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4장 의가(1)
다음 날.
나와 공손량을 필두로 한 백의문 전원이 선우약가에 도착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이었음에도 선우약가 주변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원래라면 의가로서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만큼 환자들로 방문객이 붐빌 시간대였다.
한데 지금은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선우약가의 장원을 피해 가는 느낌이었다.
“천하의 선우약가가 이 지경이라니.”
공손량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선우약가주 선우청(鮮于淸).
별호는 천의(天醫)로 하늘이 내린 의원이라 칭송받는 인물이었다.
정마대전 당시 그의 손을 거쳐 간 환자들은 단 한 명도 사망하지 않았다.
천영검대주였던 나 또한 그에게 몇 번이나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전쟁의 승리도. 천 대주의 복수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자기 몸부터 좀 돌보시오. 살아 있어야 복수도 할 수 있지 않겠소? 볼 때마다 몸 상태가 이 지경이니…….’
물론 천의에 관한 기억이라곤 온통 그런 잔소리가 전부였다.
그의 말대로 당시엔 복수심에 취해 내 몸이 망가지든 말든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
만약 천의가 없었다면 팔다리 하나쯤 불구가 된 상태로 천마와 마주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랬다면 천마를 죽이지도 못했을 테고.
그런 천의와 선우약가가 이 지경에 빠진 걸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천의 어르신 덕분에 목숨을 건진 강호인이 몇인데.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공손량의 물음에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마교와 천마. 그리고 마공을 향한 강호인들의 원망과 공포가 가시지 않았다는 거겠지.”
지난 역사 속에서 마인들의 손에 의해 죽어간 강호인들의 숫자 또한 만만치 않았다.
천의가 살려낸 이들의 숫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게 분명했고 월영련 놈들은 그 점을 파고들어 이런 계략을 꾸며냈을 터였다.
무가로 거듭나기 위해 마공에 손을 댔다.
그 소문 하나로 천하오주의 하나인 선우약가를 이 지경까지 몰아붙였으니 효과적인 계략이라 할 수 있었다. 절대 이루어져서는 안 될 계략이기도 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가자.”
“예.”
나는 선우약가의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멈추시오!”
나와 백의문이 모습을 드러내자 선우약가의 정문을 지키고 서 있는 경비 무사들이 크게 경계하고 나섰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그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를 포함해 백의문도의 숫자는 사십을 넘어갔고 모두 검을 찬 무인들이었으니까.
나는 덤덤히 그들의 말을 따랐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서자 경비 무사 중 지위가 높아 보이는 사내 하나가 우리 모두를 찬찬히 살피며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서 별다른 적대감을 느끼지 못했는지 목소리는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신분과 방문한 목적을 밝혀주시오. 혹 치료가 필요해 본가를 방문하신 거라면 당분간 환자는 받지 않으니 이해를 바라오.”
“난 백의문의 문주요. 곤란한 상황에 빠진 선우약가를 돕기 위해 찾아왔으니 가주를 뵙게 해주시오.”
“백의문?”
백의문이라는 말에 경비 무사들이 눈을 치떴다.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정녕 백의문주시란 말입니까?”
“그렇소.”
“매양문을 봉문하게 만들고 화룡도를 쓰러트린 그 백의문?”
나와 백의문에 대한 소문을 이미 전해 들었는지 경비 무사들의 태도가 금세 뒤바뀌었다. 경계감이 사라지고 표정도 환해지는 게 보였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본가를 도우러 오신 거라니.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곧장 안에 기별을 넣겠소.”
이어 사내는 순식간에 장원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문이 활짝 열리면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한 명은 아예 우리 곁으로 달려 나오기까지 했다.
우리로서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유 공… 아니, 유 문주님! 공 총관님! 홍 장로님!”
감격한 얼굴로 차례차례 우리와 인사를 나누는 그녀는 다름 아닌 선우유란이었다.
함께 태산파의 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유진휘인 내가 백의문의 문주라는 사실도 깨달은 데다가 백의문도들과도 꽤 친분이 쌓여 있었기에 그녀의 반가움은 그 누구보다 커 보였다.
그녀가 문도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나는 그녀를 지나쳐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중년인에게 다가섰다.
“선우약가주님을 뵙습니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자 다소 수척해진 얼굴의 천의가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문의 문주가 어찌 고개를 숙이시오? 더군다나 본가를 돕기 위해 귀한 걸음을 해주신 분이신데. 이리 방문해주어 정말 고맙소이다.”
내 어깨를 붙잡아 세우는 선우청의 손길에서 과거에 느꼈던 온기가 전해져오기 시작했다.
***
많은 환자를 수용해야 하는 만큼 선우약가의 장원은 크기가 남달랐다.
한데 지금은 방문객이 없는 시기여서 그 많은 건물이 텅텅 비어 있었고 덕분에 사십에 달하는 백의문도가 머무를 공간은 금세 마련됐다.
“귀한 손님들이시다. 모시는 데 예를 다하거라.”
“예.”
대접 또한 극진해서 홍야와 이자청을 비롯한 백의검대원들이 오히려 당황할 정도였다.
사파인들이었던 그들이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봤겠는가.
그것도 천하오주의 하나인 선우약가의 장원 안에서.
