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3장 신위(2)
“봉문이라고?”
공동파의 장문인이자 섬서 무림 연합회를 이끄는 칠성검 막능제(幕能諸)가 눈살을 찌푸렸다.
연합회에 소속된 매양문이 느닷없이 봉문을 선언했다는 보고 때문이었다.
중소문파이긴 하지만 자신과 공동파와 인연이 썩 깊어 따로 이것저것 지시를 내려둔 상태.
그중 하나가 섬서의 여론을 자신들 편으로 공고히 다져두라는 거였다.
연합회가 선우약가를 공격해도 별다른 잡음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확실한 명분을 만들어두려는 심산이었다.
동시에 연합회를 구성해 발 빠르게 섬서 무림을 안정시켰다는 자신의 공로를 드높이기 위함이기도 했다.
마교의 무공에 손을 댄 선우약가를 무너트린 섬서 무림 연합회. 그 중심에 공동파가 있었다는 사실이 퍼져나간다면 자연스레 천하오주의 빈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뿐인가.
‘천마의 무공이라지.’
아직은 정확한 행방을 알 수 없는 천마의 무공 비급.
선우약가의 둘째인 선우영민이 어째서인지 입을 다물고 있어서 선우약가조차 비급을 찾는 데 애를 먹고 있다고 들었다.
선우약가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비급을 찾아 정천맹으로 돌려보내는 게 자신들의 오명을 씻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게 분명하나, 둘째라는 신분 탓에 제대로 심문하지 못하고 있는 듯싶었다.
‘선우영민이 입을 열기 전에 선우약가를 치고 비급도 확보한다.’
막능제가 원하는 건 명성과 비급 둘 모두였다. 공동파가 섬서에서 나름 명성을 떨치는 문파라고는 하지만 의가인 선우약가를 제외한 나머지 천하오주들과 비교해 봤을 땐 위세가 다소 떨어졌다.
천마의 무공이라면 공동파의 무공을 진일보시키는 데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줄 터였다.
그리고 이 모든 건 그들이 짜놓은 판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계획들이었다.
‘화월각주라고 했던가.’
선우약가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기 며칠 전쯤 자신을 화월각주라 소개한 인물이 찾아왔었다.
섬서 무림을 집어삼킬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겠다며.
처음엔 개소리라 치부해 그의 제안을 무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을 바꾸었다.
지난 세월 정파 세력의 기둥이라 불리며 무소불위의 권위를 행사하던 천하오주에 대한 불만이 알게 모르게 쌓여 있던 자신이었다.
당장 같은 지역 안에 있는 선우약가 덕에 공동파의 위명이 흐려지지 않았던가.
‘정마대전만 봐도 천하오주뿐만 아니라 정파의 수많은 무인이 희생하여 승리를 거머쥐었지요. 한데 어떻습니까? 명예와 위상은 천하오주가 모두 독차지했고 맹주의 자리마저 독고세가주가 가져갔습니다. 강호는 강호인들의 것이지, 천하오주의 것이 아닙니다.’
화월각주와 월영련.
그들은 케케묵은 강호의 기득권 세력을 무너트리기 위해 천하오주를 노리고 있다고 했다.
물론 천하오주가 무너지고 나면 놈들은 또 다른 야심을 드러낼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거라 확신했다.
그런데도 막능제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장은 그들과 한배를 탈 심산이었다. 천하오주의 몰락이라는 목적지까지만. 이후엔 그들과 다시 강호의 패권을 두고 다투게 되겠지.
그때 자신과 공동파는 천하오주의 빈자리를 대처할 존재 중 하나가 되어 그들을 밀어내고 강호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섬서 무림 연합회는 그를 위한 발판이었다. 원대한 그림의 시작인 만큼 빈틈없이 완벽해야 하는데.
“매양문에 변고라도 생긴 것이냐? 느닷없이 봉문이라니?”
막능제의 물음에 공동파의 장로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매양문주가 직접 이유를 밝혔습니다.”
“이유?”
