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1장 단련(3)
정천맹. 혹은 맹이 아니어도 정파 세력을 위해 크게 공헌한 이후 은퇴한 원로들이 모여든 게 원로원이었다.
맹은 원로원에 속한 인물들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제공했다. 반평생이 넘는 삶을 바쳐 이바지한 이들을 위한 당연한 대우였다.
반대로 원로원 또한 맹이 필요로 할 때 직접 나서서 여러 가지 도움을 줬다.
그게 원로원의 역할이었지만 전생에 느꼈던 내 감상은 그저 뒷방 늙은이들이라는 게 다였다.
그래도 정마대전이 벌어졌을 땐 몇몇 인물들이 검신 영감을 위해 참전을 결심했었다고 들었다.
그중에는 검신 영감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도 있다고 했었는데.
무공이 강해서인지 단순히 전대를 향한 예우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어르신들을 찾아뵙는 건 나로서도 오랜만이로군.”
독고태문이 원로원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묵묵히 그를 뒤따랐다.
맹주전을 벗어나 성처럼 넓은 정천맹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출입이 금기시되는 구역이 나왔다.
좌측으로 향하면 당장은 폐쇄된 천상비고였고 우측으로 향하면 원로원이었다.
나로서도 우측 길로 접어든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곳은 마치 정천맹과 따로 분리된 공간처럼 보였다. 계속 걸어갈수록 안개가 짙어졌고 안개 너머로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있었다.
들판 위로 듬성듬성 건물들이 세워진 상태였는데 하나하나가 원로들이 기거하는 거처인 듯싶었다.
나는 독고태문을 따라 계속 걸어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인기척도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노고수. 노고수 중에서도 괴물들이 모여 있는 게 원로원이라더니.
‘정마대전이 벌어졌을 때 일부가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나섰다면 종전의 시기가 앞당겨졌을 텐데.’
그런 확신이 들 정도로 원로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그들을 탓하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은퇴한 이후 원로원에 속하게 된 이들이니 참전의 결심은 순전히 그들 몫이었다.
다만 느껴지는 기세를 통해 조금씩 몸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런 실력의 고수들과 만족할 만큼 비무를 벌일 수 있다면 수련에 큰 도움이 될 게 자명했으니까.
그때 독고태문이 멈춰 섰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원로원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건물 앞이었다.
“원로원의 가장 큰 어른이 기거하고 계신 곳이다.”
“원로원주는 어떤 분이십니까?”
“원주께서는…….”
독고태문의 대답이 이어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이로구나.”
건물 안쪽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월의 깊이와 농후한 내공이 실린 만큼 무게감이 느껴졌다.
“일단 들어가자.”
“예.”
***
건물 안은 단출했다.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가구들을 제외하면 텅 비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목소리의 주인인 백발성성한 노인은 창가 쪽 탁자에 앉아 서책 한 권을 손에 쥐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오자 탁, 책이 접히는 소리와 함께 노인의 시선이 쏘아졌다.
“취임식 이후로 처음인가?”
“그렇습니다.”
독고태문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두 손을 모은 채 대답했다.
현 강호의 정점 중 하나인 그가 저자세를 취하니 나로서도 덤덤히 예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유씨세가의 소가주이자 복룡추호대원 중 하나인 유진휘가 원로원주를 뵙습니다.”
내가 인사하자 노인의 눈동자가 나를 위아래로 살폈다. 이어 그의 두 눈에서 옅은 안광이 터져 나왔다.
“범상치 않은 놈이로고.”
내가 딱히 기도를 숨기지 않고 있었기에 그는 내 실력을 어느 정도나마 알아차린 상태였다.
옆에 서 있던 독고태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연했다.
“전 천영검대주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기억하고말고. 전대 맹주가 그토록 아끼던 아이였지 않은가? 게다가 단신으로 천마를 쓰러트렸던 이를 어찌 잊을 수 있겠나?”
“이 아이가 그의 무공을 이어받은 아이입니다.”
