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2장 기대(2)
승천대명검법(昇天大明劍法).
검황 철무군이 말년에 이르기까지 세월을 바쳐 창안한 검법. 내가 익힌 천일백야검법과 비교해 보자면 수준은 조금 떨어졌다.
다만 특정 상황에서는 천일백야검법보다 효과적인 운용이 가능했다.
“이제는 월영련주라고 불러야 할 테지. 과거에 그와 겨뤘을 때, 그의 검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단순 무식했다. 하지만 그 단순 무식한 검에 완전무결함이 더해져 그의 일검은 빨라야 할 땐 빠르고 강해야 할 땐 강하며 부드러워야 할 땐 부드러웠지.”
철무군은 승천대명검법을 전수해 주는 동시에 과거 월영련주를 상대로 패배했던 당시의 감상을 전해주었다.
“단순한 검이라…….”
나는 그의 감상 속에서 묻어나오는 월영련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일전에 화월각주를 구하고자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 겹치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때 그는 단 일검에 내 초식을 파훼했었다.
확실히 그의 검은 단순했지만 단순한 만큼 검 안에 자신의 의지를 담아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검신합일의 경지를 넘어 검의합일(劍意合一)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아무리 지극 고수라 하더라도 검의합일을 이루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전생의 나나 천마, 그리고 검신 영감조차 마찬가지였다.
월영련주는 초식을 단순화시키는 대신 검 하나하나에 의지를 담는 것에만 집중한 듯 보였다.
“승천대명검법 역시 검의합일을 주체로 한 검법이다. 대신 나는 초식의 섬세함 또한 버리지 않았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두 가지 모두를 취할 수 있다면 분명 그자의 검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게야.”
철무군의 가르침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검의합일의 경지 속에서 초식의 위력이 앞선다면 분명 월영련주를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승천대명검법은 그걸 위해 창안한 검법이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 번뜩임이 스쳐 지나갔다.
검의합일의 경지를 승천대명검법뿐만 아니라 천일백야검법에도 완전하게 녹여낼 수 있다면.
‘뛰어넘는 것뿐만 아니라 더욱더 나아갈 수 있어.’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나는 천일백야검법의 초식보다 뛰어난 초식을 겪어보지 못했다.
그런 초식에도 의지를 담아 펼쳐낼 수 있다는 건 결국 모든 검에 의지를 담을 수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그래. 그거야말로 진정한 검의합일이다.’
단순화된 초식.
검의합일을 주체로 만든 초식.
그런 제약이 없이 어떤 검이든 의지를 담아내는 것.
“음?”
철무군이 말을 하다 말고 멈칫하며 나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갑작스레 찾아온 깨달음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허허. 대체 얼마나 더 강해져야 만족할 수 있…….”
철무군의 목소리마저 점점 멀어져가면서 나는 무아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
그날 이후 한 달이란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원로원에 머물며 철무군의 가르침을 통해 승천대명검법을 수련했다. 느닷없이 찾아온 깨달음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예전과 변함없이 신체를 단련하는 데도 집중했다.
중간중간엔 나와 비무를 벌였던 원로들.
청노와 검노를 비롯한 그들이 찾아와 자신들의 절기를 하나씩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가르침 또한 거리낌 없이 흡수했다.
철무군은 하나에만 집중하기도 모자란 시간에 그 모든 무공을 섭렵하려 하느냐고 꾸짖다가, 내가 모든 가르침을 순식간에 이해하고 받아들이자 당황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흠흠. 그래, 이참에 배울 수 있는 건 모두 배워가거라.”
그때부터 나는 자는 시간조차 줄여가며 수련에만 매진했다.
평소엔 거처 안에만 머물며 은둔 생황을 이어가던 원로들도 나에 대한 소식을 듣더니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또한 호기심 삼아 무언가를 가르쳐주기 시작했고.
“그걸 벌써 익혀냈다고? 이놈 보게. 그렇다면…….”
