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1장 단련(4)
“유씨세가의 유진휘라고 한다는군. 나이에 비해 실력과 재능은 범상치 않은데 그 때문인지 우릴 뒷방 늙은이 취급하는 놈이야.”
원로원주의 소개가 이어지자 여러 쌍의 시선이 쏘아지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서 있던 나는 덤덤히 그들의 시선을 받아넘겼다.
원로원의 노고수들.
그들에겐 더 이상 과거의 별호나 명성이 통용되지 않았다. 원로원주를 제외하곤 딱히 부여받은 지위도 없다고 들었다.
원로원을 떠나고 싶은 이들은 언제든 떠나도 좋다는 뜻이 담긴 배려이자, 동시에 그들이 맹의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늙었다고는 하지만 수십 년의 세월을 강호에 몸담았던 이들인 만큼 마음먹고 맹을 휘어잡고자 한다면 이들 손에 의해 좌지우지될 게 자명했으니까.
물려받는 건 전대의 지혜와 경험으로 충분하다는 쇄신 정책이라나 뭐라나.
전생엔 맹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딱히 관심이 없었기에 깊게는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뒷방 늙은이들은 맞잖아.’
아무리 봐도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때였다.
“건방진 놈이로고.”
여섯. 원로원주의 부름에 몰려든 원로들의 숫자가 여섯 이다. 이들이 그나마 원로원에서 가장 활동적인 노고수들이었고 나머지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거처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 여섯 중 하나가 성큼 내 앞으로 다가서서 나를 이리저리 훑어봤다.
“건방진 놈이긴 한데… 이놈 이거 아주 물건일세.”
그의 눈길은 정확히 내가 아니라 내 몸을 향해 있었다.
“몸이 아주 탄탄하군. 기세를 보니 인극의 경지에 도달해 환골탈태까지 경험한 듯싶은데 그 이후에도 줄곧 신체의 단련을 등한시하지 않았어. 아니, 이 정도면 혹사 수준으로 몰아붙였겠는걸?”
그가 나를 살피는 사이 나도 슬쩍 그를 살펴봤다.
백발백수에 얼굴엔 세월의 흐름이 담긴 주름이 가득했는데 반대로 몸은 황소처럼 우락부락했다.
‘권왕과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겠어.’
전생을 통틀어 만났던 이들 중 신체를 가장 극한까지 단련시킨 인물이 현 하남장가의 가주인 권왕이었다.
한데 눈앞의 노인은 그 못지않은 신체의 소유자였다.
“이런 몸을 가지고 왜 검 따위를 쓰는 게야? 모든 무공은 주먹 앞에서 평등하거늘.”
사고방식도 권왕과 비슷한 걸 보아.
‘하남장가의 인물인가?’
굳이 캐묻는 대신 나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은퇴한 이후 과거에 초탈한 이들로서 지금은 그저 원로원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만큼 정체를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독고태문에게도 원로원주를 제외하면 정체를 궁금해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기도 했고 나 또한 이들의 정체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오직 이들과의 비무가 다였다.
내가 상념을 접는 사이에 이번엔 다른 원로들도 하나둘씩 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다들 표정이 약간이나마 상기되어 있는 상태였다. 무료한 일상을 달래줄 흥미로운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듯이.
“그래서 이놈을 데려온 이유가?”
그중 하나가 묻자 원로원주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우리와 전력을 다해 실력을 겨뤄보고 싶다는군.”
“실력을 겨룬다? 지도 대련이라도 원하는 건가? 맹주가 함께 들렀다가 돌아갔다고 들었네만.”
“전 천영검대주의 무공을 이은 아이라고 들었네. 그만큼 맹주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중이란 뜻이지.”
“전 천영검대주라면 천마를 죽였던?”
“그의 검법이 가히 천하제일이라고 하더니.”
나를 중심으로 모여든 원로들이 왁자지껄해지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다가 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그럼 우리가 뭘 해주면 되겠나?”
원로원주는 그 질문을 내게 떠넘겼다.
“정확한 건 이 아이에게 물어보게.”
