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8장 국면(1)
손님 하나 없는 다루 내부. 한천자가 익숙하다는 듯 조심스레 이 층 창가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늘 앉는 자리에 앉아 휘장으로 가려진 공간을 들여다보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화월각주가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화월각주 입장에선 느닷없는 방문이 탐탁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한천자의 표정을 보니 결코 좋은 소식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 이미 복룡추호대주와 일조 대원들이 무사히 맹으로 복귀했다는 사실까지 파악하고 있던 참이다.
“그렇게 확신을 하시며 돌아가시더니 꼴이 우습습니다.”
화월각주가 맞은편에 앉아 팔짱을 꼈다. 한천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색혼수사와 흑림의 자객들 오십. 절대 실패할 전력이 아니었지. 그런데도 실패한 원인은 유진휘라는 놈의 무위가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강했던 것이고 그에 앞서서 놈에 대한 정보를 화월각주인 당신이 정확히 제공해 주지 않아서였소.”
“그 말은 계획이 실패한 게 내 탓도 있다?”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소? 놈에 대해 주의만 주었더라도 좀 더 확실한 함정을 준비했을 것 아니오.”
“그래서 이 야밤에 누구 잘못이 더 큰가를 가려보자고 찾아온 겁니까? 복룡추호대를 줄줄이 끌고 와서는?”
화월각주가 짐짓 분노한 기색을 보이자 한천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잘잘못을 따지자고 온 게 아니오.”
“분위기를 보니 다음을 논의하고자 온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다음을 논할 기회 자체가 이제는 내게 없소.”
한천자는 한숨과 함께 현 상황에 대해 털어놨다.
색혼수사가 인질로 잡혀 배후에 대한 정보를 털어놨고 그 정보가 맹주에게까지 흘러 들어갔으며 맹주의 명령을 받은 이들이 지금은 그 배후를 뒤쫓고 있다는 사실까지.
“색혼수사가 어디까지 털어 놨는진 모르겠지만 계속 조사하다 보면 머지않아 이곳까지 들이닥칠지도 모르오.”
“그 사실을 내게 전해주려고 왔다? 그게 다입니까?”
화월각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보라는 표정이었다.
“그와 더불어… 나도 살길을 마련하려고 왔소이다. 이참에 아예 월영련 쪽으로 가담하겠소. 내 수하들까지 전부 말이오.”
그 말에 화월각주는 조소를 머금었다.
“이봐, 집형당주. 아니지. 이제는 집형당주도 아닐 테니.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나? 더 이상 쓸모도 없는 개새끼를?”
“뭐라?”
별안간 돌변한 화월각주의 태도에 한천자도 점차 안색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화월각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필요했던 건 정천맹의 집형당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한천자라 불리는 무인과 복룡추호대의 정예도 아닌 찌꺼기들이 아니라.”
“네놈이…….”
“살길? 살고 싶었으면 맹주의 발을 핥으며 빌빌 기어서라도 계속 집형당주로 남아 있었어야지. 무턱대고 그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올 게 아니라. 그로 인해 앞으로의 계획이 몇 개나 어긋나게 생겼는지 알기나 하고 살길을 운운해?”
어느새 화월각주의 분노는 한천자의 그것을 단숨에 집어삼키고도 남을 만큼 커져 있었다.
그만큼 앞으로의 계획에 있어서 집형당이 가진 권력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계획대로 한천자가 집형당을 온전히 장악했다면 그걸 기점으로 맹에 남아 있는 천하오주의 인물들을 하나씩 쳐내며 정천맹을 집어삼킬 심산이었다.
그를 위해 당장 선우약가 쪽에 손을 써두지 않았던가.
선우약가를 흔들고 무너트리면서 맹 내부에선 선우약가의 인물인 의당주를 처리하고 그다음은 호천각주와 진천문. 다시 그다음은 당대 최고의 책사라 불리는 총군사까지.
마지막이 독고세가였다.
천하오주 중 세 군데를 무너트리면서 정천맹까지 집어삼킨다면 남아 있는 태산파와 하남장가 정도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터였다.
한데 그 장대한 계획이 시작부터 꼬여버렸다.
