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7장 중심(2)
독고태문이 기세를 피워 올릴수록 맹주전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기세만으로 나를 무릎 꿇리려는 심산으로 보였다.
하지만 나는 덤덤하게 그 기세를 받아넘겼다. 그 과정에서 나 또한 기도를 온전히 내보여야만 했다.
쿠궁!
서로의 기파가 충돌하며 순간 맹주전이 한차례 진동했다.
그러자마자 나를 압박하던 기세가 씻은 듯이 사라졌고 독고태문의 두 눈은 안광으로 번뜩였다.
“실력이 예사롭지 않구나.”
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내 얼굴을 주시하다가 미소를 지었다.
“이번 맹시에서 감독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던 유진휘라는 아이가 아니더냐?”
그래도 맹주라고 그는 단번에 나를 알아보았다. 아마 옆에 서 있는 설표, 그러니까 복룡추호대의 대주를 보고 우리가 누구인지 유추하는 데 도움이 됐으리라.
“보, 복룡추호대 대주 설표. 결례를 무릅쓰고 맹주님을 알현합니다.”
기세가 가라앉자 설표는 즉각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 또한 독고태문과 잠시 눈빛을 주고받다가 함께 무릎 꿇었다.
“복룡추호대 일조 대원 유진휘, 맹주님을 뵙습니다.”
정체를 밝히자 맹주전을 지키는 경비무사들과 맹주의 호위무사들이 살기를 거둬들였다.
다만 여전히 경계하는 모양새였다.
아무리 신분이 확인됐다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는 맹주전에 숨어든 죄인들이었으니까.
“두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제 알아보았다. 그래서. 이 야심한 시각에 맹주전으로 숨어든 이유는? 날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리 색혼수사를 사로잡은 공로를 세웠다고 하더라도 무사하진 못할 것이라 장담하마.”
우리가 임무에서 복귀한 지 이제 고작 반나절이 지났는데 독고태문은 임무에 대한 소식까지 이미 전해 들었나보다 싶었다.
염려와 달리 그는 그 나름대로 맹주의 자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로선 다행스러운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꿀꺽.
침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설표는 차분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복룡추호대의 대주로서 감히 정천맹을 배신하고 소인을 비롯한 제 수하들을 함정에 빠트린 집형당주의 죄악을 맹주님께 보고드리기 위해 큰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허락도 없이 맹주전에 침입한 죄는 제가 직접 책임지고 달게 받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설표는 내가 받아야 할 벌까지 끌어안으려는 덕목을 내보였다. 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계속 귀를 기울였다.
“함정? 집형당주의 배신?”
“예. 집형당주는 색혼수사를 처단하라는 임무를 빌미로…….”
설표가 임무를 위해 맹을 나선 후 겪은 일들을 상세히 보고했다. 독고태문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심문하는 과정에서 색혼수사 또한 직접 실토한 사실입니다.”
일련의 보고가 끝나자 독고태문은 쇠사슬에 묶여 있는 색혼수사를 힐끗 쳐다봤다.
“인극 고수와 오십에 달하는 자객들이 펼쳐놓은 함정. 얕보는 건 아니지만 복룡추호대만으로는 헤쳐나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물론 저희만으로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 아마 불가능했을 겁니다. 하지만.”
설표의 시선은 나를 향했고 독고태문이 그 시선을 쫓았다.
“일조의 신입 대원이 혼자서 색혼수사를 제압하는 신위를 보였기에 가능했습니다.”
약관의 나이에 불과한 내가 인극 고수를 제압했다는 말에도 독고태문은 여전히 덤덤했다.
첫 만남부터 기세를 섞으며 내 실력을 파악해 뒀을 테니까.
그래서인지 덤덤한 눈빛에 옅은 의문이 감돌기 시작했다.
“맹시에 지원했을 때는 실력을 숨겼군.”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설표를 따라 맹주를 믿어보기로 한 이상 나도 숨김없이 모든 걸 털어놓을 요량이었다.
