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8장 국면(3)
“진휘야!”
월영련주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주양을 위시한 일조 대원들 몇 명이 내 옆으로 날아들었다.
한천자와 그 무리를 제압한 뒤 일부 인원만 나를 지원하기 위해 곧장 달려온 듯 보였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그들을 돌아봤다.
“화월각주는 놓쳤습니다.”
내 말에 고주양은 이해한다는 듯 주변을 둘러봤다. 전투의 여파로 초토화가 되어 있는 현장이었다.
“화월각주라는 놈이 이 정도로 강했다고?”
질문하는 그의 표정에서 놀람과 의아함이 묻어나왔다. 슬쩍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펼쳤던 초식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유추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만큼 제육초식인 천신참망은 지금의 내가 펼쳐 보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초식이었다.
물론 화월각주를 제압할 만큼의 수준으로 내력을 조절하긴 했어도 그렇게 간단히 파훼될 정도는 아니었다.
“화월각주의 실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화월각주를 빼내고자 월영련주가 직접 나섰습니다.”
“……!”
월영련주라는 말에 고주양과 일조 대원들이 흠칫 놀랐다. 배후세력의 수장이 정천맹이 있는 하남까지 발을 들였다니.
“화월각주라는 놈이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라는 방증이겠지?”
“화월각주를 앞세워 다른 천하오주까지 노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월영련주 본인이 직접 그렇게 얘기하기도 했고요. 정천맹의 장악은 실패했어도 여전히 천하오주를 노릴 거라고.”
“그 미친놈이 대놓고 그렇게 얘기했다고?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건가?”
내가 대답 대신 가만히 입을 다물자 고주양은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갔다.
“진휘야. 너와 함께하게 된 시간이 오래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네가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그 말에 나는 반쯤 땀에 젖어 있는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고주양의 말마따나 월영련주가 떠나고 난 지금까지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었다.
“예. 아직도 긴장이 풀리지 않습니다. 만일 그자와 맞붙었다면 지금 저는 여기에 서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월영련주에게는 나를 죽이려면 그 또한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기세를 내보였었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오늘 그와 싸우게 됐다면…….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자 고주양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말했지? 너는 천재라고. 네 재능이면 순식간에 놈을 앞지를 만한 실력을 기를 수 있을 거다. 머지않아 월영련주 정도는 손쉽게 때려눕히게 될 거야.”
고주양의 위로에 나는 피식 웃었다.
“물론이죠. 놈은 제가 죽입니다. 반드시.”
실력을 기르는 게 아니라 전생의 경지를 되찾는 거겠지만 뭐가 됐든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그래. 지금은 그거면 됐다. 이만 돌아가자. 대주님은 집형당주를 이끌고 먼저 맹으로 복귀하셨다.”
고주양은 미소와 함께 일조 대원들을 이끌고 맹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나 또한 그들을 뒤따르면서 결의를 다졌다.
하루라도 빨리 전생의 무공을 회복하고 나아가 과거의 경지까지 뛰어넘어보겠다고.
동시에 검신 영감의 얼굴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은퇴한 이후 속세를 떠났음에도 그는 여전히 존재감만으로 월영련주를 구속하고 있었다.
천하를 노리는 월영련 입장에선 검신 영감을 무시할 수 없었을 테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검신 영감을 향해 나는 속으로나마 진심 어린 한마디를 건넸다.
***
“크윽.”
화월각주가 신음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인상을 찌푸리며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이내 눈앞에 서 있는 인영을 발견하곤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려, 련주님!”
월영련주의 존재를 알아차린 그는 즉각 자세를 바로잡았다. 부복한 자세 그대로 련주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침묵은 한참이나 이어졌고 마침내 월영련주가 입을 열었다.
“계획이 또다시 실패했구나.”
“면목이 없습니다.”
태산파를 노렸던 금월보주의 실패를 비웃은 자신이었다.
한데 그런 자신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죽여주십시오.”
화월각주는 바닥에 이마를 처박으며 진심으로 호소했다. 목숨으로 실패를 책임질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놓겠다는 분위기였다.
“널 죽여야 했다면 본좌가 이곳까지 직접 나선 보람이 없지 않느냐?”
“…….”
화월각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의 불찰로 련주까지 나서게 한 상황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마음은 곧 한천자를 향한 분노로 이어졌다.
“한천자 그 멍청한 늙은이 새끼 때문에…….”
“정녕 그렇게 생각하느냐?”
“예?”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어야 그다음이 있을 터인데.”
월영련주의 책망에 한천자는 다시금 이마를 처박았다.
“감히 련주님 앞에서 실언했습니다. 방금 한 말은 잊어주십시오.”
“깨달았으면 되었다.”
“계획이 실패한 원인은 분명 유씨세가의 유진휘. 그놈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제 탓입니다.”
“확실히 나이에 걸맞지 않은 뛰어난 아이더군.”
“혹시 련주님께서 그놈을…….”
“죽이지 못했다. 아쉬울 따름이야. 놈을 죽이려면 본좌 또한 어느 정도 각오를 해야 할 수준이었다. 그러기엔 검신의 존재가 마음에 걸려 섣불리 손을 쓸 수가 없었고.”
월영련주의 말에 화월각주는 눈을 치떴다. 유진휘라는 놈의 실력이 그 정도였나 싶은 눈치였다.
물론 자신은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했지만, 련주라면 손쉽게 놈을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여겼거늘.
“그만큼 놈을 주의해야 한다는 뜻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예. 정천맹 쪽은 실패했지만, 다음은 반드시… 유진휘 그놈 또한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련주님께서 더 이상 신경 쓰시지 않게끔.”
화월각주는 련주로 인해 연명한 제 목숨을 걸고 다음 계획은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필요하다면 수월림주(水月林主)와 함께 움직이거라.”
