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1장 단련(1)
지극(地極).
현 강호에서 지극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여겨지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당장 생각나는 건 천하십대고수 중 하나인 동악검선. 그리고 역시나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인, 내 앞에 묵가후와 함께 앉아 있는 정천맹주 독고태문.
두 사람과 함께 다시 천하십대고수의 상위 몇 명이 지극의 경지에 도달했을 테고, 하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들은 여전히 인극의 끝자락에서 길을 헤매고 있을 터였다.
지금의 내 경지가 아마 그 정도이지 않을까 싶었다. 정확히 비교하자면 천하십대고수의 말석쯤?
다만 전생의 경험과 깨달음이 심중에 녹아 있기에 지극 고수들과 겨뤄도 쉽게 밀리지 않는 상태. 물론 인극의 경지에 머물러 있는 상태로는 승리 또한 장담할 수 없다.
그 상대가 검신 영감이나 월영련주라고 가정한다면 더더욱.
두 사람의 무위는 천하십대고수의 윗줄이라고 봐야 했으니까. 같은 지극 고수라도 두 사람과 나머지는 격이 달랐다.
동악검선이나 독고태문이 지극의 초입에 머물러 있다면 두 사람은 초입을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개척해 그다음 경지로 나아가기 위한 대비를 하는 중일 테니.
전생의 내 경지가 그런 두 사람과 같은 수준이었다.
해서 지금 당장은 전생의 무공을 회복하는 데 집중해야 할 순간이라고 여겼다.
얼마나 걸릴진 모르겠으나 만년금룡과가 있으니 시간이 크게 단축될 건 분명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어느샌가 묵가후와 독고태문의 분위기가 진중해졌다.
한천자를 쳐내는 걸로 일이 잘 마무리된 만큼 이제는 다시 앞으로의 일을 논의할 때라는 표정이었다.
그중 독고태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비를 위해서라도 먼저 월영련주에 대한 얘길 들어봐야겠다.”
두 사람은 이미 내가 직접 월영련주와 마주쳤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뒤였다.
그런 두 사람에게 그때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놈들은 계속해서 천하오주를 노릴 거라는 사실과 월영련주가 검신 백도천의 행적을 뒤쫓고 있다는 정보를 강조하면서.
“그놈이 전대 맹주님을…….”
묵가후가 침음을 흘리는 사이 독고태문이 내게 물었다.
“그자의 무위가 어느 정도던가? 알아볼 수 있었나?”
“예. 제가 봤을 때, 그자는 적어도 전대 맹주님과 동수를 이룰 정도였습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에 두 사람은 안색이 딱딱해졌다.
천마와 천영검대주의 죽음 이후 다시금 현 강호의 천하제일인은 검신이라 평가받고 있는 상황에서 동수라니.
두 사람의 얼굴 위로 그런 심정이 대번에 드러났다. 나는 계속 말했다.
“물론 월영련주가 수작이라도 부리지 않는 이상 전대 맹주님도 쉽게 당하실 분은 아니시죠. 그분의 행적을 쉽사리 찾을 수도 없을 테고요.”
맹주직에서 물러난 이후 속세를 벗어난 검신 영감의 행방은 정천맹의 인물들도 모른다고 들었다.
게다가 그는 특정한 문파나 가문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름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일인전승문의 계승자여서 강호에 나선 이후 곧장 입맹한 뒤 맹주의 자리까지 올라 제자조차 거둘 여유가 없었다고 들었다.
‘너라면 내 제자가 되기엔 자격이 충분한데 말이다. 너 같은 녀석이 또 어디 없을까?’
전생에 이따금 아쉬움을 토로하던 말도 기억이 났다.
나이가 있는 만큼 지금은 혹시나 제자를 거뒀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라면 그저 심산유곡에 틀어박혀 검이나 수련하며 지내고 있겠지.
“그렇다고 해도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 우리도 전대 맹주님의 행적을 찾는 게 맞다, 총군사.”
“예, 맹주님.”
“당장 비선당을 이용해 전대 맹주님의 행적을 찾아보도록.”
