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7장 중심(3)
“지금이 집형당주를 쳐낼 수 있는 적기입니다.”
총군사 묵가후의 확언에 독고태문과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색혼수사를 사로잡은 지금이야말로 기회였다.
“흘러가는 상황을 보면 집형당주는 복룡추호대주를 처리한 뒤에 자신의 수족이 될 만한 자를 그 자리에 앉혀 집형당을 온전히 장악하려는 심산인 것 같습니다.”
“복룡추호대주는 그렇다 치고. 집형당주가 이 아이까지 노리는 이유는?”
독고태문이 눈짓으로 나를 가리키지 묵가후가 말을 이었다.
“일전에 놈들의 계략을 막아내고 태산파를 구해낸 전적이 있는 인물 중 하나이지 않습니까? 백의문주와 유씨세가의 소가주. 월영련 입장에선 그런 인물 중 하나가 입맹했으니 존재 자체만으로도 거슬렸을 겁니다.”
총군사인 만큼 그는 제대로 현 상황을 내다보고 있었다. 굳이 내가 별다른 설명을 부연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렇군. 그렇다는 건 놈들이 지금 당장 원하는 게 집형당의 권력이란 말인가?”
내외적으로 악인을 척결하는 임무를 지닌 집형당.
그 말은 죄목과 명분만 있다면 정천맹의 인물 중 그 누구도 집형당의 칼날을 피해 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당장은 설표가 복룡추호대주로서 버티고 있으니 공명정대함이 유지되고 있지만, 설표가 사라지고 한천자가 온전히 집형당을 장악하게 된다면 입맛대로 피바람을 일으킬 터였다.
아마 그 시작은 독고태문의 팔다리가 되어주는 의당주와 호천각주. 더불어 총군사인 묵가후까지.
고립된 맹주는 아마 마지막 먹잇감으로 남겨놓을 것이다.
“그걸 위해서라도 다시금 복룡추호대주를 노릴 가능성이 큽니다. 이번에도 아마 외부에서, 정확히는 월영련의 힘을 빌려서라도 전보다 확실한 칼자루를 준비할 거라 사료됩니다. 대신 집형당주의 입장에선 사라진 색혼수사가 마음에 걸려 조급해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겠군.”
“저희가 할 일은 그 조급함에 불씨를 지피는 일입니다.”
“불씨를 지핀다?”
독고태문이 반문하자 묵가후가 눈을 빛냈다. 나와 설표가 색혼수사를 사로잡아왔다는 얘길 들었을 때부터 강구한 대책인 것 같았다.
***
복룡추호대주와 일조 대원들이 임무에서 복귀한 지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한천자는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색혼수사의 수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데 며칠이 지나도록 수천뇌옥의 수감자 명단에 색혼수사의 이름이 올라오지 않았다.
‘설마?’
위화감을 느낀 한천자는 황급히 설표를 찾았다. 하지만.
“대주님과 일조 대원들이 어젯밤부터 보이지 않습니다.”
복룡추호대의 이조장인 전여(全與)가 뜻밖의 말을 전해왔다.
“무슨 소리냐?”
“임무에서 복귀한 이후 줄곧 복룡각에서 대기하며 숙소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는데 어젯밤 이후론 아예 숙소까지 비운 채로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감시를 피해 모습을 감춘 것 같습니다.”
“이런!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한단 말이냐?”
“저희도 그 사실을 조금 전에야 막 알아차린 참이라서…….”
한천자가 복장이 터진다는 듯 전여를 쏘아봤다. 설표와 일조 대원들을 처리한 후에는 이조장인 전여를 복룡추호대주의 자리에 앉힐 계획이었다.
자신을 따라 배신을 결심할 만큼 전여는 충성스러운 수하였다. 다만 명령을 수행하는 능력이나 역량은 매번 아쉽기 그지없었다.
설표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일조장인 손유수와 비교해 봐도 그렇다.
‘제길.’
설표나 일조 대원들이 전여처럼 자신을 따라 배신을 결심해 주었다면 일이 이렇게 복잡해지지도 않았을 텐데.