호기심은 어느새 호승심으로 뒤바뀌었다. 호승심의 대상은 내가 아니라 내 재능을 향한 거였다. 뭔가를 가르쳐주면 하루아침에 익혀버리니 오기가 생긴 것이다.
“어디 이것도 한번 익혀보거라. 이번엔 절대 하루 만에 익혀낼 수 없을 거다.”
그들은 갈수록 수준도 높고 익히기도 난해한 무공들을 보여주었지만 나는 그조차도 단숨에 익혀낼 수 있었다.
“아니! 이것조차 고작 하루 만에?”
“…….”
솔직히 이때만큼은 나조차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재능이 이 정도였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과거에도 검신 영감이 내 재능을 높이 산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는 그저 일영청심공과 천일백야검법이 뛰어나서 그런 거라고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동시에 그때는 마교와 천마를 죽여야 한다는 복수심에 취해 그저 강해지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었고 내 재능이 어느 정도이니 하는 평가는 한 귀로 흘려들었었다.
환생한 이후엔 내 재능이 뛰어나다기보단 지극의 경지에 도달했던 경험 덕분에 무언가를 익힘에 있어서 수월할 수밖에 없겠거니 여기고 있었고.
어쨌든 그렇게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을 때.
“정말 미친놈이로고.”
“이 사람아. 그게 애한테 할 소린가?”
“대단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니 어쩔 수 있나?”
“허허, 틀린 말은 아니지.”
나는 원로원의 원로들과도 적잖은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묻어나오는 기대감 또한 읽어낼 수 있었다.
그 기대감은 내가 승천대명검법만으로 원로원주인 철무군과 비무를 벌여 승리를 거머쥐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고작 한 달 만에 승천대명검법을 팔 성까지 익혀 철무군의 경지를 뛰어넘었으니까.
승천대명검법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내 무위가 원로원 모두와 전생의 내 경지마저 앞질렀다.
“원주님과 어르신들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마지막 날에 나는 그들을 향해 정중히 절을 올렸다.
원로들은 나를 중심으로 모여들어 저마다 한마디씩을 내뱉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래간만에 즐거웠다, 이놈아.”
“노부의 무공을 익혀놓고 어디 가서 두들겨 맞기만 해보거라. 그때는 아주…….”
“이미 네놈조차 진휘에겐 한주먹거리가 되지 않는데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게야?”
“뭐라? 이놈이!”
알게 모르게 그들은 어느샌가 나를 원로원의 공동 제자 정도로 여기고 있는 듯싶었다.
정식으로 사제의 연을 맺은 건 아니지만 지난 한 달간 그만큼 서로 최선을 다해 가르쳤고 배웠으니 마음 한편에 그런 감정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을 터.
마지막으로 철무군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우리 또한 맹주만큼이나 네게 거는 기대가 크다.”
“알고 있습니다.”
“지지 말거라. 그 누구에게도.”
“예.”
“그렇게만 된다면 앞으로 강호는 너를 중심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철무군의 말에 원로들이 합심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
“맹주님!”
총군사 묵가후가 맹주전으로 들이닥쳤다. 그를 맞이하는 독고태문 또한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미 탁자 위에 구깃구깃한 보고서들이 널브러져 있는 상태였다.
“상황이 좋지 않군.”
독고태문의 한숨에 묵가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선우약가가 있는 섬서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소문 때문이었다.
“선우약가의 둘째 아들이 천마의 무공인 묵룡일원공을 익혔다는 소문이 계속해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선우약가의 반응은?”
“선우약가 쪽에선 순순히 인정했습니다. 둘째인 선우영민(鮮于英敏)이 많은 눈이 지켜보는 앞에서 직접 마공을 펼쳐 보였으니까요.”
선우약가가 마교의 무공에 손을 댔다는 소문이 퍼진 건 이십 일 전쯤.