고작 한천자 하나 때문에.
아니, 정확히는 한천자 때문이 아니었다.
화월각주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다루의 일 층. 암흑으로 뒤덮인 구석을 노려봤다.
“멍청한 늙은이 새끼야. 꼬리가 붙은 것도 모르고 여기를 직접…….”
그 말에 한천자가 흠칫 놀라며 화월각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런 두 사람의 시선이 뒤엉킨 곳에서, 나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어둠 밖으로 걸어 나왔다.
***
“너는……!”
한천자가 먼저 나를 알아보며 깜짝 놀랐고 화월각주가 뒤따라서 안색을 굳혔다.
“제대로 당했군.”
화월각주의 중얼거림에 한천자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색혼수사가 정보를 털어놨다는 말에 조급해져서 여기까지 달려온 게 도리어 화월각주와 은신처를 노출하게 만든 화근이었음을.
“색혼수사가 모든 걸 털어놨다는 얘긴 거짓이었나?”
자조적인 한천자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아니. 다 털어놓긴 했지. 물론 색혼수사가 아니었어도 네놈의 배신은 전부 알아차린 상태였고.”
“그 말은 맹으로 복귀했을 때 이미?”
복룡각에서 설표와 일조 대원들을 마주했을 땐 그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었다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다들 아닌 척 연기하느라 고생 좀 했을걸?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서 네놈은 전신에 칼침을 맞고 죽었을 테니까. 뭐, 그 덕분에 여기까지 찾아낸 거고.”
그 말을 끝으로 한천자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놈과는 딱히 더 말을 섞을 필요도 없어 보였다. 대신 나는 화월각주라 불리는 중년인을 주시했다.
내 은신을 알아챈 점도 그렇고. 금월보주와 비슷한 지위인 듯 보였는데 실력은 더 윗줄이었다.
풍기는 기세에서도 인극 고수의 면모가 느껴졌다.
더군다나 건물 곳곳에도 그의 수하들이 나를 향해 은은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화월각주라고 했나? 그럼, 여기가 화월각인가?”
“내가 화월각주이긴 하나 화월각은 따로 존재하지 않지. 어디든 내가 있는 곳이 화월각이다.”
기세만큼이나 그는 자부심도 대단해 보였다. 그래 봤자 월영련과 월영련주의 끄나풀인 건 변함없었다.
“당신이 있는 곳이 화월각이라. 그럼 내가 직접 지옥 한 구석에 화월각을 세워주지.”
“하하. 어린놈이 혀가 매섭구나.”
“혀만 매서울까?”
스릉!
덤덤하게 검을 뽑자 날 옥죄던 살기가 더욱 진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뭣들 하느냐?”
한천자의 고함에 건물 주변을 지키고 있던 복룡추호대원들이 헐레벌떡 들이닥쳤다. 이조부터 사조까지의 대원들이었고 그 숫자는 정확히 육십이었다.
뒤따라 화월각주의 수하로 보이는 무인들도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놈들이 더해지니 날 중심으로 대략 백여 명의 무인들이 에워싸고 있는 모양새였다.
한천자와 화월각주는 수하들의 기세를 등에 업은 채 이 층 난간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좀 전까지는 서로 죽일 듯이 다투고 있었으면서도 당장은 의기투합하여 상황을 타개하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여길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네놈이 죽으면 무슨 소용일까?”
한천자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하지만 놈의 입꼬리는 금방 내려갔다.
놈에게 복룡추호대의 이조부터 사조까지의 대원들이 있다면 내 뒤엔.
“그래도 며칠 전까지는 한솥밥을 먹던 사이였는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나타난 고주양을 시작으로 설표와 손유수, 그리고 나머지 일조 대원들이 허공을 격하고 내 주변으로 내려앉았다.
굳이 포위망 안으로 들어올 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얼굴들이었다.
복룡추호대의 정예인 일조와 나머지 조들은 그 정도로 격차가 컸다.
물론 밑바탕엔 이곳에 쇄월청검대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깔려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전투가 시작되면 그들은 바깥쪽에서, 우리는 안쪽에서 양면으로 포위망을 깨부술 계획이었다.
