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인 환생했다-88화 (88/150)

#88. 4장 의가(2)

선우약가의 장원에 마련된 여러 지하공동.

격리가 필요한 환자를 위해 쓰이는 공간이자 약재를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는 장소였는데, 그중 가장 깊숙하고도 은밀한 곳에 둘째인 선우영민이 갇혀 있었다.

“내공을 일절 사용하지 못하게 혈을 짚어둔 상태네. 의식은 남아 있어서 대화를 나눌 수는 있지만 도통 입을 열지 않으니…….”

일전에 동악검선이 마기에 중독되어 의지를 상실한 채 날뛰었듯, 선우영민 또한 묵룡일원공을 익혔다고 해서 마기를 쉽사리 제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한바탕 난리를 피우다가 잡혀들어 왔겠지.

정파인들이 사용하는 내공과는 궤를 달리하는 게 마공과 마기였다. 두 가지가 잘못 섞인다면 주화입마나 폭주 상태에 빠지는 게 당연했다.

선우영민 또한 그걸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비급을 어디서 구했고 그걸 왜 익혔는지조차 알아내지 못한 겁니까?”

“그 무엇도 알아내지 못했네. 그저 송구하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선우청이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도 털어놓아야 일을 해결하고 수습하든 할 게 아니냐는 얼굴이었다.

그런 그를 따라 어둑한 통로를 통과하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총군사 묵가후가 조사한 바로는 선우약가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는 시기에 맞춰 선우영민이 누군가에게 습격받는 일이 발생했다고 들었다.

문제는 선우영민이 아무도 모르게 묵룡일원공을 익히고 있었다는 거였고 하필 습격받은 장소가 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는 객잔 안이었으며, 선우영민은 마기에 취해 자신을 습격한 이들로 모자라 엄한 이들까지 공격해 소문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놈들이군.’

월영련.

그들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나 의도적으로 선우영민과 접촉해 묵룡일원공을 익히게 만든 게 분명했다.

이후 적절한 시기에 습격을 감행해 섬서의 강호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마공을 사용하게 만든 거겠지.

결국 선우영민의 입만 열게 만들 수 있으면 놈들과의 연결점을 찾을 수도 있다는 거였다.

“이곳이네.”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공동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그곳엔 쇠사슬로 사지가 속박된 채 천장에 매달려있는 선우영민이 가는 숨을 몰아쉬며 철창 안에 갇혀 있었다.

***

철컹.

철창의 문을 열고 들어간 내가 그를 올려다봤다. 지금은 다시 가면을 쓰고 있는 상태.

“백의문주라고 하오.”

간략히 인사하자 선우영민에게서 미약한 반응이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시꺼멓게 물든 두 눈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시선은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입을 열리지 않았고 나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묵룡일원공의 비급은 어디에 있소?”

“…….”

“어디서. 혹은 누군가에게 그 비급을 얻었소?”

“…….”

“마기를 감당하긴 어려울 거라 충분히 예상했을 텐데. 왜 그걸 익혔소?”

이후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으나 시선만 건네올 뿐 끝끝내 입을 열지 않는 선우영민이었다.

뒤에서 그럼 그렇지, 하는 선우청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이럴 거라 예상했다는 목소리였다.

나는 개의치 않고 잠시 선우영민의 몰골을 살폈다. 확실히 의식은 있는 것 같은데.

“이번 일로 당신의 가문. 그러니까 선우약가가 존폐의 위기에 놓였소. 그렇게 계속 입 다물고 있다간 강호에서 선우약가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말겠지.”

“…….”

“이번 일이 월영련의 계략이라는 것도 알고 있소. 놈들에게 겁박이라도 받은 것이오?”

“…….”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순간적이나마 선우영민의 고개가 움찔하는 움직임을 보였다는 걸 알아챘다.

“화월각주. 그놈인가?”

달그락.

이번엔 쇠사슬이 가늘게 진동했다.

나는 눈을 빛내며 검을 뽑았고.

번쩍!

하는 섬광이 선우영민을 옭아매고 있던 사슬들을 단번에 잘라냈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으로 추락한 선우영민에게 나는 가까이 달라붙어 검을 겨눴다.