그들의 충성심이 전여와 달리 자신이 아니라 정천맹을 향해 있다는 게 못내 안타까웠다.
“당장 놈들의 거취를 알아내거라. 색혼수사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놈들이 뭔가를 알아내 색혼수사를 데리고 몸을 숨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전여가 즉각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가 방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고 있었고 한천자와 전여의 시선이 동시에 집중됐다.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전여와 함께 한천자에게 회유된 삼조장이었다.
“무슨 일이지?”
한천자의 질문에 삼조장은 식은땀을 닦아내며 대답했다.
“그들이 색혼수사를 통해 무언가를 알아낸 게 틀림없습니다. 더군다나 그게 맹주님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간 듯싶습니다. 설 대주님과 일조 대원들이 맹주님에게 직접 특명을 받아 어젯밤에 맹을 떠났답니다.”
“이런 젠장!”
한천자가 격분하며 탁자를 연신 내려쳤다. 쾅, 쾅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탁자는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고작 며칠 사이에 맹주에게까지 보고를 올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아무도 모르게, 그것도 감시를 피해 맹주에게 보고를 올릴 수 있었단 말인가.
조금이나마 흥분을 덜어낸 그는 다시 삼조장을 쳐다봤다.
“무슨 명령이라더냐?”
“아무래도 색혼수사의 배후를 뒤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색혼수사의 배후는 자신이다. 한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뒤쫓는 거라면.
‘설마 화월각주?’
현재 색혼수사와 엮인 사람은 자신과 화월각주뿐이었다.
설표와 일조 대원들이 그중 화월각주를 쫓고 있는 거라면 아직 색혼수사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몸은 부들부들 떨릴 만큼 분노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머리는 냉정을 되찾았다.
배후에 대해 털어놓았다면 분명 그 안에는 자신의 이름도 섞여 있었을 터.
“맹을 떠나야겠다.”
한천자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색혼수사가 어디까지 정보를 털어놓았는지는 몰라도 화월각주의 은신처를 정확히 짚어내진 못했을 것이다.
놈들이 화월각주의 은신처를 찾아내기 전에 자신이 먼저 화월각주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함께 몸을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계속 맹에 남아 있다간 집형당을 장악하는 건 고사하고 배신자로 몰려 처형당할 처지였다. 어차피 배신한 마당에 맹을 떠나 월영련에 의탁하는 것만이 살길이다.
다만 월영련에 의탁한다고 하더라도 무사할 거라는 장담은 하지 못했다.
집형당의 권력을 이용해 정천맹에서 천하오주의 인물들을 하나씩 쳐내라는, 월영련주에게 부여받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됐으니까.
그래도 지금까지 월영련을 위해 해온 일들이 있으니 책임을 묻는 건 피해 갈 수 없어도 연명은 할 수 있으리라.
“그럼 저희는…….”
한천자가 맹을 떠나겠다는 말에 전여와 삼조장은 표정이 복잡해졌다.
한천자를 따라 배신을 결심했다. 그건 한천자를 향한 충성심과 더불어 자신들이 복룡추호대의 주가 될 수 있다는 보상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맹을 떠나게 된다면…….
한천자는 두 사람의 표정을 읽고 그들을 설득했다.
“복룡추호대가 그리 대단한 자리더냐? 조만간 강호는 정천맹이 아니라 월영련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복룡추호대였던 너희들의 실력이면 월영련에서도 크게 활약할 수 있을 텐데 뭐가 걱정이란 말이냐?”
“…알겠습니다.”
“집형당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사조장도 불러오너라. 남아 있는 복룡추호대 모두를 데리고 가야겠다.”
대주인 설표와 정예인 일조 대원들에 비할 정도는 아니나 그들 또한 당당히 복룡추호대라는 이름을 짊어졌다.
그 정도 수준의 무인들을 이끌고 월영련에 가담한다면 임무에 실패한 자신의 과오가 조금은 줄어들지도 몰랐다.
