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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인 환생했다-91화 (91/150)

#91. 5장 성명(2)

화선촌의 인질들이 사라졌다는 건 화월각주가 준비한 두 가지 패 중에서 한 가지가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역시나 날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화월각주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리는 게 보였다.

“한 사람을 상대로 천라지망도 모자라 구차하게 인질까지. 월영련은 원래 그런 족속들이 모여 만들어진 세력인가? 실력이 모자라 매번 음모나 계략을 꾸며야만 하는.”

조소와 함께 도발하자 화월각주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자존심도 상했을 테고 팔십에 달하는 인질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어지러울 터였다.

그걸 노린 도발이었다. 냉정함을 되찾지 못하게. 분노로 인해 인질을 향한 관심을 지워버리도록.

“…이 빌어먹을 새끼가. 감히 본련을 모욕해?”

의도대로 화월각주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채 살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월영련의 무인들도 마찬가지.

놈들은 점차 포위망을 좁혀오며 각자 검을 뽑아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전장은 이곳이 아니었다. 화선촌 사람들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만들려면.

파앙!

나는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화살처럼 쏘았다.

적잖은 내공을 실었는지라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기세가 내 눈에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푸푸푸푹!

일직선으로 쏘아진 검은 네 명의 무인들을 꿰뚫었고 그걸로도 모자라 다시 후방에 서 있던 두 명의 무인들을 꼬치처럼 꿴 채 거목 위에 틀어박혔다.

이어 놈들이 깜짝 놀라는 사이에 나는 괘월선보를 발휘해 자리에서 이탈했다.

엇! 하는 탄성과 함께 놈들이 연기처럼 사라진 내 기척을 뒤쫓았다.

“저쪽이다!”

“놈이 빠져나간다!”

“쫓아라!”

“동쪽이다! 신호탄을 쏴!”

화월각주를 필두로 모든 이들이 내가 날아간 방향으로 추격해 왔다.

더불어 계속해서 동쪽 지역의 산등성이로 이동하자 정면에서도 적들의 기세가 느껴졌다.

아니. 정면뿐만 아니라 전후좌우 그 모든 방위를 놈들이 뒤덮은 상태였다.

나 하나를 노리고 펼쳐진 천라지망.

발버둥 칠수록 더욱 옥죄어져 오는 거미줄처럼 놈들의 포위망 역시 점점 두터워지고 정교해졌다.

팟!

“죽어라!”

달려가는 와중에, 수풀 속에서 기습이 터져 나왔다.

심장을 노리고 날아드는 검을 쳐낸 뒤 놈의 안면에 주먹을 쑤셔박았다.

퍽!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터져나가는 머리. 이어 힘없이 허물어지는 시체를 뒤로하고 나는 다시 내달렸다.

쐐엑!

이번엔 공중에서 신형이 튀어나왔다.

거목 위에 은신해 있었는지 놈은 내 정수리를 노리고 검을 내리찍었다.

몸을 비틀자 놈의 공격은 정수리 대신 애꿎은 바닥에 틀어박혔고 나는 그런 놈의 목을 양팔로 휘감아 비틀었다.

콰득!

이백에 달하는 무인들로 이루어진 천라지망이니만큼 싸움은 장기전이 될 게 뻔했다.

해서 나는 최대한 내력을 조절하기 위해 내공의 소모가 크지 않은 사신무를 사용했다.

퍽!

“커억!”

콰드득!

“끄륵!”

콰직!

“끄아악!”

기습을 가해오는 적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내가 이동하는 경로 위로 쌓여가는 시체의 숫자도 계속 늘어났다.

하지만 이동하는 속도는 줄지 않았다.

회피와 동시에 반격하는 공방일체의 수법 덕분이었다.

그렇게 동쪽 산등성이의 끝자락에 도착했을 때 내 손에 죽어 나간 무인들의 숫자가 오십을 넘어섰다.

“후우.”

이 정도면 일단 화선촌에선 충분히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숨을 돌리고자 잠시 멈추어 섰다. 남은 내공은 어느 정도인지와 몸 상태도 점검했다. 전신이 피로 붉게 물들고 양손에서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내가 입은 상처는 없었다.

타닥. 탁. 탁.

그러는 사이에 다시금 내 주변으로 적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천라지망이 무서운 건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쓸수록 포위망이 더욱 견고해지고 집요해진다는 데 있었다.