“놈들과 연관되어 있다면 더 이상 선우약가의 일이라고만 여길 수 없지. 계속 침묵해봐. 목이 잘려 나가고 싶다면.”

뒤편에서 선우청과 선우약가의 무인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무시한 채 나는 진심으로 살기를 피워 올렸다.

“헉!”

무인들 몇 명은 내 살기를 이기지 못하고 헛숨을 들이켰고 선우청은 다급한 눈초리로 나와 선우영민을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묵묵히 검날을 선우영민의 목덜미에 바짝 가져다 댔다.

이어 잠깐의 침묵 끝에.

“…정말로 놈들 말대로 됐군.”

건조하기 그지없는 푸석한 목소리가 선우영민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

“쿨럭!”

물을 한 바가지 들이킨 선우영민이 기침과 함께 숨을 돌렸다. 동시에 생각을 정리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정말 백의문주십니까?”

“맞아.”

순순히 인정하자 선우영민은 자신의 아버지인 선우청을 한차례 올려다봤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죄송하다는 말은 이미 수없이 들었다. 그러니 얘기해 보거라. 왜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냐?”

선우청의 물음에 선우영민은 한숨과 함께 사연을 털어놨다.

“놈들과 마주친 건 화선촌(花仙村)에서였습니다.”

“화선촌이라면?”

“예. 제가 주기적으로 자선 진료를 나가던 그 촌락 말입니다.”

화선촌.

경양현 인근의 작은 촌락으로 약초 재배로 생계를 이어가는 다소 가난한 촌락이라고 했다.

선우영민에게는 어렸을 적부터 절친했던 친우가 사는 곳이기도 해서 지금껏 주기적으로 촌락에 들러 보살펴왔다고.

“그 화선촌에 몇 달 전쯤 이름 모를 무림인 한 명이 입촌했습니다. 정체는 모르지만, 묵묵히 촌락의 일을 돕거나 인근 산적들을 손쉽게 소탕하는 실력에 다들 그자를 든든한 구성원으로 인정해 주었지요.”

“정체 모를 무림인이라….”

“예. 저 역시도 처음엔 경계하긴 했으나 화선촌에 그런 무위를 지닌 강호인이 함께해 준다면 여러 위협에서 안전할 테고 몇 번의 만남 이후로는 성격도 호탕하다는 걸 깨달아 나름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얘기를 이어가는 선우영민의 표정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듯한 표정이어서 나는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자가 월영련의 인물이었나?”

“…처음엔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 저에게 비급 한 권을 건네주더군요. 선우약가의 둘째인 저라면 믿고 건넬 수 있겠다며 무공을 익혀보라고 권유했습니다.”

“그게 묵룡일원공이었고?”

“그 역시도 그땐 몰랐지요. 다만 그자가 보여준 초식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고 저 역시 의가의 자식이지만 동시에 강호인이기도 하기에 무공에 대한 갈망이 있었나 봅니다.”

선우영민은 결국 권유를 받아들였고 남들에겐 비급에 대한 사실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초반엔 비급의 수준이 생전 처음 볼 정도로 뛰어났고 성취감 또한 대단해 그게 묵룡일원공이란 걸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경지가 삼성에 도달했을 때 극심한 통증과 함께 마기의 침식이 진행됐다고 했다.

“강해지고자 하는 욕심에 눈이 멀어 신중하지 못했던 제 잘못이지요. 뒤늦게 바로잡아보려 했지만, 그자가 화선촌 사람들을 인질로 삼았습니다. 자신이 월영련에 소속된 인물이라는 사실도 그때 밝혔고 화선촌 주변을 이미 월영련의 무인들이 장악했다고 들었습니다.”

“인질이라니. 그 때문에 네가…….”

선우청은 크게 분노하는 동시에 측은한 눈빛으로 선우영민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사실을 털어놓으면 선우약가가 입은 오명을 다소 해소할 수 있지만 화선촌이 위험해진다. 즉, 선우영민은 기로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하며 괴로워하고 있었을 터였다.

“한데 지금 이 사실을 털어놓는 이유는?”

화선촌을 위해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내 앞에선 입을 열었다.

