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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인 환생했다-89화 (89/150)

#89. 4장 의가(3)

섬서 무림 연합회주 막능제가 밤늦게 전해진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화월각주가 보내온 서찰이었고 내용은 길지 않았다.

‘백의문주를 처리해 주겠다고?’

자신과 월영련이 나서서 백의문주를 처리할 테니 더는 지체하지 말고 선우약가를 공격하라는 말이었다.

연합회로서는 희소식.

안 그래도 느닷없이 나타난 백의문과 백의문주의 존재가 부담스럽던 참이었다. 놈들로 인해 상황이 어영부영 진척되지 못하고 있었다.

화룡도를 쓰러트린 백의문의 장로와 백의문의 무인들 역시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걸 부정할 순 없지만, 그 정도는 감당할 만했다.

공동파를 비롯해 내로라하는 섬서의 문파와 무가들이 자신을 따르고 있으니까.

화룡도 같은 인극 고수의 숫자만 해도 자신을 포함하면 네 명이었다.

그 밑으로 절정에 달하는 고수가 대략 백. 일류 이하의 무인들까지 합치면…….

“서량(西凉).”

막능제의 부름에 장년인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예, 장문인.”

공동파의 장로 중 하나이자 연합회의 부회주 직을 겸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연합회에 소속된 문파와 가문들에게 연락을 넣게. 사흘 내로 경양현에 집결하라고.”

“선우약가를 밀어버리는 겁니까?”

“더는 시간을 끌 필요가 없겠지.”

“백의문에 대한 조사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상관없다. 선우약가에 백의문주는 없을 게야.”

“…알겠습니다.”

따로 조치라도 취해두었나 싶었지만, 서량은 캐묻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여기서 더 시간을 끌다간 일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

백의문의 등장으로 선우약가를 옹호하는 여론이 조금이나마 생겨나고 있지 않은가.

실상 선우약가에 대한 소문이 누명이라는 건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는 순간 밝혀질 사실이었다. 그걸 저지하고자 여론을 조작하고 발 빠르게 연합회를 구성해 선우약가를 몰아붙였다.

‘선우약가가 사라진다면 공동파가 섬서 제일. 아니, 나아가 천하오주의 빈자리를 꿰찰 수 있다.’

그를 위해 눈과 귀를 막고 지금껏 막능제를 따라온 것이다. 공동파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죄책감 따위는 느낄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면서.

***

화선촌은 그리 멀지 않았다.

내 기준에선 선우약가를 벗어나 꼬박 반나절을 내달리면 도착할 거리였다.

다만 나는 곧장 화선촌으로 향하지 않았고 그 주변을 은밀하게 맴돌며 상황을 살폈다.

삼면이 산등성이로 둘러싸여 있는 촌락인지라 무턱대고 진입했다간 놈들이 파놓은 함정이나 기습에 무방비로 당하기 딱 좋은 지형이었다.

물론 그걸 두려워하는 건 아니었다.

마음에 걸리는 건 인질로 잡혀 있다는 화선촌의 사람들.

오감을 최대한 끌어올려 살펴본 바로 화선촌을 중앙에 두고 동서남북 사방에 월영련의 무인들이 촘촘히 깔려 있었다. 놈들 역시 최대한 기척을 숨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내 오감을 속일 순 없었다.

화선촌 사람들만 아니었다면 함정이든 기습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쳐들어갔을 텐데.

‘인질들의 목숨까지 신경 써서 싸우다간 난처한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다.’

화월각주.

그놈 또한 인질을 이용하려고 이런 판을 깔아 자신을 초대했을 터였다.

‘이걸 써볼까.’

잠시 고민에 빠졌던 나는 품속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물 샐 틈 없게 밀봉된 상자였다.

인피면구(人皮面具).

장인의 손길을 빌어야만 제작되는 인피면구는 그 가치가 수만 냥에서 수십만 냥까지 다양했다. 정천맹에도 인피면구는 스무 장 내외가 전부였다.

그중에서도 고수들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수준의 인피면구는 다섯 장. 게다가 통상 인피면구는 전부 일회성이었다.

그만큼 귀한 물건이지만 독고태문은 그중 하나를 거리낌 없이 내주었다.

언제고 쓸 때가 있을 테니 하나쯤 지참해 두라고.

그때가 지금인 듯싶어서 나는 가면을 벗고 상자를 개봉했다.