“왜지?”
“입맹을 결심한 이유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건…….”
“월영련을 뒤쫓기 위해서?”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독고태문을 올려다봤다.
***
설표를 맹주전에 남겨둔 채, 독고태문은 나를 데리고 어딘가로 이동했다.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싶다며 도착한 곳은 호정(湖亭). 맹주전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나오는 맹주에게만 허락된 안식처 중 하나였다.
호정은 내게도 익숙한 장소였다.
전생엔 이곳에서 검신 영감과 많은 대화를 나눴었고 종종 술자리를 가지기도 했었다.
중앙에 자리 잡은 연못을 기준으로 좌측으론 대숲이 우측으론 이름 모를 꽃밭이 이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검신 영감과 실력을 겨뤘던 곳도 대나무가 줄지어 늘어서 있는 저 대숲 안이었다.
천일백야검법을 비롯해 내 모든 걸 내보이고도 패배했었고 이후 영감에게 많은 걸 배우며 짧은 시간 안에 천영검대주로 거듭나 단신으로 천마와 호각을 겨룰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됐었다.
그런 추억이 서린 공간에 다시 오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한참 호정의 풍경을 눈에 담고 있을 때였다.
“처음 와보는 곳일 텐데 낯선 기색 하나 없구나.”
독고태문의 말에 고개를 저으려 할 때였다.
“역시 그런가? 천영검대주.”
이번에도 나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월영련도 모자라 설마 내 정체까지?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천영검대주.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아이라더니. 맹주전으로 통하는 비밀통로를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에게 적지 않은 가르침과 정천맹에 대한 여러 정보를 전해 들은 모양이로군.”
“제가 그분의 유지를 이었다는 사실을 맹주님께선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태산파의 장문인인 동악검선이 내게 직접 서찰을 보내왔다. 네가 태산의 은인이라는 부분을 강조하며 천영검대주의 유지를 이은 아이라는 말과 네가 월영련에 대한 정보를 추적하기 위해 입맹을 결심했다는 사실까지 전해 들었지.”
동악검선 어르신에게서 그런 말은 듣지 못했었는데. 그래도 같은 천하오주의 주인들이라고 서로를 향한 신뢰가 기저에 깔려 있던 건가.
“그러면서 경고하더구나. 한천자 도경수와 더불어 내가 배신자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다만 만일 내가 배신자이고, 그로 인해 입맹을 결심한 네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과 태산의 모든 제자가 나서서 가장 먼저 나를 향해 검을 겨누겠다더구나. 내가 배신자가 아니라면 너를 지켜봐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지. 함께 다시금 강호를 지켜나가고자 한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독고태문의 말에 나는 동악검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맹주인 그가 배신자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황에서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배신자라면 경고가 될 서찰이었고 배신자가 아니라면 함께하자는 뜻을 밝히는 서찰이었다. 동시에 내 안위를 걱정해 내건 보험이기도 했고.
“그럼 맹주님께선 어느 쪽이십니까?”
“뭐라?”
“동악검선 어르신의 서찰을 받고도 집형당주가 복룡추호대주님과 저를 비롯한 일조 대원들을 사지로 밀어 넣었을 때, 맹주님은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
독고태문은 대답하지 못했다.
동악검선에게 내 안위를 신경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음에도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건 그의 잘못이 맞으니까.
나로서는 물론 왜 도와주지 않았냐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게 아니었다.
다만 그가 월영련이라는 존재에 대해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현 상황이 어떤지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솔직한 심정을 얘기하자면 너를 살펴봐 줄 여유가 없었구나. 이미 서찰을 받기 전부터 나는 월영련이라는 암중 세력의 존재에 대해 깨닫고 있었다.”
“이미 파악하고 계셨다고요?”
“집형당주가 언제부턴가 놈들 편으로 돌아섰다는 것도 마찬가지. 집형당주뿐만 아니라 몇몇 장로들까지 가세했겠지. 수천뇌옥의 죄수들을 멋대로 빼내 악용하고 천상비고에까지 들락거리며 비급들을 탐냈다.”