의아함에 묻자, 그는 내가 쓰고 있는 백색 가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놈들이 한 가지 상황 앞에선 예외를 두더군요. 유씨세가의 소가주. 혹은 백의문주. 두 사람 중 누구든 섬서에 나타나 비급의 행방을 찾거나 선우약가를 도우려고 할 때. 그때는 사실을 털어놓으라고요.”

“나를?”

“비급은 화선촌에 있으니, 찾으러 오려거든 직접 나서라고…….”

***

산서에서의 일을 시작으로 태산파까지 이어진 금월보의 계략을 저지한 게 나와 백의문주였다.

정천맹에서는 한천자를 몰아냈고 화월각주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였다가 월영련주와 직접 마주쳤다.

놈들로서는 나와 백의문주를 더 이상 눈엣가시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걸림돌로 여기고 있을 터였다.

동시에 그런 내가 이번 일에도 나설 거라 예상했는지 비급으로 유인해 나를 확실하게 처리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듯싶었다.

대놓고 초대할 정도면 단순한 함정이나 대비 정도가 아니겠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게 분명한 데다가 나 이외에 정천맹이나 선우약가 쪽에서 화선촌으로 향하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촌락 사람들을 몰살시키겠다는 경고까지 덧붙였다.

그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쯤 놈들은 백의문주와 백의문이 섬서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을 터.

“다녀오겠습니다.”

“…정말로 혼자서 나서겠다고?”

선우청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대놓고 놈들의 함정에 빠져야 하는 상황이니 말려야 하나 싶다가도 화선촌의 인질들과 비급을 생각하면 말릴 수가 없는 상황일 테니.

“제가 없는 사이에 연합회 쪽에서 움직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저들이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홍야와 공손량. 이자청과 사십에 달하는 백의검대원들.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들이라면 연합회가 작정하고 전력으로 나서지 않는 이상 선우약가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이거라도 챙겨가거라. 큰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행여 위험한 상황이다 싶으면 지체 없이 돌아와야 한다.”

선우청이 내게 선우약가에서만 제조되는 금창약과 내상약 등을 건네주었다. 일견하기에도 최상급에 달하는 약재들이었다.

나는 덤덤히 그것들을 챙겨 넣었고 한차례 나를 바라보는 인원들과 시선을 교환한 뒤 선우약가를 나섰다.

그때.

“조심하세요.”

선우유란이 내 소맷자락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를 건네왔다.

나는 그녀에게도 고개를 끄덕여준 다음 화선촌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

“슬슬 나타나겠군.”

화월각주가 산등성이 위에서 화선촌 전체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유씨세가 소가주와 백의문주.

섬서에 나타난 인물이 전자이길 바랐지만 아쉽게도 후자였다.

하지만 그동안의 정황을 살펴볼 때 두 놈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게 옳았고 그렇다는 건 어느 쪽이든 하나를 처리하면 나머지 하나 또한 자연히 나서게 될 게 당연했다.

“백의문주를 처리하고 나면. 유진휘. 네놈 역시 금방 멱을 따주마.”

일전에 놈에게 당한 상처가 아직도 욱신거리고 있었다. 련주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미 저세상을 활보하고 있었을 거란 생각에 쉽게 분이 가시지 않았다.

화월각주가 이를 가는 사이에, 그의 옆으로 인영 하나가 내려섰다.

몸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달라붙는 무복을 입고 있는 여인이었다.

“왔나? 수월림주(水月林主).”

“…….”

얼굴의 반을 감싸는 복면 덕에 입이라도 잠겼는지 그녀는 말이 없었다.

화월각주는 익숙하다는 듯 쯧,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백의문주 또한 유가의 소가주만큼이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니 준비에 만전을 가하도록.”

그 말에 여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이어 그녀의 시선이 화월각주를 흘겼다.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듯한 눈초리였다.

“흠흠. 명령이 아니라 충고네. 충고.”

화월각주가 헛기침과 함께 목을 쓰다듬자 여인은 잠시 더 노려보는 눈빛을 보내다가 연기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 위를 응시하던 화월각주로서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개 같은 년.’

실력 면에서나 련주가 보내는 신뢰의 크기로서나 자신이 밀리기에 할 수 있는 거라곤 속으로 욕이나 지껄이는 게 다였다.

물론 그런 그녀가 자신과 함께였기에 화선촌이 백의문주의 묫자리가 될 거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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