“수월림주라면 현재 검신의 행적을 조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조만간 찾아낼 수 있을 거라 장담하더군. 정확한 위치까지는 필요 없으니 조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순간 네게 합류시켜 주마.”
“예.”
화월각주가 대답과 함께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비록 이번 계획은 실패했으나 련주가 있는 이상 월영련의 대계는 반드시 성공할 수밖에 없다는 자신감이 내비치는 웃음이었다.
***
“오늘부로 집형당주 도경수의 직위를 박탈한다. 감히 맹을 배신하고 맹의 무사들을 해하려 했던 죄인을 수천뇌옥에 가둬라.”
맹주인 독고태문의 명령과 함께 한천자의 운명이 결정지어졌다.
수천뇌옥을 관리하던 집형당주가 단전이 부서진 채 도리어 수천뇌옥에 갇히게 됐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맹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그간 한천자를 필두로 맹주와 천하오주의 인물들을 견제하던 장로들은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독고태문은 맹의 인사들에게 월영련의 존재를 공표하고 나섰다.
“정천맹을, 나아가 강호를 노리는 세력이 나타났소. 월영련. 놈들은 결코 마교에 뒤지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지. 집형당주의 배신도 놈들이 주도한 것이오.”
모든 장로 앞에서 색혼수사의 증언과 한천자의 집무실을 뒤져 발견한 증거들까지 내놓았다.
덕분에 장로들은 한껏 긴장했고 동시에 입을 맞춰 독고태문을 찬양했다.
“집형당주 그놈이 감히……. 맹주님께서 친히 암중 세력의 존재와 집형당주의 배신을 밝혀내 주신 것에 대해 저희는 그저 감복할 따름입니다.”
“맞습니다. 맹주님이 아니었다면 정마대전 이후 평화를 되찾은 강호가 또다시 혼란에 휩싸일 뻔했습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지요. 맹주님의 의지를 이어받아 저희 또한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하고 빠르게 월영련이라는 세력을 처단해야 합니다.”
“옳소. 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천하를 운운한단 말이오.”
서로 앞다투어 결의를 다투는 상황이어서 독고태문과 총군사인 묵가후는 속으로 조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 중엔 분명 집형당주를 따라 월영련에 가담한 배신자도 있을 터였다. 배신자가 아니어도 지금껏 독고태문을 못마땅해하던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하나 이번 일로 인해 독고태문의 입지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월영련이라는 세력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계시는 걸로 충분하오. 놈들을 처단하는 건 제대로 조사가 이루어지고 난 뒤. 그때까진 이 사실이 맹 밖으로 퍼져나가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예.”
맹주의 경고에 장로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독고태문과 묵가후는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나직이 미소 지었다.
***
며칠 뒤에 나는 독고태문과 묵가후와 마주 앉아 있었다. 지난번과 똑같은 장소인 호정 내부.
맹주를 위한 안식처인 만큼 이곳엔 우리 셋뿐이었다.
“네 덕분에 일이 아주 잘 풀렸다. 맹주님의 입지가 굳건해졌으니 맹 내부에선 당분간 잡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야.”
묵가후의 표정은 확실히 전보다 밝아져 있었다. 옆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는 독고태문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겸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뿐만 아니라 복룡추호대와 쇄월청검대가 함께해 준 덕분입니다.”
“하하. 지금은 겸손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 않습니까, 맹주님?”
묵가후의 말을 건네받은 독고태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 아이가 아니었다면 집형당주 그놈을 쳐낼 수 없었을 테니.”
이어 내 공로를 치켜세우던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을 빛냈다.
“공을 세웠으니 그에 마땅한 상을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총군사도 그렇게 생각하나?”
미리 준비한 대사를 읊조리듯 자연스럽게 이어진 대화 뒤로 목함 하나가 딸려 나왔다.
“이건?”
내가 목함과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자 독고태문이 씩 웃었다.
“무인에게 있어서 최고의 상이 뭐겠나? 무공은 옛 천영검대주의 검법을 익혀 부족함이 없을 테니. 우리가 내어줄 수 있는 건 영약뿐이구나.”
영약이란 말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맹주가 친히 내어주는 영약인 만큼 평범한 영약은 아닐 테니까.
목함을 조심스레 열자마자 영험한 기운이 퍼져 나와 주변을 뒤덮기 시작했다.
“만년금룡과(萬年金龍果)라 불리는 영약이네. 의당주께서 지니고 계시던 영약인데, 자네에게 내어주면 어떻겠냐고 먼저 제안하시더군.”
묵가후의 설명이 이어졌지만 나는 그 설명을 한 귀로 흘릴 수밖에 없었다.
금빛 색을 띤 열매가 뿜어내는 영기에 취해 있던 탓이다.
단전이 꿈틀거리며 어서 영약을 집어삼키라고 조르고 있었다.
나는 근질거리는 유혹을 떨쳐낸 다음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목함을 닫았고 덤덤히 품속으로 챙겨 넣었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실력만큼이나 성격도 시원시원하구나.”
거리낌 없는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독고태문도 마주 웃음을 터뜨렸다.
나로서는 당연했다. 만년금룡과같은 수준의 영약을 앞에 두고 망설일 리가.
내공이 늘어날수록 영약으로 취할 수 있는 내공은 그에 비례해 줄어드는데 만년금룡과 같은 최상품의 영약은 그 반작용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현재 내 내공은 이 갑자. 거기에 만년금룡과가 더해진다면 전생의 무공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독고태문의 말대로 내게는 최고의 상이나 다름없었다.
월영련주와 직접 마주친 이후 깨달았으니까. 월영련을 뒤쫓기 전에 먼저 내 무공을 제대로 되찾아야 한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