“백의문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백의문? 막능제는 고개를 저었고 장로는 계속 말했다.
“알아본 바로는 산서에서 나름 유명한 문파라고 합니다. 문파의 세력 자체는 크지 않지만, 백의문주를 산서에서 가장 강한 고수라고 칭송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산서 따위야 섬서에 비하면……. 아무튼 그래서?”
“백의문주가 선우약가를 돕기 위해 섬서에 나타났고 매양문주를 비롯한 매양문의 무인들이 백의문주와 맞섰다가…….”
“허.”
현재 선우약가는 고립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섬서에서는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없었다.
선우약가와 오랜 인연을 맺고 있던 세력들도 중립을 표방하는 판에 대놓고 그들을 돕겠다고 나섰다?
“산서 제일의 고수라고? 놈은 지금 어디에 있나?”
막능제가 짐짓 노기 섞인 목소리로 묻자 장로는 눈을 빛냈다.
“선우약가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확한 위치는 미리 파악해 두었습니다.”
“매양문은 엄연히 연합회에 소속된 문파다. 그런 문파를 건드린 만큼 대가를 치러야겠지. 놈이 선우약가에 당도하기 전에 처리하도록.”
“예.”
막능제의 명령을 예상했다는 듯 장로는 발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
매양문을 떠나 선우약가로 출발한 지도 며칠이 지났다.
나는 다소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매양문주인 길벽산을 통해 나에 대한 소식이 제대로 퍼져나가고 있는지 확인도 할 겸.
그리고 그는 생각보다 일 처리가 빨랐다.
매양문의 봉문과 백의문주가 선우약가를 돕기 위해 섬서에 등장했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백의문주가 산서의 신흥고수 중 하나라며?”
“소문엔 태산파의 장로와 일대일로 실력을 겨뤄 쓰러트렸다고 하더군. 그 덕에 산서제일검이라 불린다던데.”
“그런 고수가 왜 선우약가를?”
“그건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그자가 매양문을 건드렸으니 연합회가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걸세.”
“쯧쯧. 그러게 왜 공적으로 지목된 선우약가를 돕겠다고 나서서는.”
물론 대부분은 머지않아 백의문주가 연합회의 손에 의해 처리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민감한 시기에 대놓고 매양문을 건드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로서는 원하는 바였기에 느긋하게 객잔 일층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를 이어갔다.
‘슬슬 나타나려나.’
선우약가로 향하는 동안 중간쯤부터 나를 미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매양문의 보고를 받은 연합회 소속의 무인들이지 싶었다.
모른 척 계속 이동하자 그들은 조금 더 대담하게 나를 뒤쫓았고 지금은 이층 난간 쪽 자리에 앉아 손님으로 위장한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그들에게서 희미한 살기마저 감지됐다.
아마도 연합회 쪽에서 나를 처리하기 위해 무언가 결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이대로 계속 이동한다면 내일쯤 선우약가에 도착할 거리이니만큼 오늘 안에 습격해올 게 분명했다.
속으로 몇 놈이나 보냈을까, 추측이나 하면서 술병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하나의 무리가 객잔 안으로 들어왔고.
“엇!”
손님 중 한 명이 흠칫 놀라는 걸 기점으로 모두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화룡도(火龍刀)!”
웅성거림은 무리의 선두에 서 있는 중년인을 가리키고 있었다.
화룡도?
나 또한 슬쩍 중년인을 쳐다봤다.
이 정도로 술렁일 정도면 섬서 땅에서는 썩 유명한 인물일 터.
화룡도라는 별호답게 등짝에 달라붙어 있는 커다란 대도의 손잡이 부분이 시뻘건 용의 아가리 형상을 띠고 있었다.
그때, 중년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시선을 마주한 순간 깨달았다. 그가 연합회에서 보내온 인물이라는 걸. 그에게서 느껴지는 적개심 덕분이기도 했다.
“화룡도라면 연합회 소속의 엄청난 고수가 아닌가? 그런 인물이 왜 이곳에…….”
뒤따르는 손님들의 중얼거림 또한 마찬가지.
