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2장 기대(3)
“자네?”
묵가후는 나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눈을 빛냈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백색 가면을 처음 보는 게 분명할 텐데도 눈빛에서 익숙함이 묻어나왔다.
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가면을 쓰고 머리를 건성으로 묶어 올렸다. 백의문주를 행세할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자 묵가후가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백의문주의 용모파기와 똑같군. 검상이 새겨진 그 가면도.”
정천맹의 총군사이자 비선당이라는 정보 세력을 이끄는 묵가후였다.
백의문과 백의문주에 대해서도 당연히 조사해두었을 터.
태사의에 앉아 있던 독고태문은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 앞으로 걸어가 포권지례를 취했다.
“백의문주가 맹주님과 총군사를 뵙습니다.”
가면을 쓴 채로는 목소리와 풍기는 기세마저 연기를 하던 나였기에 내게선 더 이상 유진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독고태문과 묵가후가 흠칫 놀랄 정도로.
“가면을 쓰는 모습을 직접 보고 있지 않았다면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겠어.”
“그렇습니다, 맹주님.”
놀라긴 했지만 백의문주의 정체가 나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유추하고 있었던 듯 두 사람은 수긍이 빨랐다.
“얼추 파악하고 계셨던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말하자 묵가후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확신까진 아니어도 정황상 어느 정도 예상하고는 있었네. 백의문주의 등장 시점과 유씨세가 소가주의 행적 등을 비교해 보고 다시…….”
일전에도 내 정체를 알아본 이가 있었다. 백의문에 있을 공손량. 그 또한 정황을 가지고 판단을 내렸다고 했지.
묵가후 역시도 정천맹의 총군사인 만큼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테고. 다만 굳이 겉으로 내색하거나 내게 캐묻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 내가 직접 나서서 정체를 밝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내 의중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중 독고태문이 물어왔다.
“백의문주로서 선우약가를 돕겠다?”
“예.”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게냐?”
“선우약가 편에 서게 되면 자칫 저나 백의문 또한 공적으로 몰려 강호인들의 공분을 사겠지요.”
“공분 정도가 아니다. 당장 섬서 무림 전체를 감당해야 할 수도 있어.”
유씨세가가 있는 산서와 달리 섬서는 선우약가 말고도 명성이 높고 세력도 강한 문파나 무가가 즐비했다.
그런 이들이 연합을 꾸려 선우약가를 몰아붙일 계획이라고 들었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번 일이 월영련의 계략이라는 걸 밝혀낼 때까지 시간을 끄는 정도라면요.”
“…그 과정에서 백의문주와 백의문의 명성에 흠집이 생길 수도 있다.”
“상관없습니다. 백의문주는 유진휘라는 정체를 숨기기 위한 가상의 인물일 뿐이고 백의문도들도 명성 따위엔 관심 없을 겁니다.”
공손량을 제외하면 녀석들은 모두가 사파 세력에 몸담았던 이들이다. 악명 따윈 개의치 않는 이들이란 뜻이었다.
내가 괜찮다고 했음에도 독고태문은 여전히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론 때문에 정천맹이 나설 수 없다면 제가 가는 게 최선일 것 같은데요.”
“네가 백의문주로서 나서 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건 맞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구나.”
독고태문이 고민하는 사이에 묵가후가 내 제안에 힘을 실어주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희에게 필요한 건 시간입니다. 이번 일이 월영련의 계략이라는 걸 밝혀내기만 한다면 선우약가도 백의문도 무사할 겁니다. 제 생각에도 지금으로선…….”
묵가후마저 동조하자 독고태문은 하릴없이 결단을 내렸다.
“자꾸 네게만 무거운 짊을 짊어지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구나.”
독고태문의 한숨을 뒤로하고 나는 덤덤히 맹주전을 빠져나왔다.
***
“맹주님의 특명이라고?”
내가 백의문주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복룡추호대원들에게는 상황을 얼버무렸다. 맹주의 특명을 받아 잠시 맹을 떠나 있게 됐다고.
고주양과 손유수가 의아해하는 사이 묵가후에게 언질을 받았던 설표가 설명을 부연했다.
“지위는 막내 대원이지만 진휘의 실력은 우리 중에선 가장 뛰어나다. 맹주님께서 따로 그런 진휘에게 임무를 내린 거니까 다들 그렇게 알고만 있도록.”
