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2장 기대(1)
원로원주의 거처로 이동했을 때 그는 외원 중앙에 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 있는 모양이었다.
“몸은 좀 괜찮으냐?”
“예. 약노 어르신 덕분에 쾌차했습니다. 예상치도 못한 은혜까지 입어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원주님께서도 알고 계셨습니까?”
“대심환이라고 한다.”
“대심환이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확실히 내가 복용한 게 평범한 영약은 아니구나 싶었다.
“약노. 그 사람만이 제조할 수 있는 천고의 영약이라고 들었다. 마지막 남은 한 알이었을 게야.”
“그 정도로 귀한 거였습니까?”
“그만큼 네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게지. 너 말고도 대심환을 복용한 이가 맹에 한 명 더 있었다. 전대 맹주.”
내가 복용한 대심환을 검신 영감도?
맹주이기에 자나 깨나 업무에 치여 사느라 몸이 허하다며 앓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던 그였다. 이런 영약을 받아 먹어놓고도.
모르긴 몰라도 그가 검신이라고 불리게 된 데엔 대심환의 도움도 컸을 것이다. 그만큼 직접 체감한 대심환의 효능은 대단했다.
‘약노 어르신의 의술과 대심환이 아니었다면 병상에서 일어나는 데만 족히 두 달은 걸렸을 거야.’
지극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자 나도 모르게 무리한 싸움을 이어갔다. 그로 인해 전생의 수준에 근접할 정도로 경지를 회복하긴 했지만, 몸이 심각하게 망가졌었고.
“감사합니다. 원주님과 어르신들 덕분에 목표한 바를 이루었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원로원주는 나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열흘 전과 비교하면 차원이 다른 기세로군.”
그렇겠지.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의 나는 거리낄 게 없었다. 조금만 더 다듬으면 천마를 죽였던 천영검대주, 그때의 나와 같은 수준까지 끌어올릴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전생의 수준에 안주할 생각은 없으니까. 유진휘의 몸으로 환생했을 때부터 이미 결의를 다지지 않았던가.
지금까진 왔던 길을 되짚어 걸어온 게 전부였다. 이제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남았다.
천극.
먼 과거 이래 지난 수백 년간 천극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알려진 고수는 없었다.
현 강호에선 그나마 천극의 경지에 근접한 인물이 검신 영감과 아마도 월영련주. 그리고 나.
물론 지금은 두 사람이 조금 더 앞서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그들에게 없는 젊음이 있었고 지난 생의 경험이 있었으며 주변 모두가 인정했던 재능이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두 사람을 앞지를 자신이.
“허. 또다시 다음을 노리고 있다는 건가?”
원로원주의 감탄에 나는 덤덤히 미소를 지었다.
***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원로원에 들어왔을 때 적어도 한 달 이상은 머물 거라 예상했다. 그 시기가 앞당겨지긴 했지만,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니 나로서는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원로원주는 고개를 저었다.
“좀 더 머물다 가거라.”
“예?”
“맹주가 직접 찾아와 너를 맡겼는데, 원주로서 딱히 네게 해준 게 없구나.”
“이미 충분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건 약노를 비롯한 원로들의 도움이었고. 내게는 아직 아니지.”
이미 마음을 굳혔는지 그는 단호했다.
멀뚱히 쳐다보고 있자 그는 느닷없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자신과도 실력을 겨뤄보자는 건가? 의아해하고 있는데 그의 검은 내가 아니라 허공을 향했다. 허공에 검을 겨눈 채 원로원주가 입을 열었다.
“혹 맹주에게 나에 대해 들은 얘기가 없느냐?”
원로원주에 대해서라.
“있습니다.”
나를 뒤로하고 돌아가던 독고태문에게 확실히 들었었다.
원로원주 철무군(哲撫軍).
현 강호의 검신 백도천. 전대 강호의 검황(劍皇) 철무군. 검법만큼은 각 시대에서 천하제일을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두 사람.
세간엔 두 사람이 같은 시대를 살았다면 누가 더 우위였을까를 궁금해하며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내 객관적인 평가로는 검신이 조금 더 우위. 하지만 철무군 역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고수였다.
조금만 더 젊었다면 그 또한 천극의 경지를 노릴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과거엔 검황이라 불리셨다고 들었습니다.”
“허명일 뿐이지만, 그래도 나름 검에는 자신이 있었다.”
말과 함께 번쩍하는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단순한 일검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묘리와 기세는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번쩍!
이번에는 횡으로. 이어지는 사선 베기와 찌르기. 철무군은 차근차근 검으로 점할 수 있는 모든 방위들을 베고 찔러 갔다.
검을 사용하는 무인들이 표본으로 삼아도 될 정도로 완벽한 자세들.
나 또한 단순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배우는 게 있었다.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천일백야검법의 자그마한 허점들이 머릿속으로 자연스레 피어올랐고, 다시 물 흐르듯 머릿속에서 보완할 수 있었다.
“벌써 또 다른 깨달음을 얻고 있는 모양이구나.”
“원주님의 검에 담겨 있는 경지가 그만큼 대단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대단하다라.”
파-앙!
순간 철무군의 기도가 급변했다.
완벽함 속에 묘한 분노와 오기가 실린 것처럼 보였다.
파앙!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고막을 울릴 정도로 점점 거칠어졌고.
콰-앙!
이어 검에서 뿜어져 나온 기파가 외원의 담벼락을 단번에 무너트렸다. 철무군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러 갔다.
어?
순간 나는 철무군 앞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실제로 누군가가 나타난 게 아니라 철무군의 검이 심상 속의 누군가를 떠올려 상대하고 있는 거였다.
