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8장 국면(2)
건물이 무너진 틈을 타 도망친 화월각주였지만 나는 줄곧 놈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놈이 몸을 날린 방향으로 괘월선보를 발휘해 빠르게 뒤쫓자 거리가 점차 좁혀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계속 이동하니 어느새 저잣거리를 벗어나 사방이 거목으로 둘러싸인 숲속을 지나치고 있었다.
화월각주는 앞쪽에서 오로지 전방을 향해 내달리는 상태였다.
파바박!
거목과 거목 사이를 박차며 허공으로 치솟아 오른 내 시야에 마침내 화월각주의 뒷모습이 잡혔다.
나는 가시거리에 들어온 놈을 향해 망설임 없이 검기를 쏘아냈다.
슁-!
밤공기를 가르며 쏘아진 검기는 빛살같이 놈을 덮쳤다.
놈은 달리는 자세에서 순간 몸을 휘돌려 검을 휘둘렀고 검기를 와해시키자마자 다시 지면을 박차고 있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시간 정도면 충분했다.
검기를 막아내려고 주춤한 그 틈에 나는 놈을 이미 앞지른 상태였다.
탁.
내가 가볍게 내려서자마자 한참 내달리던 놈이 우뚝 멈춰 섰다. 이어 말없이 나를 응시하다가 옅은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그동안 큰 착각을 하고 있었군.”
“착각?”
“금월보의 계략을 저지한 인물이 줄곧 백의문주였다고 여기고 있었지. 한데 그 중심이 백의문주가 아니라 유씨세가의 소가주인 네놈이었다니.”
“맞네. 착각.”
실상은 백의문주 또한 나라는 거지만 뭐가 됐든 착각은 착각이니까. 짧게 대답하는 사이 화월각주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추적자가 나 이외에 또 있는지 살펴보는 듯싶었다. 나는 덤덤하게 검을 들어 올리며 눈을 빛냈다.
“쫓아온 건 나 혼자니까 살고 싶으면 덤벼.”
“보아하니 그런 것 같군. 네놈을 과소평가한 건 맞지만 네놈도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구나.”
말본새를 보니 내가 혼자라면 충분히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는 듯싶은데.
나는 조소와 함께 내공을 끌어올렸다.
굳이 탐색전이랍시고 초반부터 손속에 여유를 둘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놈의 전신을 통해 풍겨 나오는 기세는 그가 능히 태산검존 곽명, 그 이상의 실력자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
화월각주와 나는 일정 거리를 두고 서로를 응시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하다는 듯 자그마한 빈틈이라도 생기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을 휘두를 기세였다.
그걸 알기에 놈과 나는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구름 하나가 둥그런 달을 집어삼키고 숲속에 어둠이 내려앉은 순간. 나는 일부러 약간의 빈틈을 내보여다.
쉬쉭!
그러자마자 놈의 신형이 형체도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짓쳐들어왔다.
쐐에엑!
동시에 놈의 검 끝이 정확히 내가 내보인 빈틈을 노렸다.
나는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시켜 공격을 피해내면서 회전한 자세 그대로 놈의 등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촤-악!
간신히 피한 듯한 놈의 옷깃이 갈라지며 핏물이 튀어 오르는 게 보였다. 아쉽지만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놈도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내 급소를 노렸다.
쾅!
나는 여유를 가지고 놈의 집요한 공격을 쳐내고, 반격하며 조금씩 기세를 가져왔다.
콰쾅!
이미 처음부터 서로의 검 위로 검강이 피어오른 상태.
공방을 주고받을 때마다 굉음이 터져 나오면서 충돌의 여파로 인해 숲 전체가 뒤흔들렸다.
사방을 넘나드는 움직임 또한 누가 보면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요란한 소리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고 여길 정도로 빨랐다.
그만큼 놈이 익힌 보법은 내가 펼치고 있는 괘월선보에 뒤지지 않았다. 물론 그랬으니 건물이 무너진 틈을 타 몸을 빼낼 수 있었겠지만.
터-엉!
“큭!”
하지만 뒤지지 않는 건 보법뿐.
공방이 길어질수록 점차 놈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서로의 검이 부딪칠 때마다 내 검강은 야금야금 놈의 검강을 갉아먹고 있었다.
내 경지가 놈의 경지를 앞선다는 의미였고 놈도 그걸 알아차렸는지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가다간 당한다.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바로 몸을 빼낼까?