더군다나 현재 내가 있는 객잔은 선우약가의 장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그런 곳에 연합회 소속의 고수인 화룡도가 나타났으니 객잔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
침 넘어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화룡도가 성큼성큼 구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님들 모두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그는 내가 앉아있는 탁자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야. 성격이 대담하구먼? 매양문을 강제로 봉문하게 만들어놓고 뻔뻔히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걸 보면.”
걸걸한 목소리가 객잔 전체를 울렸다.
그 덕에 손님들의 시선이 이번엔 내게로 꽂혔다.
화룡도 덕분에 내 정체가 단번에 까발려진 순간이었다.
“그, 그럼 저자가 백의문주?”
“그러고 보니 백의문주가 새하얀 가면을 쓰고 다닌다는 얘길 들은 것도 같은데.”
손님들이 내 정체까지 깨닫고 나자 분위기가 더욱 삭막해졌다. 좀 전까지 나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으니까.
“나, 나가는 게 좋겠네.”
“그러지. 얼른 나가세.”
눈치 빠른 몇몇 손님들은 헐레벌떡 자리를 피했다. 호기심 많은 이들은 벽 쪽으로 달라붙어 우리를 주시했다.
그사이에 나는 피식 웃으면서 반쯤 빈 술잔을 들어 올렸다.
“뭐가 그리 급해서 기어들어 왔어? 장사에 방해되게.”
“네놈이 객잔 주인도 아니거늘, 무슨 상관인가?”
“배려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놈이네. 험악한 인상만 봐도 알겠군.”
덥수룩한 수염에 얼굴을 가로지르는 일(一)자 흉터. 화룡도는 으슥한 산속에서 마주쳤다면 산적은 아닐까 의심하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외모를 걸고넘어지며 도발했음에도 화룡도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놈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말 못 할 사연이라도 있나 보군?”
“궁금한가?”
“궁금하긴 하다만, 말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곧 죽여야 할 놈인데 사연을 들어서 뭐 하나.”
“궁금함을 풀지 못한 채 죽으면 한이 될 텐데. 괜찮겠어?”
탁.
술잔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내가 기세를 피워 올렸다.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객잔 전체가 진동을 일으켰고 내 앞에 앉아 있던 화룡도는 와락 표정을 구겼다.
동시에 그를 뒤따라와 내 주위를 포위하듯 늘어서 있던 열댓 명의 무인들이 제 목줄을 움켜잡았다.
“컥!”
“커억!”
그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하나둘씩 무릎을 꿇었다.
반대로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순히 기세를 쏘아 놈들을 제압하자 상황을 지켜보던 객잔 손님들이 경악하는 게 보였다.
지켜보는 눈이 있다면 퍼뜨리는 입도 생기기 마련.
나는 저들을 통해서도 백의문주의 존재감을 알릴 심산이었다. 선우약가를 돕겠다고 나선 백의문주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함께.
그때였다.
쾅!
“이놈-!”
내 기세에 압도되어 못이 박힌 듯 자리에 앉아 있던 화룡도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도의 손잡이를 부여잡았고.
후-웅!
일도양단의 기세로 도를 내리그었다.
콰-앙!
내가 서 있던 자리 위로 내리꽂힌 도신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객잔 바닥에 깊은 구덩이를 만들어낸 위력도 위력이고, 뜨거운 열기가 사방으로 폭사해 불길을 뿜어냈다.
화룡도라는 별호가 그의 도와 함께 그가 익힌 극양의 무공을 뜻하는 거였나.
게다가 그의 도신에는 어느새 시뻘건 도강까지 피어올랐다. 그 모습이 마치 불길에 휩싸인 도를 쥐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런 그가 결연한 음성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감히 공적으로 지명된 선우약가를 도우려는 죄. 감히 섬서 무림 연합회에 대항한 죄. 오늘 네놈에게 그 두 가지 죄를 묻겠다.”
공격을 피하고자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내려앉은 나는, 덤덤히 대답했다.
“해봐. 할 수 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