“허. 제자가 있었다?”
“제자라고 할 정도의 가르침까진 받지 못한 듯하지만, 유지를 이은 건 확실합니다.”
“그렇구나. 그 또한 천마와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가 깊어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감고 말았으니. 그렇다는 건 정마대전을 치르는 와중에 틈틈이 무공을 가르쳤나 보군.”
“이 아이는 과거 소룡단에 속해 있던 아이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에 전 천영검대주를 만나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소룡단의 이름이 나오자 노인은 나직이 감탄했다.
“강호를 구한 영웅들의 운명이 서로를 끌어당긴 게로구나.”
노인의 반응은 동악검선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소룡단과 옛 천영검대는 정마대전의 승리에 기여한 일등 공신들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환생에 대한 사정을 털어놓을 수 없는 나로서는 천일백야검법을 익히고 있는 부분에 대한 적절한 변명거리였다.
앞으로도 끝까지 옛 천영검대주의 후계자 역할을 이어 나가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아이의 실력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인데?”
노인의 물음에 독고태문은 미소를 머금었다.
“벌써 다음을 노리고 있다고 합니다.”
“아니. 저 나이에 벌써?”
“그 수련을 위해 이곳에 데려온 겁니다. 재능이 범상치 않지만, 아직 어린 나이인 탓에 실전 경험이 부족한 듯싶습니다. 본인도 그걸 깨달아 최근에 맹의 무인들을 두들겨 패고 다니다가 의당주의 원성을 산 상황입니다.”
두들겨 패고 다녔다니. 아니라곤 할 수 없었기에 나는 계속 듣고만 있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네. 그 아이의 전력을 상대해 줄 이들이 필요했던 게로군. 맹의 무인들로는 성에 차지 않았을 테니 말이야.”
대답과 함께 원로원주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유진휘라고 했지?”
“예.”
“원로원에 틀어박혀 지내는 우리로서는 이런 흥미로운 일을 적당히 넘어가지 못할 게다. 각오는 되어 있느냐?”
“그걸 바라던 상황입니다. 각오는 물론 되어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염려되는 부분이 있어서…….”
“어떤 부분이? 가감 없이 말해보거라.”
“자칫 원로원의 어르신들이 크게 다치는 상황이 올 수도 있기에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씩 웃자 원로원주가 대소를 터뜨렸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무형의 기운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쿠궁!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이 진동할 정도였다.
도발이 제대로 먹혀들었나.
상대가 누구든 간에 내가 원하는 건 생사를 오고 갈 정도로 치열한 비무였다.
여기에 있는 노고수들이 본 실력을 내보여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라 슬쩍 떠봤을 뿐인데 원로원주는 웃는 얼굴과 다르게 옅은 살기까지 풍겨내고 있었다.
“원주님, 잠시 진정하심이…….”
독고태문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스러워할 정도여서 나는 만족했다.
확신도 들었다.
원로원의 노고수들을 통해 충분히 전생의 무공을 회복할 수 있겠다고.
***
같은 시각.
묵룡일원공의 비급을 회수하기 위해 맹을 떠나 있던 천영검대의 무인들이 하나같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비급의 행방을 뒤쫓는 데 성공해 마침내 도착한 곳은 섬서 경양(泾阳)현.
선우약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한 현이기도 했다.
그래서 의아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수집한 증거와 정보들로 볼 때 묵룡일원공의 비급은 분명 선우약가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다만 ‘누가’와 ‘어째서’를 증명할 단서가 부족했다.
“계속 의심하기보다는 차라리 선우약가주님을 직접 찾아뵙고 사정을 말씀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주?”
수하의 말에 현 천영검대주 심성결(沈聖潔)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누군가가 천상비고에서 마교의 비급이자 천마의 심공 중 하나인 묵룡일원공을 빼내 갔다. 한데 그 비급의 행방이 선우약가에서 발견됐다.