“예. 놈들보다 저희가 먼저 전대 맹주님을 찾아뵐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비선당은 총군사 직할의 정보 세력. 그들이라면 충분히 검신 영감의 행적을 좇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비선당을 이용해 월영련의 다음 계략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대비하라는 명령이 이어졌다.
“일찍이 손을 뻗었다가 장악에 실패한 태산파나 정천맹의 영역 안에 있는 하남장가는 표적이 아닐 겁니다.”
두 곳을 제외하면 남은 건 선우약가와 진천문. 그리고 독고세가. 그 셋 중 하나라고 여기고 있는 묵가후였다.
그리고 묵가후는 한발 더 나아가서 놈들의 계략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까지 예측하고 나섰다.
“놈들이 천상비고에서 빼내 간 묵룡일원공. 태산파에서 벌인 짓을 고려해 봤을 때 이번에도 마교의 비급을 이용해 무슨 수작을 벌이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조만간 천영검대가 소식을 전해 올 테니 묵룡일원공에 대해선 그때 가서 다시 논의하세.”
“예.”
일찍이 천영검대에게 놈들이 빼내 간 묵룡일원공을 회수하라는 명령을 내려두었던 독고태문이었다.
묵가후의 예측이 틀리지 않다면 천영검대가 임무에 성공하는 것만으로도 놈들의 계략을 저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후로도 논의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이때부터 나는 두 사람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게 전부였다.
월영련에 관한 대화가 끝나갈 때쯤.
“집형당도 문제군.”
주제가 복룡추호대와 집형당으로 바뀌었다.
한천자가 직위를 박탈당하면서 당주의 자리가 공석이 됐고 네 개의 조로 이루어져 있던 복룡추호대도 지금은 일조만이 남아 있었다.
“설 대주를 당주의 자리에 앉히는 건 어떻겠나?”
독고태문의 제안에 묵가후는 조심스레 고개를 저었다.
설표가 물론 뛰어난 무인인 건 맞으나 아직 정천맹의 장로라는 직위를 맡기엔 부족하다는 반론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당주가 되면 다시 대주의 자리가 빈다.
설표만큼이나 대주라는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도 없었다.
“마땅한 인물이 또 없는가?”
“고민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무엇보다 저희가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천자 같은 배신자가 아니라 의당주나 호천각주처럼 맹주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인물.
가만히 얘기를 듣고만 있던 내가 눈을 빛냈다.
“태산검존 곽 대협은 어떻습니까?”
***
태산검존 곽명.
동악검선의 뒤를 이어 태산제일검의 자리를 물려받을 고수라 칭송받는 인물이자 태산파에서도 곽자배로서 장로의 한자리를 꿰차고 있는 그였다.
물론 검에 미쳐 살아가는 자라 태산검귀라고 불리고 있기도 하지만.
“태산검존이라면…….”
묵가후가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신중하게 고심하던 그는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로선 그가 집형당주의 자리를 맡아준다면 더할 나위 없으나, 과연 그가 순순히 입맹을 결심해 줄지가 의문이네.”
“동악검선 어르신께 먼저 얘기를 전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태산파의 장문인께?”
“예. 어르신이라면 분명 긍정적으로 바라봐주실 겁니다.”
내 생각엔 긍정적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발 벗고 나서서 곽명을 설득해 줄 것 같았다.
더군다나 금월보와의 사건 이후 곽명 또한 월영련에 대한 분노를 키워가는 중이었으니 굳이 거절하진 않을 거란 판단이 섰다.
“확실히 태산파의 인물이, 그것도 태산검존이 직접 입맹해 준다면 큰 힘이 되겠지. 동악검선에겐 내가 직접 의견을 전달해 보겠다.”
독고태문도 내 제안이 흡족했는지 찬성하고 나섰다.
그렇게 집형당주의 후보로 곽명이 낙점됐고 남은 건 복룡추호대의 재건이었다.
이십 명이 전부인 일조 대원들만으로는 집형당과 복룡추호대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할 게 분명했으니까.
“복룡추호대의 일은 그래도 설 대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옳다고 판단됩니다.”
묵가후의 말에 독고태문은 곧장 설표를 불러들였다.
맹주의 부름을 받은 설표는 일각도 채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맹주전도 아니고 표면적으로 맹주에게만 허락된 공간인 호정에 발을 들여서인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맹주님과 총군사님을 뵙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 그가 내 옆에 자리했다.