특수한 처리라도 해둔 건지 새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그 밑으로 가죽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별은 남자. 나이대는 대략 삼십 초반. 저잣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용모.

순식간에 나는 그런 사내의 모습으로 탈바꿈됐다.

굳이 복장까지 바꿀 필요는 없어 보였다. 다만 허리춤에 찬 두 자루의 검을 인근 숲에 묻어두었다.

십수 년 만에 고향인 화선촌으로 돌아온 사람을 연기하기에 두 자루의 검은 너무 눈에 띄었으니까.

***

다그닥. 다그닥.

등짝에 짐을 실은 나귀 한 마리가 골짜기를 가로질렀다. 나귀를 이끄는 사내 역시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감회가 새롭다는 눈빛으로 주변 경치를 둘러보며 여유롭게 거닐던 사내는 순간 기절초풍하여 나자빠졌다.

“허억!”

땅에서 솟아난 건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모를 인영 두 개가 난데없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복면을 뒤집어쓰고 허리춤에 검을 찬 모양새에 짙은 살기마저 느껴져서 사내는 울상을 지었다.

“사, 살려주시오. 다, 달라는 건 뭐든 내놓겠소. 부디 목숨만은…….”

산적인가 싶어 사내는 후다닥 나귀에 실린 짐짝을 가리켰다.

두 명의 무인은 별다른 반응 없이 사내를 노려보다가 나직이 물어왔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발을 들였지?”

“그게 무슨…….”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무인 중 하나가 반쯤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하는 서슬 퍼런 소리에 사내는 냉큼 고개를 조아렸다.

“화, 화선촌은 제 고향이오. 돈을 벌러 외지를 돌아다니다 십 년 만에 돌아오는 길이지요. 적잖은 돈을 벌어온 참이라 살려만 주신다면…….”

사내가 슬쩍 짐짝을 열어 은자가 담긴 주머니를 내보였다.

한데 무인들은 딱히 재물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다만 잠시 고민하는 듯 저들끼리 속삭이듯 대화를 나누었다.

‘그냥 없애버리는 게…….’

‘화선촌 사람이라니 그냥 끌고 가는 게 나을지도……. 백의문주가 나타날 때까진 쥐 죽은 듯 대기하고 있으라는 명령이니만큼 굳이 피 냄새를 풍기기엔…….’

귀를 열고 무인들의 속삭임을 엿듣던 사내가 다시금 쏘아지는 시선에 움찔 놀라 움츠러들었다.

이어 침을 꿀꺽이며 바닥에 달라붙어 운명이 결정지어지길 기다렸다.

잠깐의 침묵 끝에 무인 하나가 반쯤 뽑아 든 검을 되돌렸다.

“따라와라. 허튼짓을 벌였다간 목이 달아날 줄 알고.”

“예? 어디로 따라오라는 말씀이신지?”

“그냥 죽여줘?”

“아, 아니오. 따라가겠소. 따라가야지요.”

사내가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고 무인은 그런 사내의 양손을 낚아챈 뒤 등 뒤로 꺾어 빠르게 포박했다.

이후 골짜기를 따라 계속 이동하니 마침내 화선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견하기엔 평범한 촌락의 모습이었으나 위화감이 들 정도로 고요했다.

사내는 무인의 거친 손길을 따라 촌락의 가장 안쪽으로 끌려들어 갔다.

“앗!”

사내는 순간 흠칫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요함의 원인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촌락 사람들 모두가 두 개의 건물 양쪽에 반씩 나뉘어 감금되어 있었다.

동시에 두 건물 주변에는 여러 개의 천막이 포위망을 형성하듯 둘러쳐진 상태였다.

사내는 그 중 가장 커다란 천막 안으로 내던져졌다.

사내가 바닥을 구르는 사이, 탁자 위에 앉아 있던 중년인이 눈을 빛냈다.

“뭐지?”

벌레 쳐다보듯 하는 중년인의 눈빛에 사내는 고개를 숙였고 그런 사내를 끌고 온 무인은 차분히 보고를 올렸다.

“이곳으로 이어지는 골짜기 입구에서 발견한 놈입니다. 화선촌이 고향이며 십 년 만에 돌아오는 길이라고 하더군요. 괜히 소란을 피우는 것 같아 일단 죽이지 않고 끌고 왔습니다.”