물론 선우약가를 의심하는 건 아니나 정황은 그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선우약가의 인물인 의당주까지 엮여서 일이 복잡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선우약가나 의당주는 이런 짓을 벌일 분들이 아니다. 그들이 왜 마교의 비급을 노린단 말인가?’
무가도 아닌 당대 최고의 의가가 선우약가이거늘.
그렇다는 건 결국 누군가가 이런 상황을 의도적으로 꾸몄다는 건데.
‘맹주님께서 언질 주셨던 그 배후세력 놈들이?’
선우약가가 아니라면 의심은 놈들에게 기우는 게 당연했다.
선우약가가 마교의 무공을 훔쳐 갔다는 식으로 몰아가려고 한 건가. 하지만 고작 이따위 계략이 통할 리가?
“선우약가주님을 뵙기 전에 맹주님께 먼저 보고를 올려야겠다. 이후에 맹주님의 명령을 기다리자.”
“알겠습니다.”
수하는 대답과 함께 정천맹 본단에 보고를 올리기 위해 근처 지부로 향했다.
그 사이 심성결은 가시거리에 들어오는 선우약가의 장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로선 맹주님께 보고를 올리고 선우약가주님을 만나 사정을 전한 뒤 비급을 돌려받으면 그만이다.’
자신들 선에서 조용히 처리한다면 큰 문제로 번지진 않을 것이다.
‘그래. 조용히…….’
속으로 생각을 되뇌던 그는 순간 안색이 딱딱해졌다.
***
“놈이 비급을 익히기 시작했나?”
화월각주의 질문에 사내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금씩 심공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천영검대는?”
“지금쯤 선우약가가 있는 경양현에 들어섰을 겁니다. 저희가 흘려놓은 흔적들을 뒤쫓았을 테니까요.”
사내의 확신에 화월각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한천자. 그 늙은이가 있었다면 일이 좀 더 수월했을 텐데. 그 부분이 조금 아쉽군.”
“정천맹 쪽은 아쉽게 됐지만 그래도 이번 일을 통해 선우약가는 제대로 쓸어버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럴 테지.”
정마대전.
전쟁이 벌어진 기간 동안 선우약가의 의술 덕에 수많은 무인이 목숨을 건졌다고 들었다.
게다가 전장에서 패퇴한 이들이 순식간에 몸을 회복하고 다시금 참전하는 일이 지속되면서 정마대전의 승기가 정천맹 쪽으로 기울었다.
그 정도로 선우약가의 의술은 숨만 붙어 있다면 어떠한 부상이든 치료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부상뿐인가. 그들 덕에 독은 물론이고 마교의 여러 가지 마공들이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정천맹과 천하오주를 노리는 자신들로서는 가장 껄끄러운 존재가 바로 선우약가였다.
하지만 조만간 그들은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도 월영련이 아니라 강호의 손에.
“슬슬 소문을 퍼트려라. 선우약가가 무가로서 거듭나기 위해 마교의 무공에 손을 댔다고.”
화월각주의 명령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인 뒤 곧장 몸을 날렸다.
사내가 사라지고 나자 화월각주는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창가 너머로 선우약가의 장원이 눈에 들어왔다.
‘마교. 그중에서도 무려 천마의 무공. 그런 무공을 자식 중 하나가 익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궁금하구나.’
화월각주는 직접 본 적도 없는 선우약가주의 얼굴을 떠올리며 연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선우약가주뿐만이 아니다.
소문이 퍼지고, 그 소문이 사실로 드러나게 된다면 선우약가는 무림 공적으로 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교에 의해 정파 세력이 얼마나 큰 피해를 보았던가.
그런 마교의 무공을 다른 누구도 아닌 천하오주의 세력 중 하나가 탐했다는 사실에 강호인들은 크게 분노할 것이다.
동시에 천마의 비급을 탐내는 이들도 나타나겠지. 무가도 아닌 고작 의가일 뿐인 선우약가는 그 탐욕을 감당해 낼 수도 없을 터.
화월각주는 그때가 기다려진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한동안 창가 곁을 떠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