간단한 인사치레가 오고 간 후 독고태문은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복룡추호대의 인원을 새로 채워 넣어야 하는데 눈여겨본 이들이라도 좀 있는가?”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에 대해 많은 고민이 있습니다.”
한천자 덕분에 몇 명도 아니고 육십이라는 인원이 일거에 빠져나간 덕분에 설표로서도 난처한 상황인 듯 보였다.
더군다나 집형당과 복룡추호대는 정천맹 입장에서도 가장 중요한 세력 중 하나였다.
월영련이 한천자를 회유해 집형당의 권력을 움켜쥐어 정천맹을 장악하려 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 만큼 복룡추호대원들 또한 곽명처럼 신뢰할 수 있는 인물들을 중용해야 했는데.
이번에도 나는 슬쩍 의견을 제시했다.
“자호단과 각 무력 집단으로 흩어진 옛 천영검대원들도 한번 고려해 보시죠.”
내 기준에서는 녀석들만큼이나 믿음직한 이들이 없었다.
“그들은…….”
다만 독고태문은 알게 모르게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맹주로 취임한 이후 천영검대를 자기 인물들로 대거 교체한 전적이 있기 때문인가.
“일전에 맹시에 지원했을 때 그들 중 한 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노호산이라는 이름의 자호단원이셨는데.”
말을 하면서 나는 녀석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천영검대든 자호단이든 정천맹과 강호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건 매한가지. 지위나 신분은 뭐가 됐든 상관없소.’
녀석의 말을 빌려 옛 천영검대원들의 결의가 어떤지를 대변해 주었다. 정천맹과 강호를 위해서라면 어느 지위에서든 최선을 다할 녀석들이라고.
“괜히 천영검대였던 이들이 아니로군.”
독고태문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우는 대신 옛 천영검대였던 이들에 대한 존중을 내비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
독고태문과 묵가후를 중심으로 나눈 논의들은 즉각 의당주와 호천당주에게도 전해졌다. 천하오주의 인물들인 그들과 하나로 뭉쳐 앞으로의 일을 대비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날 이후부터 설표는 곧장 노호산을 비롯해 옛 천영검대원들을 일일이 찾아가 복룡추호대로의 입대를 권유했다.
전대 맹주인 검신과 함께하며 정마대전을 승리로 이끈 공신들인 만큼 설표는 적극적이었다.
그들이 각자 제 할 일을 이어가는 사이에 나 또한 내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만년금룡과의 복용.
인극을 넘어 지극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련.
전생에 한 번 걸어봤던 길일지라도 지극이란 경지는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만년금룡과 덕분에 내공은 전생의 수준과 같은 이 갑자 반을 넘어섰다.’
복룡각에 틀어박혀 며칠간 운기에 집중한 덕분에 만년금룡과의 내력은 온전히 흡수했다.
그런 만큼 내공은 충분했다.
문제는 내 신체가 지극의 경지에 도달할 정도로 단련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환생한 이후 줄곧 신체 단련에 많은 노력을 쏟아붓긴 했지만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단련으로만 메꿀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었다.
생사가 오고 가는 숱한 전투를 수없이 겪으며 자연스럽게 발전할 수 있었던 전생과는 다르게 현재의 몸은 그저 반복적인 수련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몸에 불과했다.
실전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전생의 경험을 통해 정신은 아득히 먼 경지에 도달해 있으나 신체는 그 수준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불균형한 상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선 역시나…….
나는 검을 손에 쥔 채 숙소를 벗어나며 눈을 빛냈다.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게 무인들인 정천맹이었다.
그중 가장 먼저 가까운 이들을 찾았다.
“네 수련을 도와달라고? 당연히 도와줘야지.”
고주양은 도움을 요청하는 말에 즉각 수락했다.
“어떤 수련인데? 뭘 도와주면 돼?”
“전력으로 저와 싸워주시면 됩니다. 부조장뿐만 아니라 조원들 모두에게 부탁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죠?”
순간 고주양이 침을 꿀꺽 삼키는 게 보였다.
“…너랑 싸우라고? 전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