무인의 보고에 중년인은 잠시 사내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적당히 가둬놔.”

“예, 화월각주님.”

“백의문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연락책의 보고에 따르면 전날에 놈이 선우약가를 떠난 것으로 파악됐다고 하니 곧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놈이 나타나면 밀리는 척 중앙으로 유인한 뒤 곧장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형성해야 한다. 이후 인질을 앞세워 놈의 기세를 꺾고…….”

다시 한번 작전을 상기시키는 화월각주의 목소리에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빛냈다.

***

파팟!

“큭.”

근력을 제한하고 내공 또한 사용하지 못하게 혈을 짚인 사내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무인은 그런 사내를 이끌고 촌락 사람들이 갇혀 있는 건물 쪽으로 이동했다.

“이곳이 고향이라고 했으니 너를 알아보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겠지?”

적당히 가둬두라고는 했지만, 무인은 나름대로 확인 절차를 밟아야겠다고 판단했는지 사내를 앞세운 채 소리쳤다.

“이놈을 알아보는 이가 있나?”

무인의 외침에 건물 안에 갇혀 힘없이 나뒹굴고 있던 촌락 사람들이 하나둘씩 시선을 던졌다.

사내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던 촌락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내저었다.

“흠.”

촌락 사람들을 구속해둔 건물은 총 두 곳이었는지라 무인은 사내를 이끌고 나머지 건물에 도착해 똑같이 소리쳤다.

“이 촌락이 자기 고향이라고 떠들던 놈이다. 이놈을 알아보는 이가 있나? 만약 없다면…….”

누구도 알아보는 이가 없다면 그대로 죽여버릴 심산이었는지 무인의 목소리에서 섬뜩한 살기가 묻어나왔다.

그리고 이 건물에서조차 사내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새끼가 거짓…….”

무인이 분노하며 사내의 멱살을 움켜쥔 채 검을 뽑으려던 찰나였다.

“태평이가 아니냐?”

건물 내부의 구석 진 곳에서 누군가가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뭐야?”

무인이 멋쩍어하는 사이에 사내를 향해 소리쳤던 누군가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제가 이 자를 압니다. 태평이라고, 오래전에 화선촌을 떠났던…….”

“그래? 그럼 됐고.”

퍽!

무인은 사내를 짐짝처럼 건물 안쪽으로 내던진 뒤 볼일 다 봤다는 듯 자리를 떠났다.

무인이 사라지고 나서도 장내에는 한참이나 침묵이 이어졌다.

이내.

“태평이는 대체 누굽니까?”

사내는 피식 웃으면서 자신을 알아봐 준 인물을 돌아봤다.

***

감상중(甘尙中).

선우영민의 친우이자 인피면구를 뒤집어쓴 나를 태평이라 부르며 신분을 증명해준 인물이 바로 그였다.

“상황이 다급해 보여 되는 대로 지껄여봤습니다. 한데 누구십니까? 화선촌이 고향이라니. 어릴 적부터 이곳에서 살아온 저로서는…….”

“선우약가의 둘째 공자를 통해 이곳 상황을 전해 듣고 찾아왔습니다.”

“여, 영민이에게 말입니까?”

나는 감상중에게 적당히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썩 머리가 좋은 인물이었는지 금세 상황을 이해했다.

“그렇군요. 하면 영민이와 선우약가는 무사한 겁니까?”

“당장은요.”

선우약가가 확실하게 무사해지려면 이곳에서 화선촌 사람들을 구해내고 비급을 되찾는 게 우선이었다.

묵룡일원공의 비급을 정천맹으로 돌려보내고, 화선촌 사람들이 증인으로서 선우약가의 오명을 씻겨내 준다면.

“하, 하지만 문주님까지 이곳에 잡혀들어 왔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감삼중은 내 양팔과 양다리를 포박하고 있는 밧줄을 쳐다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자신들처럼 혈까지 짚여 힘도 제대로 못 쓸 게 아니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 이거요?”

나는 덤덤한 미소와 함께 몸에 힘을 주었다. 동시에 내공을 끌어올리자 몸을 일주천 한 내공이 혈을 원상 복귀시켰고 밧줄 또한 힘없이 끊어져 나갔다.

“헉!”

그러자 감상중이 깜짝 놀랐다가 냉큼 입을 틀어막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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