요했다. 그 중심은 내가 아니라 현 맹주인 독고태문이 되어주길 바랐다.
나아가 결국은 천하오주가 하나로 뭉쳐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동악검선 어르신이 이끄는 태산파. 현 맹주의 가문인 독고세가. 의당주의 선우약가. 진천문의 인물인 호천각주. 마지막으로 하남장가는…….’
자연스럽게 하남장가로 돌아갔던 장진악의 얼굴이 떠올랐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조만간 정천맹이 안정되는 시기가 찾아온다면 녀석을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당장은 맹주인 독고태문을 만나는 게 우선이다.
맹주이면서도 오당과 삼각의 견제로 인해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을 테니 우리의 등장을 반길 거라 여겼다.
“하지만 감시를 피해 은밀히 맹주님을 뵐 방법이…….”
설표가 미간을 찌푸리며 방법을 궁리하는 사이 나는 이미 묘안을 떠올린 상태였다.
“은밀히 찾아뵐 방법이 있습니다. 다만 맹주님께서 어떻게 받아들이실진 모르겠네요.”
“어떤 방법이기에 그런가?”
나는 대답 대신 설표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시간을 끌 필요도 없이 지금 당장 색혼수사를 이끌고 맹주를 찾아가면 될 일이었다.
***
“내원에 이런 비밀통로가?”
나를 뒤따르고 있는 설표가 깜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내원에서 맹주전으로 곧장 이어지는 비밀통로였다.
천영검대주였던 시절에 내게만 허락된 공간이기도 했다.
이 통로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와 검신 영감뿐이었다.
검신 영감이 독고태문에게 이 통로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면 말이다.
걸으면서 계속 살펴보니 내가 죽은 이후에 누군가가 사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굳이 알려주진 않았나 본데.’
독고태문이 맹주로 취임한 이후 천영검대가 대부분 새로운 인원들로 교체됐다고 들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새로운 통로를 사용하고 있겠구나 싶다.
“이런 통로를 네가 어떻게……?”
설표가 당혹과 놀람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나중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아니다. 굳이 캐묻진 않으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설표는 어느새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한천자가 파놓은 함정에서 살아 돌아올 수 없었을 테니.
이후 우리는 빠르게 통로를 지나쳐 출구로 빠져나왔다.
그러자마자 눈에 익은 맹주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허. 통로가 정말로 여기까지… 허억!”
설표가 두리번거리면서 말을 잇다가 헛숨을 들이켰다.
맹주전 내부의 어둠 속에서 숨 막히는 듯한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 숫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맹주전을 지키는 무인들. 맹주를 호위하는 호위무사들. 그리고 그 중심에서 태사의에 앉아 나와 설표를 내려다보고 있는 독고태문까지.
“재밌구나. 쥐새끼들이 여기까지 숨어들다니. 맹주전에 저런 통로가 있었던가?”
독고태문으로선 느닷없이 나타난 우리를 순간적이나마 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덤덤했고 여유로웠다.
아무리 오당과 삼각에 밀려 어깨를 펴지 못하는 상태라고 하더라도, 그는 엄연히 정천맹의 맹주였고 검법으로는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는 독고세가의 가주였다.
이윽고 그가 몸을 일으키자 몸이 저릿할 정도의 기세가 나를 덮쳐왔다.
어느새 그의 시선이 설표가 아니라 오롯이 내게로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