압도적인 숫자와 유기적인 움직임으로 적을 지칠 때까지 몰아간다.

어디로 이동하든 사방에 적이 포진해 있기에 시간이 갈수록 압박감과 공포감이 몸에 새겨진다.

그렇게 체력과 정신력이 깎여나가다가 무력감을 느끼며 목숨을 내줄 수밖에 없는 게 천라지망이었다.

하지만 나는 웃었다.

오십이 줄어들어 이제는 백오십가량이 남은 월영련의 무인들과 화월각주. 고작 그 숫자로는 내게 무력감을 심어주기에도, 내 체력과 내공을 갉아먹기에도 부족했다.

맹수를 상대로 거미줄을 쳐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 기세를 느꼈는지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적들은 쉽사리 덤벼들지 못했다.

“뭣들 하느냐!”

그때 화월각주가 등장해 수하들의 긴장감을 덜어주었다.

“고작 한 놈이다! 쉬지 말고 몰아붙여라! 아주 작은 상처라도 좋다. 죽이지 못하겠다면 목숨을 걸고 놈의 몸을 베어라. 상처를 쌓고 피를 흘리게 만들어라. 그러다보면 지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놈 역시 결국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내공이 실린 화월각주의 고함에 월영련의 무인들은 하나둘씩 내게 쇄도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

“이런…….”

선우약가주 선우청이 침음을 흘렸다. 화선촌으로 향한 유진휘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예기치도 못한 소식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연합회주인 칠성검과 공동파를 비롯해 섬서 무림 연합회 모두가 경양현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놈들이 결국 칼을 빼 드는구나.”

둘째인 선우영민이 마침내 입을 열었고 유진휘가 묵룡일원공의 비급과 화선촌 사람들을 구해내고자 나섰으니 일이 잘 해결되리라 여기고 있었다.

한데 공교롭게도 유진휘가 선우약가를 벗어나자마자 섬서 무림 연합회가 경양현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선우약가의 첫째이자 후계자인 선우영윤(鮮于令尹). 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지만, 선우청 역시 별다른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선우영민이 마공을 익히게 된 건 순전히 월영련의 계략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게 진실이나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선우영민의 증언만 가지고는 부족했다.

“당장은 진휘, 그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겠구나.”

선우영민의 말대로라면 인질로 잡혀 있다던 화선촌 사람들 역시 월영련의 존재에 대해 인지하고 있을 터였다.

묵룡일원공의 비급과 함께 그들까지 나서서 증언해 준다면 선우약가의 해명에 힘이 실릴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때 선우청의 맞은편에 함께 앉아 있던 공손량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문주님께선 금방 돌아오실 겁니다. 그때까지 저희가 시간을 끌어보겠습니다.”

“무슨 방도라도 있는 겐가? 섬서 무림 연합회의 전력은 만만치 않네.”

공동파는 물론이고 섬서의 이름난 문파와 무가들이 힘을 합친 게 섬서 무림 연합회였다.

백의문도들의 실력이 상상 이상이라고는 하지만 연합회의 전력을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공손량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로 모인다면 분명 큰 위험이겠지요. 그러니 저희가 할 일은 그들이 하나로 모이지 못하도록 하는 겁니다.”

***

“역시 공 총관님의 머리는 비상하시다니 까요. 그러니 문주님의 뒤를 이어 백의문의 이인자란 소릴 듣는 거겠지만.”

이자청이 히죽거리며 감탄을 내뱉자 옆에 서 있던 홍야의 얼굴이 다소 차가워졌다.

“입 다물어라.”

“예.”

백의문의 일장로. 총관인 공손량 다음 가는 지위. 그걸 내심 못마땅해하고 있던 홍야였다.

하지만 그런 홍야 역시 공손량의 혜안에는 탄복하고 있었다.

자고로 현명한 자는 검으로도 당해내지 못하는 법.

별다른 무공을 익히지 않은 공손량이지만 그의 지략은 백의문을 이끌어가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됐다.

그러니 문주인 유진휘 역시 마음 놓고 자리를 비울 수 있었겠지.

“일단은 저곳입니다.”

상념에 잠긴 채 이동하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이자청은 가시거리에 들어오는 장원 하나를 가리켰다.