더불어 이들이라도 있어야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마침내 한천자는 남아 있는 복룡추호대를 이끌고 은밀하게 정천맹을 빠져나갔다. 맹을 벗어난 순간부터는 머리와 마음속에서 정천맹을 지워버렸다.
그 자리를 월영련이라는 이름이 대신했다. 아직은 흑막 속에 가려진 미지의 세력이나 언젠가는 그 세력이 천하 위에 우뚝 솟을 것이라 장담하며.
***
하늘이 어둠에 물든 야심한 시각,
“총군사님 말대로군.”
정천맹 외벽에 은신해 있던 설표가 눈을 빛냈다.
나 또한 설표 옆에서 정천맹을 벗어나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는 한천자와 복룡추호대의 이조부터 사조까지의 대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총군사인 묵가후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색혼수사에게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배후를 뒤쫓고 있다는 정보를 흘리면 조급해진 한천자가 반응을 보일 것으로 예측했다.
예측대로 한천자는 남아 있는 복룡추호대원들을 이끌고 은밀하게 맹을 벗어났다.
꼬라지를 보니 이참에 아예 월영련으로 의탁하려는 모양새처럼 보였다.
“놈들이 향하는 곳에서 월영련의 인물까지 잡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누군진 몰라도 분명 한천자를 앞세워 지금까지의 상황을 주도한 인물일 것이다.
“은밀히 추적한다.”
“예.”
설표의 명령에 나를 비롯한 일조 대원들이 밤하늘로 녹아들었다.
같은 복룡추호대라도 일조와 나머지 세 개의 조는 격이 달랐다. 정예들의 추적을 놈들이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동시에 놈들을 뒤쫓고 있는 건 우리만이 아니었다.
맹주인 독고태문에게는 천영검대 말고도 휘하에 여러 무력 집단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론 천군지사대. 또 하나는 월영련에 대항하고자 독고태문이 새로이 키워낸 쇄월청검대(碎月淸劍隊).
그중 쇄월청검대가 다른 방향에서 한천자와 무리를 뒤쫓기 시작했을 것이다.
무위도 높고 독고태문 스스로가 신뢰할 수 있는 자들만 선별해 만들어놓은 검대라고 했다.
이번 맹시에 합격한 인원 중에서도 일부를 뽑아 합류시켰으며 며칠 전에는 내게도 쇄월청검대에 입대하길 권유했었다.
‘월영련이라는 공통의 적을 가졌으니 네가 도와줬으면 좋겠다. 천영검대주의 유지를 이어받은 너라면 내게도 큰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권유받았을 때 자연스럽게 전생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에도 맹주인 검신 영감에게 천영검대에서 함께 해주길 바란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이번에는 거절했다. 내가 있을 곳은 쇄월청검대가 아니었다. 지금은 복룡추호대 일조의 막내 대원으로 충분했다.
그때 손유수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등잔 밑이 어둡다지만 이런 지척에 숨어 있을 줄은.”
그녀 말대로 추적은 길지 않았다.
한천자가 멈춰 선 곳은 정천맹 본단이 있는 근처 저잣거리. 거리에서도 유독 이상하리만큼 한적한 위치에 자리 잡은 평범한 다루 앞이었다.
한천자를 뒤따르던 무인들은 다루 주변에 숨어 대기하고 있었다.
“진실을 모르는 이들의 눈에는 그저 차나 한잔 마시러 온 사람처럼 보이겠습니다.”
지금껏 그래 왔을 것이다.
평범한 다루에서 차를 마시는 척 월영련의 인물과 밀담을 나누며 음모를 꾸며왔겠지.
한천자가 다루 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나서 내가 말했다.
“안쪽은 제가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설표와 손유수는 반대하지 않았다.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지켜봤던 이들이니까. 지위는 막내지만 실력으로는 내가 가장 앞선다는 걸 다들 인정하고 있었다.
“우리는 주변을 포위하고 있겠다.”
설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나는 곧장 다루 쪽으로 몸을 날렸다.
괘월선보를 응용해 발전을 거듭한 잠행술인 만큼 다루 주변에 퍼져 있는 경계망 정도는 쉽게 허물고 잠입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