시비들의 안내를 받아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후 나와 공손량은 따로 선우청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그의 집무실로 이동했다. 선우유란 또한 우리를 뒤따랐다.
집무실에 도착해 다 함께 탁자에 자리를 잡았을 때.
나는 덤덤히 백색 가면을 벗어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우유란이 깜짝 놀라는 게 보였다.
“유 문주님?”
“유진휘입니다.”
“아…….”
여전히 당황하고 있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나는 다시금 선우청에게 인사를 전했다.
“백의문주이자 유씨세가의 소가주이며 지금은 복룡추호대에 소속되어 있는 유진휘라고 합니다.”
숨김없이 정체를 밝히자 선우청 또한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그는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동시에 유진휘라는 이름을 곱씹더니 이내 감격하는 표정을 지었다.
“허. 유씨세가의 소가주라면 분명…….”
“맞아요, 아버지. 소룡단의 유일한 생존자셨던 유 공자가 바로 이분이에요.”
과거 정마대전 당시 전멸을 감수하면서까지 선우약가를 지켜내고자 했던 소룡단.
유일한 생존자였던 유진휘를 치료했던 것도 선우약가와 천의 선우청이었다.
“그, 그러고 보니 정말로 그 아이가 아니더냐!”
역시나 선우청은 내 얼굴을 곧장 알아봤다. 나로서는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없었지만, 선우유란은 분명 치료를 받던 내가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었다고 했다.
“그때 왜 그리 서둘러 사라진 게야? 본가에게 은혜를 갚을 기회조차 주지 않고서 왜.”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강호와 정마대전의 승리를 위해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실 부상의 여파 때문인지 당시의 일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렇지. 유란이에게도 그렇다는 얘길 전해 들었었네. 그때의 부상이 워낙 심각했으니까.”
선우청은 내 기억엔 없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내 두 손을 맞잡았다.
“아무튼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쁘네. 꼭 한번 다시 만나 직접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네. 자네에게. 그리고 소룡단원이었던 이들에게.”
이 감사는 내가 아닌 원래의 유진휘와 소룡단원들을 위한 것이었기에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들에게 선우청의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며.
***
소룡단원이었던 유진휘가 지금은 백의문주이자 복룡추호대원으로서 정천맹주의 명령을 수행하고자 방문한 상황.
선우청으로서는 이 상황이 한없이 기쁘고 고마웠는지 대화를 나누는 내내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워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공동파를 필두로 연합을 꾸린 섬서 무림은 본가에게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있네. 무작정 선우약가를 공적으로 내몰며 몰아붙이고 있지.”
“예. 며칠 동안 분위기를 파악해 둔 상태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네와 백의문이 본가를 도우려다간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어. 이미 한차례 소룡단원으로서 본가를 구원해준 은인에게 또다시 그런 짐을 짊어지게 만들 수는 없네.”
벼랑 끝까지 몰린 상황에서도 선우청은 나와 백의문의 안위를 걱정했다.
해서 나는 먼저 그에게 모든 전말을 전해주었다.
이번 일은 월영련이라는 세력이 꾸며낸 계략이라는 점과 정천맹주 독고태문과 총군사인 묵가후가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뒤쫓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나와 백의문이 이곳에 온 것은 그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함이란 말을 들었을 때 선우청과 선우유란은 경악하면서도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론에 밀려 정천맹조차 나서지 못할 줄 알았는데,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이미 움직이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는 듯.
“섬서 무림 연합회 또한 지금은 함부로 칼을 뽑아 들 수 없을 겁니다. 저와 백의문의 존재가 부담스러울 테니 한동안은 괜찮을 겁니다.”
“그렇구나.”
선우청 또한 매양문의 봉문과 인극 고수인 화룡도가 일방적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터.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 또한 강호와 선우약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만 부담은 덜어두시죠, 가주님. 지금은 앞으로의 일을 대비하고 놈들에게 대항해야 할 때입니다.”
“…….”
내 말에 선우청이 결의를 다졌다.
그러는 사이, 공손량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가주님?”
“공 총관이라고 했나? 뭐든 물어보게.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답해줄 터이니.”
백의문의 책사이자 총관인 공손량을 소개할 때 내가 가장 신뢰하고 있는 인물 중 하나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때문에 선우청 또한 공손량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직 묵룡일원공의 비급을 찾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선우약가가 오명을 씻어내려면 가장 먼저 마공의 비급을 손수 정천맹으로 돌려보내는 게 우선이었다.
직접 마공을 익혔던 선우약가의 둘째. 선우영민이 비급의 행방을 알고 있을 테고 그런 그를 선우약가가 직접 제압해 가두어둔 상태라 비급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을 터.
“그게…….”
선우청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선우유란이 대신 대답했다.
“아무리 물어도 오라버니가 입을 열지 않고 있어요. 저희로서도 답답한 상황인 데다가 오라버니를 강압적으로 심문… 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가문을 위기에 빠트릴 정도로 큰 죄를 지었다지만 선우영민은 엄연히 직계 가족이자 현 가주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런 그에게 자신들 손으로 고문을 가해 입을 열게 만드는 건 쉽게 결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제가 직접 둘째 공자를 만나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묻자, 선우청과 선우유란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