그로 인해 시선이 내게 집중됐고 나는 그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듯이 전력을 다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르신들 모두 저를 죽여야 할 적이라고 인지하고 상대해주십시오.”
내 말에 그들은 눈을 빛내다가 입맛까지 다시며 투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
“시간 끌 필요도 없이 당장 시작하지.”
원로 중 처음으로 내게 흥미를 보였던, 탄탄한 근육으로 뒤덮인 신체의 노고수가 나를 끌고 어딘가로 이동했다.
원로원주와 나머지 다섯 원로가 뒤따랐고 이내 도착한 곳은 큼지막한 공터. 넓기도 넓고 주변에 거리끼는 게 없어서 마음껏 무공을 펼치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중앙에 자리를 잡자 우락부락한 몸을 비틀며 몸을 푼 노고수가 미소를 머금었다.
“유진휘라고 했던가?”
“예.”
“나는… 이곳에선 청노(淸老)라 불린다네.”
청노처럼 원로들은 각자 옛 별호 대신 부르기 편하게 단순명료한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청노 어르신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그렇지. 그리고 네가 원하는 대로 지도 대련 따위가 아니라 실전처럼 상대해 주마.”
“감사합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자 청노의 웃음도 짙어졌다.
원로원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기도를 숨기지 않고 있던 참이라 그 또한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 만큼 그는 오랜만에 투지와 호승심을 불태우고 있는 듯싶었다.
“우리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 마음껏 싸워보게.”
원로원주의 그 말을 시작으로 나와 청노가 서서히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청노에게서 넘실거리는 파도와도 같은 기세가 피어올라 나를 덮쳐왔다. 이어.
팡-!
기세에 대항할 틈도 없이 청노는 지면을 박차고 쇄도했다. 실전인 만큼 후배를 위해 선공을 양보하는 일 따윈 없었다.
후-웅!
청노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내 안면을 노렸다. 그의 일권은 충분히 집채만 한 바위도 단숨에 부숴버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별다른 초식도 아닌 단순한 주먹질일 뿐인데도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느낌. 그 느낌은 내게는 다소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역시나 청노는 하남장가와 관련된 인물인 듯싶었다.
터-엉!
나는 내력이 실린 검으로 주먹을 흘려보낸 뒤 곧장 그의 옆구리를 노렸다.
빛살 같은 속도였는데 청노는 휘둘렀던 주먹을 회수하면서 반대 손으로 내 검을 쳐냈다.
쾅! 하는 소리 뒤로, 나와 그는 한 걸음씩 밀려났고 그러자마자 서로를 향해 곧장 짓쳐들어가 다시 뒤엉켰다.
서로의 실력을 대강 파악하고 있는 만큼 초반부터 검강과 권강이 넘실거리듯 피어오르고 있는 상황.
그 기운은 망설임 없이 상대방의 급소와 요혈을 찌르고 부수기 위해 충돌하고 있었다.
자칫 실수라도 한다면 목숨을 잃게 될 정도의 치열한 공방임에도 나와 청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런 싸움은 실로 오랜만이로구나!”
오히려 청노는 나보다 더 만족하고 있는 듯 보였다.
덕분에 나는 점차 본 실력을 내보일 수 있었다. 환생한 이후 전력을 다하는 건 마기에 취해 날뛰던 동악검선을 제압해야 할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청노라면 그때처럼 격렬한 싸움을 재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
콰-앙!
공방이 백여 합을 넘어갈 때쯤.
“큭!”
처음으로 상처를 입은 청노가 슬쩍 자기 목덜미를 내려다봤다. 조금만 더 깊었다면 여지없이 목이 잘려 나갔을 부위였다.
“좋구나. 아주 좋아.”
목덜미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음에도 청노는 개의치 않고 다시금 나를 향해 짓쳐들어왔다.
상처 입은 맹수처럼 공세가 날카롭고 매서워졌다.
후웅! 쾅!
그의 주먹은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하나하나가 거칠고 무거웠다. 더욱이 싸움이 길어지고 있음에도 위력이 줄지를 않았다.
일일이 검으로 쳐내기엔 역부족이어서 괘월선보를 발휘해 그의 후방을 점했다.