독고태문으로서는 그때 이미 천영검대의 보고를 통해 묵룡일원공의 비급이 선우약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비급을 빼내 간 월영련 쪽에서 무언가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라 여겼고, 발 빠르게 움직여 선우약가주와 상의한 뒤 비급을 회수하면 그만이라고 판단했다.
한데 그러기도 전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선우약가의 둘째인 선우영민이 누군가에게 습격받는 일이 발생했다.
문제는 선우영민이 아무도 모르게 묵룡일원공을 익히고 있었다는 거였고 하필 습격받은 장소가 선우약가가 있는 경양현 저잣거리의 객잔 안이었으며 그로 인해 소문이 진실로 밝혀졌다.
더욱이 선우영민은 마기에 취해 자신을 습격한 이들로 모자라 엄한 이들까지 공격했다. 인원을 나눠 선우약가의 인물들을 주시하고 있던 천영검대원 일부가 직접 나서서 그 상황을 저지하지 않았다면 적잖은 사상자가 발생할 뻔한 사건이었다.
결국 빼도 박도 못한 상황에 놓인 선우약가는 소문이 사실이라 인정하는 동시에 둘째인 선우영민을 직접 잡아들여 자체적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사실 자체는 인정했지만 둘째인 선우영민이 어디서 마교의 무공을 얻게 됐는지는 자신들도 알지 못하며 이번 일은 선우영민의 독단적인 행동이라고 표명하고 나섰습니다.”
“그래. 그게 진실이겠지만, 우리를 제외한 어느 누가 그걸 진실로 받아들이겠는가?”
“…그만큼 민심이 좋지 않습니다. 소문 자체도 점점 상세해져서 묵룡일원공의 비급이 정천맹의 비고에 잠들어 있었고 선우약가의 인물 중 누군가가 가문으로 비급을 빼돌렸다는 식으로 와전되고 있습니다.”
“월영련. 놈들이 노린 게 이거였군.”
비급 하나로 강호인들의 민심을 반대편으로 돌아서게 했다.
아무리 천하오주 중 하나인 선우약가라도 눈 밖에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강호인들 처지에서 마교는 철천지원수였고 마교의 무공은 감히 손대서도 안 되는 금기 중의 금기였으니까.
한데 그런 무공을 우연히 얻은 것도 아니고 도둑질해 익힌 모양새였다.
“섬서 무림 쪽에선 선우약가 자체를 무림 공적으로 지명하고 자신들 손으로 처단하겠다며 궐기한 상태입니다.”
“감히? 당장 멈추라고 하게. 정천맹이 직접 나서서 자세히 조사하고 난 뒤 일을 처리하겠다고 말이야.”
“…저희가 나서게 된다면 불타오른 민심이 맹 쪽으로도 옮겨 붙게 됩니다. 게다가 장로들 대부분이 의당주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민심을 등에 업은 장로들이 방해하고 나선다면 조사 자체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할 겁니다.”
“그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최선은 이번 일이 월영련의 계략이라는 걸 밝혀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나 그때까지 선우약가가 버틸 수 있느냐가 문젭니다.”
섬서 무림의 움직임이 예상보다 빠르고 치밀했다.
마치 소문이 터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들은 순식간에 연합을 구성했고 선우약가를 공적으로 몰아 처단하고자 하는 목표를 앞세웠다.
그쪽에도 틀림없이 월영련의 입김이 닿았을 테지.
만약 정천맹이 증거도 없이 선우약가를 비호하고 나선다면 자칫 강호 전체에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필 맹주인 독고태문 또한 천하오주인 독고세가의 인물. 천하오주를 향한 강호인들의 반감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월영련 입장에서는 강호의 분열이든 선우약가의 몰락이든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도 긍정적일 수밖에 없을 테고.
독고태문과 묵가후가 안색을 굳힌 채 착잡해하고 있을 때였다.
“강호인들의 공분을 사도 상관없는 인물이라면 선우약가를 도와도 된다는 거죠?”
맹주전 입구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독고태문과 묵가후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백색 가면을 들어 올리며 덤덤히 두 사람의 시선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