놈의 눈빛에서 의중이 대번에 드러났기에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잡념과 함께 슬슬 놈의 몸 곳곳에서 빈틈이 생겨나고 있었으니까.
그곳을 향해 검을 찔러 넣자.
쉬쉬쉭! 파앗!
“읍!”
놈이 기겁하며 고개를 꺾었다. 반응이 조금만 늦었다면 그대로 내 검에 목덜미가 꿰뚫렸을 텐데.
나는 아쉬워하면서도 계속 몰아붙였다.
이번에는 놈의 두 다리를 노렸다. 보법에 자신이 있어 보이는 만큼 놈의 기동성을 죽여 놓은 뒤 천일백야검법의 초식들로 끝장을 볼 심산이었다.
촤악!
먼저 놈의 오른쪽 허벅지를 베었고.
촤악!
놈이 비틀거리는 사이에 왼쪽 정강이 위로도 검을 그었다.
의도대로 두 다리에 상처를 새겨 넣자 놈이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무슨 보법인진 모르겠지만 날파리 같은 움직임이 좀 성가셔야지.”
“닥쳐라!”
자신이 밀리고 있다는 사실이 분했는지 혹은 자신의 보법을 고작 날파리와 비교한 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놈은 악을 쓰면서 내게 달려들었다.
나로서는 두 다리에 상처를 입고 이성까지 잃은 놈의 움직임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놈의 공세를 유유히 피해내다가 놈의 동작이 커졌다 싶은 순간 나는 단번에 내공을 끌어올렸다.
제육초식 천신참망(天神慘亡).
내 검 끝에서 검강의 소용돌이가 피어올랐다.
쉼 없이 발출시킨 검강이 서로 뒤엉키면서 그로 인해 발생되는 충돌의 여파로 위력이 연신 곱절로 늘어난다.
그러한 검강의 태풍 속에 적을 가두는 초식이 천신참망이었다. 초식이 빗나가지만 않는다면 웬만한 적은 그 안에서 몸이 갈가리 찢겨 나갈 것이다.
두 다리에 상처를 입은 화월각주로서는 피하지 못할 초식이기도 했다.
“이, 이런!”
놈도 자신의 끝을 예견했는지 눈을 치뜨며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놈의 그 어떤 공격도 검강의 소용돌이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마침내 놈이 소용돌이 안으로 집어삼켜지려던 그 순간이었다.
번쩍!
하는 섬광이 숲을 가로질렀다.
***
팟!
순간 내 오른팔 위로 핏물이 튀어 올랐다.
초식을 펼치다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껴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는데도 기습을 제대로 피해내지 못한 것이다.
나는 오른팔 위에 새겨진 상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화월각주 앞을 가로막은 채 서 있었다. 그는 천신참망의 초식이 만들어 낸 검강의 소용돌이를 향해 일검을 내리그었고.
쩍! 콰콰쾅!
그 일검에 소용돌이 자체가 반으로 갈라졌다가 사방으로 폭사했다.
공격을 막아낸 그 또한 몸 곳곳이 갈라지며 상처를 입었지만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일검으로 천신참망의 초식을 파훼하다니. 그것도 정면으로 맞서서 여러 개의 상처를 입은 게 다였다.
그런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대단한 초식이군.”
덤덤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범상치 않았다. 단순히 검을 쥔 채 서 있을 뿐인데도 주변 공기가 극도로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 정도라면 평범한 이들은 그를 마주했다가 숨도 쉬지 못하고 무릎을 꿇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전생에도 이러한 기세를 내뿜는 인물을 만나본 건 딱 두 번이었다.
검신 영감과 천마.
그 두 사람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세라면…….
“당신이 월영련주인가?”
내 물음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속으로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월영련주가 이곳에 나타난 부분도 놀랍긴 하지만 그의 겉모습이 내 예상과 달리 썩 젊었기 때문이다.
높게 쳐줘도 사십 대의 얼굴을 하고 있는 그였다.
괘월선보를 창안한 고인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라면 적어도 백발 성성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괘월선보를 통한 이형환위를 펼쳐 월영련주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역시나 그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며 물어왔다.
“그 보법은 그리 낯설지 않은데.”
괘월선보를 알아봤다는 건 내 예상이 그리 틀리지만은 않다는 거였다.
“조금 전의 초식도 그렇고. 흥미로운 아이로구나. 유씨세가의 유진휘라고 했던가?”
“통성명은 이쯤하고. 당신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지?”