촤자자작! 쾅!
동시에 철무군의 검 위로 검강이 피어오르며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나였어도 절대 쉽게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의 초식들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철무군의 심상 속에 자리 잡은 상대방도 만만치 않았다.
거의 호각.
슁-! 콰과광!
철무군의 마지막 초식이 펼쳐지면서 가시거리에 들어오는 전방이 초토화되다시피 터져나갔다.
“후우.”
거친 숨을 가다듬던 철무군은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모든 걸 쏟아부었음에도 심상 속의 적을 쓰러트리지 못한 것이다.
실제 대결이었다면…….
“어떤가?”
“…….”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철무군의 무위에 놀라고 있는 것도 맞지만 정확히는 철무군이 상대했던 적의 모습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월영련주?”
순간 그 이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
철무군이 월영련주와 싸웠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분위기나 기세를 보아 철무군은 그에게 패배했고 그때부터 당시의 패배를 곱씹으며 노력해온 듯싶었다.
그런데도 겨우 호각.
패배를 안겨준 상대의 실력을 따라잡은 건 맞지만 그동안 월영련주 또한 제자리에 머물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지난번 마주쳤던 월영련주가 실제 그랬으니까.
지금의 철무군과 월영련주가 다시 맞붙는다 해도 결과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월영련주?”
내 중얼거림에 반응한 철무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맹주에게 월영련이라는 세력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긴 했다만.”
은퇴한 이들이라도 원로원주인 철무군에게만큼은 정황을 털어놔야 했겠지.
“월영련주에 대해서도 들으셨습니까?”
“들었다. 네가 직접 마주쳤다는 말도, 그자가 전대 맹주를 노리고 있다는 얘기도 모두. 한데 그자는 갑자기 왜…….”
나는 철무군에게 내가 느낀 바를 털어놨다. 백의문주일 때 쓰는 가면에 새겨진 검상과 괘월선보를 얻은 동굴 속에서 발견한 호신갑에 새겨진 검상에 대한 부분도 함께.
“그자가 과거의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까지 살아 있는 존재라고?”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제가 판단하기엔 그렇습니다. 그놈도 부정하진 않았습니다. 의아한 건 놈의 겉모습이 높게 쳐줘 봐야 사십 대의 나이에 불과하다는 거였습니다.”
“그럴 리가……. 네가 착각한 게 아니더냐?”
철무군의 반문에 나는 품속에서 백색 가면을 꺼내 보여주었다.
가면 중앙에 뚜렷하게 새겨진 검상.
만약 과거에 철무군에게 패배를 안겨준 당사자가 월영련주라면 검상을 알아볼 게 분명했다. 직접 검을 겨뤄봤으니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역시나 철무군은 검상을 보자마자 이를 빠득 갈았다.
“틀림없군. 그자다.”
철무군을 통해 다시 한번 월영련주가 세월을 빗겨나갔다는 게 확실시되는 순간이었다.
***
“그 시절의 나는 과분한 평가를 받으며 일찌감치 절대 고수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한데 그런 내 앞에 홀연히 나타난 인물에게 무력하게 패배하고 말았지.”
철무군은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이후 나는 전보다 더 치열하게 검을 수련했다. 손에서 검을 놓지 않았고 그 덕에 검황이란 별호까지 얻을 수 있었어. 은퇴한 이후에도 마찬가지. 언젠가 그자와 다시 겨룰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새로운 검법도 창안했으나 이렇게 늙어버릴 때까지 그자를 만나지 못했다.”
철무군 입장에서는 처음 느껴보는 무력감이라고 했다.
이후 다시금 승부를 겨룰 날만을 기다리다가 흘러간 세월에 따라 호승심마저 과거의 아쉬움 정도로 자리 잡게 됐을 터.
한데 그 상대방이 월영련주라는 존재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거기다 상대는 철무군과 달리 늙지도 않았다.
“어떻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구나.”
원래라면 월영련주 또한 철무군처럼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야 했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지금껏 젊음을 유지한 채 수련을 이어왔다면 그자는 그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겠군. 지금의 나는 상대가 되지 못할 정도로.”
“…….”
나는 침묵했고 철무군은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는 건 전대 맹주 역시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번에도 침묵을 고수했다.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검신 영감과 월영련주.
내가 생각하기에도 두 사람의 승부는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그때 철무군이 품속에서 비급 한 권을 꺼내 보였다.
“원래도 네게 전수할 생각이었다만 이제는 그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이건…….”
철무군이 조금 전에 펼쳐 보였던 검법. 그 검법의 비급이었다.
“무공 자체는 오래전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나는 현재 이 무공을 칠성까지밖에 익히지 못한 상태. 창안한 나조차 고작 그 정도가 한계일 정도로 익히기 어려운 무공이다.”
그게 고작 칠성이었다고?
“옆에서 지켜봤으니 알겠지만, 이 검법을 대성한다면 능히 그자. 아니, 월영련주와 겨뤄도 밀리지 않을 게다.”
확언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내가 보기에도 그가 시연했던 초식들이 칠성이 아니라 대성한 상태에서 펼쳐졌다면 심상 속의 월영련주를 꺾을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대신 대성에 도달하는 과정이 쉽지 않겠지. 본인이 그렇게 말하기도 했으니.
“너라면 가능할 거다. 이 검법을 대성하는 것도. 월영련주를 꺾는 것도. 현 맹주처럼 나 또한 원로원주로서 네게 기대를 걸어보고 싶구나. 어떠냐?”
비급을 건네는 철무군을 향해 나 또한 천천히 팔을 뻗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