홍야를 비롯해 두 사람을 뒤따르는 사십의 백의검대원들도 시선을 한데 모았다.

해검문(解劍門).

섬서 무림 연합회에 소속된 문파 중 하나로 해검문 역시 적잖은 숫자의 고수들을 경양현으로 파견했다고 들었다.

홍야와 이자청. 그리고 백의검대원들은 그런 해검문의 본진을 습격하러 온 것이다.

습격이라고는 했지만 살초는 배제하고 적당히 위협을 가하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거면 충분했다.

“가자.”

“예!”

“절대 사망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걸 명심하도록. 대신 최대한 날뛰어라. 놈들이 겁을 집어먹고 파견한 고수들을 복귀시킬 만큼 최대한.”

***

“자, 장로님!”

다급한 음성에 해검문의 장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느냐?”

“보, 본문이 습격당했답니다.”

“뭣? 그게 무슨 소리냐!”

수하의 보고에 장로 역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느닷없이 습격이라니.

“정체는 모르겠으나 적들의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피해가 심각하답니다. 사망자는 없지만 문주님마저 크게 다쳐…….”

보고를 듣던 장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섬서 무림 연합회의 집결령을 따라 경양현에 도착한 게 조금 전이었다.

애초에 섬서 무림 연합회는 공적으로 지목된 선우약가를 몰아내고자 구성된 연합이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집결령이 떨어졌으니 최대한 공로를 세우고자 해검문의 고수들을 대거 이끌고 왔다.

그런 와중에 해검문이 습격받았다면 피해가 심각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했다.

“복귀한다.”

“예? 하지만…….”

“연합회의 일도 중요하지만, 그 무엇보다 본문의 안위가 우선이다. 어서 돌아갈 채비를 하거라. 회주껜 내가 직접 사정을 전하겠다.”

“예!”

해검문의 장로는 급하게 연합회주인 막능제를 찾았다.

한데 막능제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해검문의 장로가 무슨 말을 꺼낼지 예상했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해검문에도 누군가가 쳐들어왔다던가?”

“그, 그렇습니다. 회주께서는 그 사실을 어찌 아시고?”

“조금 전에 팔선문(八仙門)과 안씨세가의 무인들이 이곳에서 이탈했네. 그 외에도 여러 세력이 자신들의 문파나 무가 또한 습격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되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야.”

“설마?”

해검문의 장로가 흠칫 놀랐고 막능제는 이를 갈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약가와 백의문. 놈들이 제법 머리를 쓰는군.”

“그럼 놈들이…….”

“아무래도 백의문 놈들이겠지. 그렇다는 건 선우약가에는 지금 백의문주도, 백의문의 무인들도 없다는 뜻. 지금 공격한다면…….”

“해검문은 빠지겠습니다.”

“뭐라?”

막능제가 눈을 치뜨며 짐짓 노기를 표출했으나 해검문의 장로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본문의 위험을 무시한 채 연합회를 도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놈들이 노리는 게 바로 이거네. 이대로 선우약가를 향한 공격을 감행한다면 백의문 놈들도 선우약가를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돌아와야 할 걸세. 그걸로도 위험은 충분히 방지할 수 있다는…….”

“송구합니다.”

막능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해검문의 장로는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쾅!

막능제 역시 분노와 함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지만 해검문의 장로는 이미 멀찌감치 멀어져가 있는 상태였다.

“빌어먹을.”

해검문. 팔선문. 안씨창가. 연합회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의 절반이 발을 뺐으니 남아 있는 이들에게도 불안감이 번질 게 분명했다.

어쩐다?

집결 날짜는 내일까지였다.

그 말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들도 존재한다는 거였다. 그들까지 배제한 채 남아있는 이들로만 선우약가를 공격한다면.

‘백의문이 없는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절반이 빠져나갔다고 하더라도 아직 연합회의 힘은 건재했다. 더군다나 자신 역시 공동파의 정예들을 데려오지 않았던가.

결단을 내린 막능제가 결심을 행동에 옮기려 할 때였다. 부회주 서량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회, 회주님.”

“또 무슨 일이냐?”

“그, 그게… 태산파가 섬서에 들어섰다는 보고입니다.”

“태산파?”

갑작스러운 태산파의 등장에 막능제가 눈을 치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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