“그중엔 마교의 무공들도 있었을 테고요.”
“…그래. 태산파를 구해낸 너라면 알고 있었을 테지.”
“그 말은 놈들에 대해 파악은 하고 있었지만 저지할 순 없었다는 뜻입니까?”
“정확히는 방법이 없었다. 집형당주를 필두로 한 세력이 똘똘 뭉쳐 나를 견제하는 만큼 놈들을 쳐내려면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고, 그 증거를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붓고 있는 와중이었어.”
맹주라고 하더라도 아무런 증거도 없이 집형당주인 한천자를 배신자로 몰았다간 역풍을 맞기 십상인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더구나 놈들이 빼내 간 마교의 무공 비급 중에는 천마의 독문 심법인 묵룡일원공(墨龍一元功)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걸 알아차리고 뒤늦게 천상비고를 당분간 폐쇄하기로 하긴 했지만…….”
이런 미친.
맹주 앞이라 쌍욕이 튀어나오려던 걸 간신히 참아냈으나 진심으로 경악하는 중이었다.
묵룡일원공이라니.
천마의 심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천마심결(天魔心訣). 마교주의 대표적인 심법. 그리고 묵룡일원공. 교주의 후계자가 익히는 심법으로 천마심결의 기틀이 되는 심법이 바로 묵룡일원공이었다.
묵룡일원공을 익히고 있지 않다면 천마심결도 익힐 수 없을뿐더러 묵룡일원공 자체만으로도 이미 극상의 심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비급을 빼앗겨?
“집형당주의 배신을 증명할 증거와 더불어 묵룡일원공의 비급을 추적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부분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미안하구나.”
나는 어느 정도 수긍했다.
나였어도 묵룡일원공의 비급을 회수하는 걸 최우선으로 뒀을 것 같았다.
“그럼 증거와 비급의 회수. 둘 중 진전된 건 아무것도 없는 겁니까?”
“맹주인 주제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면목 없구나. 다만 비급의 회수는 천영검대에게 맡겨둔 상황이다.”
천영검대라.
내가 있었던 전생의 천영검대였다면 분명 좋은 결과를 가지고 돌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천영검대는 새로운 인물들로 교체된 상황이었다. 그들이 과연 옛 천영검대만큼의 수준일까?
어쨌든 천영검대라는 이름을 짊어진 이들이니 그 부분은 알아서 할 테고.
“색혼수사 정도면 한천자의 배신을 증명할 증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너와 복룡추호대가 정말 큰 도움을 주는구나. 그렇지 않은가?”
독고태문이 고개를 돌려 허공에 대고 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정 안쪽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이미 이곳에 나와 맹주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있었다.
기척만으로는 내가 아는 그가 맞는지 긴가민가했지만, 얼굴을 마주하니 사뭇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총군사 묵가후(墨可詬).
전생에 검신 영감과 함께 정천맹을 이끌며 정마대전을 승리로 이끈 일등 공신 중 하나였다.
천영검대주였던 나와도 인연이 깊었다.
과거에 천영검대를 필두로 한 수많은 작전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으니까.
그런 그를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과 함께 안도감이 깃들었다.
맹주인 독고태문. 의당주와 호천각주. 그들과 함께 묵가후 또한 아군이 되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큰 힘이 되어줄 터였다.
묵가후 또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와 설표가 색혼수사를 사로잡아온 덕분에 숨길이 트였다는 듯.
“복룡추호대 일조 대원 유진휘가 총군사님을 뵙습니다.”
내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이자 묵가후가 미소를 지었다.
“반갑네. 정말 반가워.”
그가 내 어깨를 두드려주는 순간 나는 조금이나마 마음이 홀가분해짐을 느꼈다.
맹주인 독고태문을 중심으로 정천맹 최고의 책사인 그가 머리가 되어준다면 나는 예전처럼 마음 편히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베어가면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