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5장 성명(1)
무사히 화선촌으로 숨어들어 선우영민의 친우인 감상중을 만났으니 일차적인 작전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더욱이 감상중은 예상보다 냉철하고 현명한 인물이었다.
“화선촌 사람들의 숫자는 정확히 팔십. 놈들이 본보기랍시고 죽인… 이들을 제외하고 남은 숫자입니다.”
인질들을 장악할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이 바로 그거였다. 본보기로 몇 명을 죽이면 남은 이들은 알아서 고분고분해질 수밖에 없었다.
감상중은 분노를 곱씹으며 계속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화선촌 전체를 감시하는 무인들은 대략 삼십여 명입니다. 열다섯씩 밤낮으로 교대하는 것 같습니다. 놈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듯한 인물은 시시각각 화선촌을 들락거리고 있지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였는데 자세히는…….”
인질로 잡혀 있는 와중에도 감상중은 촌락의 상황을 어느 정도 주시하고 있었던 듯싶었다.
그가 말한 수장이란 인물은 화월각주.
틈나는 대로 화선촌 주변을 순찰하며 백의문주인 내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화선촌의 삼면을 둘러싼 산등성이. 그 전체에 촘촘히 퍼져 있는 월영련의 무인들은 천라지망의 구성원들일 터.
그 숫자가 어림잡아 이백에 달했으니 화월각주가 제대로 마음을 먹었구나 싶었다.
물론 그 정도에 당할 내가 아니었다.
전생의 무공을 회복한 마당에 천마에 버금가는 고수가 이곳에 있지 않다면 낭패를 보는 건 놈들이 될 것이다.
그런 고수라 할 수 있는 월영련주는 검신 영감을 뒤쫓고 있을 테니 거리낄 게 없었다.
다만 역시나 인질들이 문제였다.
“최대한 은밀히 촌락을 빠져나갈 길 같은 건 없습니까?”
내가 묻자 감상중은 잠시 고심에 빠졌다가 대답했다.
“은밀이라 해봤자 산등성이를 올라 넘어가는 게 다입니다. 없다고 보는 게 맞지요.”
“이곳의 감시를 피해 촌락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쨌든 산등성이 쪽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말씀인 거죠?”
“예.”
화선촌으로 이어지는 입구라 할 수 있는 골짜기. 그 외에 삼면은 산등성이로 둘러싸인 형세.
그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월영련 놈들이 노리는 건 나였으니….
“제가 놈들의 이목을 제대로 끌어준다면 가능하겠습니까?”
“예?”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백의문주이고, 놈들이 노리는 게 바로 저를 죽이는 겁니다. 그걸 위해 저를 이곳으로 유인했다시피 한 거고요.”
“하지만 문주님 혼자서 놈들을 상대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저희도 함께 싸우겠습니다. 저를 포함해 촌락 사람 중에도 나름 무공을 익힌 이들이 있으니…….”
“감 대인께서는 그런 이들과 함께 촌락 사람들을 이끌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 힘써주십시오.”
“예? 거기다 대인이라니. 과한 호칭입니다.”
촌락 사람들이 촌장 다음으로 의지하는 게 감상중이라고 들었다. 충분히 대인이라 칭할 만한 인물이었기에 나는 계속 그렇게 칭했다.
“어쨌든 감시를 피하려면 어느 정도나마 몸을 숨길 곳이 있어야 할 텐데. 촌락에 그런 장소는 없습니까?”
“문주께서 저들의 이목을 끌 동안 저희가 잠시 숨어 있을 만한 장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감상중은 건물의 창가 너머를 내다봤다.
그곳은 촌락 사람들의 나머지 반이 갇혀 있는 반대편 건물이었다.
“저 건물은 원래 촌장님이 기거하시는 거처입니다. 저 건물 지하에 촌락의 공동 재산과 기금을 보관하는 창고가 하나 있는데 유사시엔 피난처로 쓰이기도 합니다. 아직 놈들에겐 발견되지 않은 곳이기도 하고요.”
월영련 놈들이 노리는 게 이런 작은 촌락의 재물 따위가 아니었으니 큰 관심은 없었을 터. 덕분에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듯싶었다.
“그럼 일단 여기 있는 인원들과 함께 저쪽 건물로 넘어가는 게 우선이겠습니다. 자연스럽게요.”
“예. 하지만 어떻게…….”
감상중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눈을 빛내며 저물어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
야심한 시각.