“예, 대주님.”
원로원에서 머물다 돌아온 기간이 한 달이었다. 반가움의 회포를 풀기도 전에 내가 다시 떠난다니 고주양이 특히 아쉬워했다.
다른 대원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들어보니 나와의 비무를 통해 다들 적잖은 깨달음을 얻어 한창 수련을 이어 나가고 있다고 했다.
설표가 말했던 대로 지위는 막내 대원이지만 무위로는 내가 가장 뛰어나니 내게 여러 가지 조언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임무에서 돌아오면 다시 한판 붙어보는 걸로 하죠.”
내가 피식 웃자 고주양을 비롯한 대원들이 안색을 굳혔다.
“아, 아니. 비무는 됐다니까. 우린 그저 이런저런 조언을…….”
“실전만큼 도움되는 조언도 없습니다. 이번에 저도 그걸 절실히 깨달았으니까요.”
“…그러냐.”
고주양이 깊은 한숨과 함께 대원들을 돌아봤다. 다들 하나같이 똥 씹은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손유수가 그런 그들을 우르르 이끌고 돌아갔다.
“가서 수련이나 하자. 막내에게 두들겨 맞기 싫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지.”
“예!”
그들이 떠난 자리엔 이제 나와 설표만이 남았다. 그는 사뭇 진중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험한 임무인가?”
그 말에 나는 곧장 답하지 못했다.
위험하다면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겠지. 섬서 무림 전체와 대항해야 할 수도 있고 그 틈에 월영련이 끼어 있을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군.”
내가 웃자 설표가 따라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긴. 네가 직접 나서는데 위험한 일이 뭐가 있겠어?”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니.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는 거겠지. 그 어떤 무력 부대가 지극의 경지에 들어선 고수를 막내 대원으로 데리고 있겠나?”
복룡추호대주인 설표 역시 강호에선 명성이 자자한 고수였다. 그런 만큼 내 기세를 어느 정도 읽어 낼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어쨌든 너는 복룡추호대 일조의 막내 대원이다. 혹시라도 네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복룡추호대 모두가 나설 거야.”
“예.”
“무운을 비마. 아, 그러고 보니 이조 대원들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겠군?”
“이조… 요?”
그러고 보니 설표는 내가 원로원에 가 있는 동안에 옛 천영검대원들을 일일이 찾아 돌아다니며 입대를 권유했었다.
표정을 보니 꽤 성공적이었나 보다 싶었다.
녀석들로서도 자호단이나 여타 무력 부대의 생활보단 복룡추호대 밑에서 하나로 모일 수 있다는 사실에 거절할 이유가 없을 거라 여겼다.
“가보겠나?”
“네.”
나는 설표를 뒤따라 이조 대원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도착하고 보니, 그들은 이조에게 제공된 연무장에 모여 복룡추호대의 검진과 무공 등을 수련하고 있었다.
“합-!”
익숙한 기합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고 나는 설표와 함께 한구석에서 그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네 말대로 무위도 엄청나고 성정 또한 올곧기 그지없는 이들이었다. 자호단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자호단원으로서 살아가기엔 아까운 인재들이기도 했고. 다행히 다들 흔쾌히 권유를 받아들여 줬지.”
옛 천영검대원이자 이제는 복룡추호대의 이조 대원인 그들을 바라보는 설표의 얼굴엔 벅차다는 감정이 가득해 보였다.
전생에 그들을 바라보던 내 표정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녀석들은 뛰어났고 자랑스러운 수하들이었다.
노호산을 비롯한 익숙한 얼굴들을 하나하나 훔쳐보던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명이 부족한데요.”
“음.”
그 역시도 누구를 뜻하는 말인지 곧장 알아차렸다.
옛 천영검대 부대주, 소이겸.
“무구일검이라 불린다지.”
“그렇습니다.”
“아쉽지만 그는 맹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이겸이가?
못내 아쉬운 마음에 나는 혀를 찼다.
“나로서도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 인물이지. 총군사께서도 조만간 그에게 연통을 보내 다시금 입맹하기를 권유해 보겠다고도 했고. 옛 천영검대원들이 다시금 한자리에 모인 만큼 그가 이조 대원들을 이끌어주길 바라고 있다.”