한천자와 화월각주도 이미 우리와 더불어 쇄월청검대의 존재감을 알아차렸는지 잔뜩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부터 흐름은 이미 우리 쪽으로 넘어온 상태.
설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더는 상황을 길게 끌고 갈 필요도 없다. 감히 정천맹을 배신한 죄인과 그 뒤에서 온갖 음모를 꾸며 정천맹을 어지럽힌 악인을 처단해라-!”
채채채채챙!
설표의 명령에 일조 대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중 손유수가 소리쳤다.
“공전사멸진(公戰死滅陣)을 펼쳐라!”
공전사멸진은 최고의 수비진인 삼산수수진과는 정반대의 효과를 보이는 공격 일변도의 검진이었다.
상대와의 실력 차를 앞세워 단숨에 몰아붙이는.
손유수의 외침에 대원들이 순식간에 자리를 잡았다.
전후좌우 사각에 가장 실력이 높은 이들이 서고 나머지가 뒤따르는 모양새였다.
쉬쉬쉭!
설표와 손유수, 그리고 고주양이 각자 좌우와 후방을 점했다. 당연하게도 전방은 나였다.
“물러서지 마라! 머릿수만으로도 이미 우리가 압도하고 있다! 당장 저 새끼들을 처리해라!”
공전사멸진이 펼쳐지자 백여 명의 적들이 주춤거리다가 한천자와 화월각주의 외침에 사방에서 짓쳐 들기 시작했다.
***
촤-악!
“컥!”
푹!
“끅!”
검을 긋고 찔러 넣을 때마다 내 주변으로 시체가 하나둘씩 쌓여갔다.
겉으로 보면 백여 명으로 이루어진 포위망이 스무 명인 우리를 몰아붙이는 형국이었지만, 단말마와 함께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이들은 결국 놈들뿐이었다.
아무리 화월각주의 수하들이 섞여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먼저 나서서 실력 있는 놈들만 골라 처리해 나가고 있었으니까.
나를 제외한 설표와 일조 대원들은 한천자를 뒤따라 맹을 떠난, 이제는 옛 복룡추호대원이 되어버린 놈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전투가 시작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쇄월청검대가 포위망의 후방을 덮쳤다.
독고태문이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검대라고 하더니 그들의 실력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맹주님의 엄명이다! 단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쇄월청검대주로 보이는 장년인의 외침과 함께 인(人)자 대형으로 포위망을 깨부수며 덮쳐오는 그들의 기세가 더해지자 전세는 순식간에 기울었다.
콰쾅!
백 명이 넘어가는 고수들의 충돌로 인해 건물 또한 성치 않았다.
여기저기가 무너져 내리면서 연신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뒤흔들렸다.
전황이 중반에 접어들 무렵에는 아예 건물 자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거, 건물이 무너진다!”
누군가가 소리치자마자 장내의 모든 인원이 하나같이 몸을 날렸다.
적과 아군 구분 없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쿠구구궁!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굉음이 터져 나왔다.
이어 온갖 잔해와 흙먼지로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놈들이 도망치려는 낌새를 보였지만 쇄월청검대주와 설표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앞서 놈들의 경로를 차단했다.
건물이 무너져 내리기 전에 이미 놈들의 숫자를 반으로 줄어놓은 상태여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제기랄…….”
마침내 흙먼지가 걷혔을 때, 한천자가 체념한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쇄월청검대와 복룡추호대가 한천자와 더불어 남아 있는 적들을 촘촘하게 에워싸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중에 화월각주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 틈에…….”
설표가 흠칫 놀라며 화월각주의 기감을 쫓는 사이에 나는 한발 먼저 움직였다.
“제가 쫓겠습니다.”
“하지만…….”
설표가 혼자 보내긴 그렇다는 듯 만류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좀 전까지도 가장 많은 숫자의 적을 처리한 내가 호흡 하나 틀어짐 없이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였을까.
“막내인 네게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게 만드는군.”
설표의 미소에 나도 따라 웃었다.
“원래 막내의 역할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위험한 상황이라고 판단되면 지체 없이 돌아와야 한다.”
“예.”
나는 대답과 함께 화월각주를 쫓아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