감상중의 말대로 인질들을 감시하는 무인들이 교대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잠깐의 어수선함을 틈타 나는 건물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내공을 끌어올렸다.
화륵!
이어 손가락 위로 이글거리는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 극양의 무공을 익힌 게 아닌 이상 지극의 경지에 올라야만 발휘할 수 있는 삼매진화(三昧眞火)의 수법이었다.
쉭!
화염을 발출시키자 건물 기둥에 달라붙은 불길이 점차 몸집을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일층 입구 쪽에 서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감상중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부, 불이다!”
다급한 음성이 터져 나오는 걸 시작으로 사십에 달하는 인원들이 뒤따라 소리치며 허겁지겁 건물 밖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전부 의도된 행동이었고 인원들은 살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자연스럽게 연기를 이어갔다.
나 역시 일 층으로 내려가 인원 틈에 섞여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연기했다.
“뭐, 뭐야!”
“뭐 하는 짓들이냐!”
인원들이 일거에 건물 밖으로 뛰쳐나가자 월영련의 무인들 또한 당황스러워하는 게 보였다.
이어 그들은 점점 불길이 번져가는 건물을 올려다봤고 즉각 상황을 정리해 나갔다.
목조건물인 데다가 봄이 다가오는 건조한 계절의 날씨 덕에 불길은 순식간에 건물을 집어삼켰다.
계속 놔두면 촌락 전체로 번져나갈 게 분명했기에 무인들은 각자 검기를 쏟아내 건물을 무너트린 뒤 검풍을 뿜어내 불길을 잠재웠다.
그것만 봐도 놈들의 실력이 어중이떠중이들은 아니란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야밤에 웬 소란이냐?”
귀에 익은 목소리와 함께 천막 안에서 화월각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수하의 보고와 함께 주변을 둘러보더니 쯧, 혀를 찼다.
“등잔이라도 엎어졌나 보군.”
“예. 저들은 그냥 한 건물에 가둬놓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머지않아 백의문주가 나타날 때니 며칠 정도는 상관없겠지.”
건물 두 군데에 인원을 나눈 건 최소한 백의문주인 내가 나타날 때까지 인질이 살아 있어야 하기에 나름 배려를 한 것일 터.
인질로서의 효용이 다하면 어차피 죽여버릴 이들이니만큼 화월각주는 더 이상의 배려 따윈 필요 없다며 관심을 끊었다.
“전부 들었지? 저쪽 건물로 알아서 기어들어 가라.”
화월각주가 다시 천막 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무인들이 인원들을 한 건물로 몰아 가두는 걸 보면서 나는 나직이 미소를 지었다.
***
팔십에 달하는 화선촌 사람들이 한 건물 안에 모이자 다소 비좁긴 했으나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선 불편하더라도 함께 모여 있는 게 마음이 편할 테니까.
그중에서도 감상중은 가장 먼저 촌장을 찾았다.
“촌장님!”
“아니. 상중아. 이게 어찌 된 일이냐?”
희끗희끗하게 센 머리의 노인 역시 감상중을 마주하곤 표정이 밝아졌다.
이어 감상중은 촌장에게 나를 소개함과 함께 자초지종을 털어놨고 촌장은 감격에 달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고작 이런 촌락을 구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숨어들었단 말이오?”
“고작이라뇨. 그리고 화선촌은 저와 선우약가. 그리고 저놈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 덕에 애먼 피해를 보고 있는 것뿐입니다. 당연히 와야지요.”
말 그대로 경전하사(鯨戰蝦死).
선우영민을 겁박하고 나를 유인하기 위해 엄한 화선촌 사람들이 피해를 본 것이니 책임감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이후 나는 은밀하게 촌락 사람들의 포박을 끊고 제압되어 있던 혈도를 모두 풀어주었다.
그런 다음 촌장과 감상중에게 인원을 이끌어 지하 공간으로 숨어들게 했다.
“저는 지금부터 이곳을 감시하는 무인들을 제압하고 화선촌 주변에 퍼져 있는 모든 놈들의 이목을 제게 집중시킬 겁니다. 그리고 최대한 동쪽 산등성이 쪽으로 놈들을 끌고 가겠습니다. 촌장님과 감대인께선 지하 창고에서 반나절 이상 숨어 계시다가 적절한 시기에 빠져나와 서쪽 지역으로 벗어나십시오.”
“알겠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결의에 찬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동시에 나에게 염려와 감사의 눈빛을 보내왔다.
나는 덤덤히 그들의 시선을 건네받으면서.
쫘악!