녀석이 다시 돌아올까? 확신할 수 없지만 돌아와 준다면 월영련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큰 힘이 되어 줄 게 분명한데.
물론 녀석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존중할 생각이었다.
다만 노호산을 비롯한 옛 천영검대원들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소이겸 또한 얼굴이나마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들과 인사라도…….”
“나중에요.”
나는 녀석들을 조금 더 눈에 담아보다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
겨울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느지막이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섬서 경양현에서 나름 유명한 장명객잔은 거센 눈길을 피하기 위한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왁자지껄한 분위기. 다만 그런 손님들의 대화 주제는 하나같이 공통적이었다.
천하오주 중 하나인 선우약가. 그런 선우약가의 반 연합세력인 섬서 무림 연합회.
“연합회주가 공동파의 장문인인 칠성검(七星劍) 막 대협이라지?”
“그래. 공동파뿐인가? 칠성검 대협을 필두로 섬서에서 내로라하는 문파와 무가들이 힘을 합쳤어. 반대로 선우약가는 고립된 상태지.”
“다른 천하오주나 정천맹도 이번에는 선우약가를 돕기 꺼려질 수밖에 없을 테니.”
“당연한 일 아닌가? 마교의 무공이네. 그것도 무려 천마의 무공이라지 않나.”
“게다가 정천맹의 비고에 봉인되어 있던 걸 몰래 빼냈다지? 대체 왜 그런 짓을.”
“천하오주라고 추앙받고 있지만 선우약가는 엄연히 의가가 아니던가. 알게 모르게 저들 사이에서 괄시라도 받았나 보지. 덕분에 무공의 절실함을 깨달았을 테고.”
“쯧쯧. 그래도 하필 마교의 무공을. 끝났군, 끝났어.”
“어쩌면 연합회주인 막 대협이 선우약가를 밀어내고 공동파를 천하오주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도 있겠어.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손님 중 하나가 술잔을 치켜들며 외치자 나머지 손님들도 뒤따라 환호했다.
‘계속해서 여론몰이 중인가 보군.’
맹을 떠나 섬서에 도착한 지 며칠째.
출발 전에 백의문 전원에게도 섬서로 이동하라고 전해둔 상태였다.
도착은 내가 더 빨랐기에 그들을 기다리며 섬서의 분위기가 어떤지 살펴보고 있는 와중이었다.
어딜 가나 선우약가와 섬서 무림 연합회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당장 이곳에서도 마찬가지. 한데 손님 중 하나가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미 연합회 쪽으로 기울어진 민심을 더욱 확고히 다져가는 상태.
나는 기도를 숨긴 채 분위기의 중심에 서 있는 사내를 주시했다. 그는 적절한 순간에 슬쩍 몸을 빼냈고 은밀하게 객잔을 빠져나갔다.
나 역시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은밀하게 사내를 추적했다.
백의문주로서 이곳에 와 있는 만큼 가면은 물론 죽립까지 뒤집어쓴 상태.
추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는 이번에도 적당한 규모의 객잔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도 뛰어난 언변으로 분위기를 휘어잡았고 연합회 쪽에 득이 되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렇게 날이 저물고 나서야 사내는 객잔이 아닌 어느 장원으로 들어섰다.
‘매양문(每樣門)?’
혹시 사내가 월영련 쪽 인물은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는데 그건 아니었나 싶었다.
다만 매양문이라면 역시나 연합회에 가담한 문파 중 하나였다. 중소문파이긴 하지만 공동파와 인연이 깊다는 말도 들었었고.
어쩔까?
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매양문의 정문 앞으로 걸어갔다.
백의문주로서의 내 역할은 묵가후와 정천맹이 월영련의 계략을 밝혀내 선우약가의 오명을 씻어낼 수 있도록 시간을 끄는 것.
그러기 위해선 일단 선우약가가 먼저 무사해야 했다.
섬서 무림 연합회가 칼을 갈고 있고 여론까지 휘어잡았으니 당장 피바람이 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내가 할 일은 그 칼날을 부러트려 놓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칼날의 방향을 내게로 틀어놓아야 했고.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주먹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이어 가볍게 팔을 뻗자.
쾅-!
매양문의 정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