“질문이 좀 괴상하구나. 하지만 요지는 알겠다. 본좌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차린 모양이로군.”
“대답은?”
“굳이 대답해야 하나?”
월영련주가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확실히 그 보법은 오래전에 본좌를 상대하다가 도망쳤던 쾌선(快仙)의 그것과 유사해.”
쾌선.
괘월선보를 창안한 고인의 별호가 쾌선이었구나 싶었다. 더불어 월영련주가 정말로 그 시대부터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게 진실임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아무리 무공의 경지가 높다고 한들 세월의 벽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법이었다.
“궁금한 게 많은가 보군. 그건 본좌도 마찬가지지. 해서 네게 제안을 하나 하마.”
“제안?”
“월영련과 함께하지 않겠나? 나이에 걸맞지 않은 무위와 번번이 본련의 대계를 저지하는 지모까지. 썩 탐나는 재목이더군.”
“그런 시답잖은 제안을 하려고 여기까지 직접 행차하셨다?”
“그럴 리가. 지금은 그저 이놈을 데리러 가기 위해 서둘러 와봤을 뿐이다. 더불어 장애물까지 치워버릴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했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화월각주. 그런 놈을 슬쩍 쳐다본 그가 말을 이었다. 장애물은 아마도 나를 뜻하는 거겠지.
“치워버릴 생각으로 왔는데 직접 보니 죽이긴 아까워서 말이야. 어떤가?”
“죽여? 나를?”
제안 따위야 당연히 거절이었고 나는 여전히 긴장한 채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기세가 대단하다는 건 인정한다. 전생의 무공을 회복하지 못한 나라면 그의 말대로 아마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여기가 내 묫자리라면 당신 비석도 내 옆에 함께 세워주지.”
“흠.”
월영련주가 짧은 탄식과 함께 나를 위아래로 흘겼다. 내 진심을 알아차렸는지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비석까지는 아니어도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이려면 팔 한 짝 정도는 내놔야 할 것 같긴 하구나.”
“그 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나? 팔 한 짝이 될지 머리통이 될지 한번 해보자고.”
“하하.”
내 말에 월영련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쉽지만 오늘은 서로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어떻겠나? 네가 본좌의 제안을 거절한 만큼 나중에 다시 맞붙을 기회가 있겠지. 지금은 서로에게 우선시 되는 걸 처리해야 할 시기 같은데.”
“무슨 뜻이지?”
“본좌에겐 아직 네놈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인물이 있다는 뜻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그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으니까.
“그래. 맞다. 검신 백도천.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건지 도무지 찾을 길이 없더구나.”
“이 미친놈이…….”
“침착하거라. 네게도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더냐? 고작 집형당주 하나 처리했다고 해서 정천맹이나 다른 천하오주가 무사할까?”
그의 말에 나는 검을 휘두르려다 말고 멈칫했다.
“본좌가 서로 물러나자고 했으니 기꺼이 한 가지를 알려주마. 네놈 덕분에 정천맹을 장악하지는 못하게 됐어도 아직 포기하지는 않았다. 대신 정천맹이 뒷전으로 밀려난 만큼 이다음은 천하오주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본좌를 포함해 본련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포기라는 걸 모르는 족속들이라.”
“…….”
월영련주의 장담대로 집형당주를 쳐냈다고 해서 물러설 놈들이 아니었다.
동시에 오늘은 예외적으로 화월각주를 구해내기 위해 그가 직접 나섰다고 하지만 이후에 그는 검신 영감을 처리하기 전까진 전면에 나서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월영련주라도 검신 영감을 상대하려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고 몸 상태를 최고조로 끌어올려야 할 테니.
그걸 위해 지금도 서로 물러나자는 제안을 해 온 것이다.
“당신은 검신을. 나는 당신의 수하들인 월영련을 먼저 상대하자?”
“그렇다. 물론 거절한다면…….”
순간 월영련주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당분간 검신을 처리하는 걸 포기하게 되더라도 네놈을 이 자리에서 확실히 죽여주마.”
그의 살기가 순식간에 나를 옭아맸다. 그렇다고 해서 움츠러들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살기를 밀어내면서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옳은 판단이다.”
“내게는 옳은 판단이지만 당신한텐 아니야. 월영련 놈들을 처리하고 곧장 당신을 찾아갈 테니까.”
“기대하마.”
그는 대답과 함께 쓰러져 있는 화월각주를 둘러업고 순식간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