뒤집어쓰고 있던 인피면구를 찢어버렸다.
***
콰득!
목이 직각으로 꺾이면서 절명한 시체가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시체를 붙잡아 한쪽 구석에 눕혀두었다.
‘이걸로 건물 주변의 경계를 서는 놈들은 끝났고.’
정확히 여섯 놈을 은밀하게 처리하고 났을 때, 감상중을 비롯한 촌락 사람들 역시 모두 지하 창고로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지하 창고로 이어지는 입구를 살폈다.
커다란 의장을 밀어내면 입구가 드러나는 형식이어서 의장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뒤 주변에 간단한 기문진(奇門陣)을 설치했다.
천영검대주 시절 익혀둔 것이자 은신처 주변에 펼쳐두는 용도로 사용했던 진법이었다.
사람의 기척을 지우고 기문진이 펼쳐진 공간을 주변 사물과 동화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게 만드는 진법.
이 정도면 작정하고 수색하지 않는 이상 지하 창고의 입구를 찾기란 요원할 터였다.
이제 남은 건 계획대로…….
나는 백색 가면을 쓴 다음 건물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더는 인질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마음 놓고 눈에 보이는 적들을 처리해나갈 생각이었다.
쿵!
내공을 끌어올리며 기세를 뿜어내자 한차례 진동이 화선촌 전체를 휩쓸었다.
그러자 곧장 반응이 보였다.
“엇!”
“배, 백의문주입니다!”
무인 하나가 근처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나를 발견하곤 고함과 함께 호각을 불었다.
신호가 울리자마자 적들이 사방에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고.
“네, 네놈이 언제 여기까지…….”
놈들은 하나같이 내가 화선촌 내부에서 모습을 드러낸 데 대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피식하는 조소와 함께 놈들을 둘러봤다.
“당황스럽나?”
“저 새끼가-!”
얕은 도발에 걸려든 무인 하나가 단숨에 검을 뽑아 달려들어 왔다.
쉭!
나는 가볍게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해낸 뒤 일자로 뻗은 놈의 팔을 내 양팔로 휘감아 단숨에 꺾었다.
콰직!
“끄악!”
팔이 부러진 놈은 비명과 함께 검을 놓쳤고 나는 검을 낚아채 그대로 놈의 목을 향해 세로로 그었다.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핏물이 치솟아 오르면서 잘려 나간 머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섣불리 덤비지 마라!”
“진을 펼치고 침착하게 상대해라!”
“너는 가서 화월각주님께…….”
일검에 목이 달아난 놈을 시작으로 나머지도 줄줄이 뒤따라 달려들 줄 알았는데 대응이 썩 침착했다.
물론 내 눈에는 그마저도 가소로워 보였다.
놈들이 진을 펼치기 위해 제자리를 찾아가기 전에.
우웅!
내공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제사초식 진광결인(振光結刃)을 펼쳤다.
무형의 검강을 발출시키는 초식이어서 놈들 눈에는 내가 그저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두른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촤아악!
보이지 않는 기운이 내 시야를 반으로 갈랐다. 그 궤적에 걸린 놈들 역시 몸통이 반으로 잘려 나가 피와 내장을 쏟아내고 있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숫자는 고작 다섯.
놈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 꿈쩍도 하지 못했다.
그런 놈들에게 묵묵히 다가가 마무리를 지으려 할 때였다.
“백의문주-!”
커다란 일갈과 함께 화월각주가 허공을 격하고 날아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놈의 뒤로 다시 수십 명에 달하는 월영련의 무인들이 속속 내려앉기 시작했고 다시 화선촌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의 지역에서 붉은 신호탄이 하늘 위로 쏘아졌다.
내 등장과 천라지망의 개진을 알리는 신호탄인 듯싶었다.
예상대로 화월각주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게 보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쥐새끼처럼 숨어들어올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오히려 네 명줄을 재촉하는 꼴이 되었구나.”
“그런가? 왜? 천라지망이라도 준비해 두었나 보지?”
“…….”
“천라지망도 모자라 인질까지 잡아뒀던데. 물론 그들을 먼저 빼내기 위해 잠입한 거였지만.”
내가 웃자 화월각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네놈이?”
그가 의심의 눈초리로 나와 인질들이 갇혀 있던 건물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어 월영련의 무인 중 하나가 냉큼 건물 안을 들어갔다 나왔다.
“이, 인질들이 사라졌습니다!”
지하 창고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놈들로서는 하릴없이 내 말이 사실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