이형환위의 수법인지라 그의 시야가 내 잔상을 쫓는 틈에 반격을 가할 생각이었는데.
후-웅!
순간 청노가 몸을 재빠르게 휘돌리며 팔꿈치를 뻗어왔다.
퍽!
“읍!”
나는 황급히 검을 들어 검면 쪽으로 막아내긴 했지만, 충격을 흘려내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 틈에 청노가 쉴 새 없이 주먹을 휘둘러왔다. 소나기 같은 공격을 피하고 쳐내다 결국 왼쪽 어깨에 일격을 허용하고 주룩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형환위라. 놀라운 수준의 보법이지만,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느냐?”
그는 마치 이형환위 정도는 수도 없이 당해봤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긴. 이들 중에 그 정도 수준의 보법을 펼칠 수 있는 고수가 없을 리가.
나는 실수를 인정하면서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콰쾅!
다시금 청노와 부딪치면서 이를 악물었다. 전대 고수의 강함을 실감하면서 어느샌가 머릿속으로 전생의 깨달음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쾅!
그 깨달음 속에 몸을 맡기자 몸이 저절로 움직이듯 반응하기 시작했다.
쾅!
이때부터 조금씩, 청노의 공격에 대응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보다 간결하게. 보다 효율적으로. 보다 정확히. 보다 빠르게.
쾅! 쾅쾅!
검을 휘두를 때마다 내 몸이 비명을 내질렀다. 저 멀리 앞서 있는 깨달음을 뒤쫓느라 뼈마디가 뒤틀리는 고통마저 함께 따라왔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고 이 고통 너머에 다음 경지로 향하는 길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멈출 수가 없었다.
“컥!”
내가 멈추지 않자 이제는 청노 또한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냈다.
그로서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상대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촤악!
마침내 연신 밀려나던 청노의 가슴 위로 다소 깊은 검상이 새겨졌다.
그가 인상을 구기며 주춤거리는 사이에 나는 자연스럽게 천일백야검법의 초식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유진휘가 아닌, 전생의 나라고 해도 좋을 만큼 쾌(快) 속에 유(柔)와 강(强)이 한데 어우러지는 정수가 담긴.
순간 청노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천마를 죽였다던 전 천영검대주의 검법을 직접 겪어보게 될 줄이야. 오거라!”
그는 피하거나 막아내는 대신 내 초식과 정면으로 겨룰 심산인 것 같았다.
이어 주변 공기가 일그러져 보일 만큼 강맹한 기운이 그의 양 주먹을 에워쌌다.
일견하기에도 그는 내상 따윈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마지막 한 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만약 싸움이 벌어진 초반이었다면 잔뜩 긴장했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었다.
‘일단 발은 걸친 건가?’
인극 다음인 지극의 경지.
드디어 그 경지 위로 한 발을 내디딘 상태.
“하압-!”
두 주먹에 노도와 같은 기운을 머금은 채로 날아드는 청노의 움직임이,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리게 보였다.
반대로 내 초식은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순식간에 그의 몸을 갈랐다.
촤자자작!
이어 스치듯 내 옆을 지나쳐 뒤쪽에 멈춰선 청노가 눈을 깜빡였다.
“허…….”
짧은 탄식과 함께 그의 몸 위로 거미줄 같은 상처가 불거졌고, 그는 전신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채로 털썩 주저앉았다.
죽진 않았을 테지만 치명상에 가까운 깊은 상처일 터.
하지만 싸움을 지켜보던 원로원주와 원로들은 오로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중 원로원주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고작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지극의 경지에 올라섰다고?”
나직했지만 동시에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만큼 놀라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검을 손에 쥔 채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아닙니다. 계속하시죠. 지금이 아니면…….”
“그렇겠군.”
설명하기도 전에 원로원주는 내 상태를 알아차린 듯싶었다. 확실하게 지극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을지 없을지 기로에 놓인 순간.
“더 할 거라면 이번엔 내가 나서지.”
남아 있는 다섯 원로 중 하나가 내 바람대로 중앙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